4.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그래서 종교 이름도 ‘그리스도, 크라이스트’라는 외래어의 음차인 ‘기독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길지 않은 공생애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그 자신 예수가 아니라 하나님, 하나님 나라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를 가장 중심에 놓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본다면 예수가 손가락이라면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이 바로 하나님이시다.
이와 비슷하게 구약시대 많은 예언자들이 수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였지만 그 예언자 자신은 결국 손가락이었고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가리키는 방향은 항상 하나님, 조금 더 자세하게는 하나님이 보내실 구세주였다. 이런 차원에서 이슬람교 같은 경우 예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만 예수를 예언자 중 하나로 이해한 것이다. 물론 신약성경에도 이와 비슷한 내용이 나타난다.
손가락도 물론 중요하지만 손가락이 가리키는 것이 더욱 기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독교인으로써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간격을 메우기 위해 신학자들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동일한 본체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었고 후에 성령의 존재까지 함께 고려돼 삼위일체를 고백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예수님이 말씀하고자 했던 존재, 가리키고자 했던 존재가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인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경건해야 하는 사명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인가를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나마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것인지, 그리고 경건해야 하는 대상(사실은 대상이라는 말도 적절한 표현은 아니다)으로써의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누구인지, 무엇인지를 공부하도록 하자.
1) 하나님은 누구신가(무엇인가)?
하나님은 누구신가라는 질문이 맞는가, 아니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맞는가? 이런 질문 앞에 일단 당황하게 된다. 하나님은 당연히 인격적인 존재라고 배워왔으니 당연히 사람과 마찬가지의 존칭을 사용해야 맞을 것 같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로 생각하니까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본다면 하나님이 과연 인격적이라는 단어 안에 갇힐 수 있는 존재인가 하는 부분은 전혀 다른 질문을 유발한다. 하나님이 과연 인격, 인간적인 존재라는 상황에 국한되시는 분이실까? 하나님은 인간의 단어, 사고, 상상의 틀 안에만 머무시는 분이실까?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인간적이고 인격적인 속성을 갖는다고 우리가 고백하지만 사실은 그 너머 우리가 알 수 없는 차원의 존재이시다. 그런 분을 굳이 우리가 생각하는 세계관 안의 개념들로만 표현할 필요는 없으며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인격적이라고 우리가 편의상 고백하기는 하지만 결코 인격적이라는 한계 안에 머무실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계실까, 안 계실까? 당연히 계신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존재와 비존재의 개념을 넘어서 계시는 분이시다. 게시지 않는 상태로 계실 수도 있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그리고 자기의 생각의 틀 밖에 계시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하나님의 주권성을 전적으로 인정했다. 그처럼 지혜로웠다는 욥과 그 친구들도 막상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순간에 자신들의 생각이 모두 헛되었다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배우는 시점에서 이것 하나 만큼은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사실 우리가 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 인간의 사고와 개념을 넘어서 계시는 분이시라는 것!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가지고 있고 배워왔던 모든 것을 먼저 철저하게 내려 놓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을 역사 속에 성도들이 어떻게 고백하였는가 하는 것을 배우시기 바란다.
(1) 하나님이 누구라고(어떤 분이시라고) 생각하십니까?
항상 아는 것은 중요하다. 알고 하는 것과 모르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따를 때에는 거의 대부분 맹목으로 변한다. 맹목은 반드시 상처를 동반한다. 그 자신의 상처와 타인의 상처이다. 한국사회의 이념갈등 같은 경우가 대부분 그렇다. 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등의 개념이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은 채로 그 이념적 내용이 무엇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자기와 다르다는 이유로 마녀사냥식의 숙청이 지속되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가 동서로, 남북으로, 강남강북으로, 서울과 지방으로 더욱 깊은 갈등과 반목을 하고 있다. 그 갈등과 상처가 한국근현대사에 있어서 각종 학살사건과 조작사건 등으로 표출된 것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러나 그렇게 싸우는 자신들이 사실은 어디에 어떤 견해로 어떤 근거를 가지고 서 잇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규정 짓지 못할 때가 많다. 이럴 땐 이 편에, 저럴 땐 저편에 서다보니 일관성도 없고 결국 자기혼란에 빠지게 된다. 자기혼란에 빠진 경우는 필연적으로 대형사고를 치게 돼 있다. 정신적으로 혼란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 대구지하철역 방화사건 등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길고도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 그처럼 깊이 하나님과 반목하게 된 것도 자신들이 하나님에게 매어 있는 민족이라는 정체성의 망각하고 이방인의 우상들과 관계를 맺으면서부터 자기혼란에 빠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제대로 알고 따를 때에라야 열매를 맺고 건강할 수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도 떳떳하며 자발적인 동인으로 움직일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데 정작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 하나님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만 제대로 믿을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도 하나님이 정확하게 누구인지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을 상대로 범죄를 지었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십계명을 적은 두 돌판을 받으러 올라간 사이 백성들이 금을 부어 송아지 형상을 만들고 그 송아지 상이 자신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 앞에서 잔치를 벌였던 일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가졌다. 태중에 있을 때에는 태명을 갖는다. 어린 시절에는 원래 이름 말고 다른 이름으로도 부른다. 사회생활을 하면서는 호적상의 이름으로 불린다. 직장에서는 직장의 호칭, 동호회에서는 동호회원으로써의 이름, 인터넷 상에서는 ID를 갖는다.
하나님 역시 많은 이름을 가지셨다. 성경에서도 하나님을 여러 개의 다른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 이름들은 이스라엘 자체적인 호칭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다른 신들의 풍속이 하나님께로 스며들어와 얻어진 이름도 있다.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하나님이 맞는지, 하느님이 맞는지 하는 논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