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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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실까요?

기독교에 대해서 특별한 악감정을 가진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상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다. 구약성경은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의 성품에 대하여 ‘질투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내용에서 특별히 하나님은 자신을 ‘질투의 하나님’ 이라고 명명하신다(출 34,14; 신 32,21 등). 이 구절이 하나님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하며 다는 가치관, 다른 종교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배타성을 갖도록 만들었다는 논리이다.

기독교에 대한 혐오의 또 다른 근거는 하나님이 이방백성에게 내리시는 멸절의 명령에 근거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자리를 잡을 때 하나님은 이방백성에 대해서 멸절, 즉 완전히 죽여 없애버리라는 명령을 내리신다. 남녀노소뿐만 아니라 짐승들까지도 다 죽여서 완전히 씨를 말리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갖는 호전성도 이런 신관에서부터 빚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구약성경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하나님 상을 우리에게 제시하는 부분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연유로 초대교회에서는 구약의 신, 하나님을 다른 신들보다 열등한 존재로 이해하고 보다 높은 차원의 신을 믿음으로 특별한 영적지식을 받아야 한다는 이단분파가 생겨났다. 이른 영지주의라고 한다. 구약의 신은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바로 그 신이 아니라 ‘데미우르고스’라고 하는 비교적 저급한 신이라는 말이다. 기독교가 구약성경을 정경으로 이해하는 유대교로부터 분리되어 나온 교파이기는 하지만 구약성경의 진정성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은 상태에서 이와 같은 주장은 터무니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런 주장의 배후에 깔려있는 구약성경이 묘사한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전쟁의 신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지역의 민족들은 하나님을 전쟁의 신으로 생각하였다. 물론 우상 중에 아세라, 아나트, 아스다롯, 세 여성 신이 등장하는데 이들 중 하나가 전쟁을 담당하는 전쟁의 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 역시 전쟁의 신으로 인식되었다. 무엇보다도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하나님을 전쟁의 주관자로 이해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전쟁을 많이 수행하면서 광야 생활 및 가나안 정복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성격을 규정한 면이 없쟎아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 4,34에서 하나님은 ‘시험과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과 크게 두려운 일로 한 민족을 다른 민족에게서 인도하여 내셨다’고 말씀하신다. 이는 전쟁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다윗은 하나님이 전쟁을 주관하시는 전쟁의 신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던 왕이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올 때에 골리앗이 하나님을 모욕하는 소리를 듣고 하는 말이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었다(삼상 17,47). 시 24,8에서 다윗은 ‘전쟁에 능한 여호와’라고 노래한다. 법궤가 전장에 있느냐 없느냐로 전쟁의 승패를 가늠하던 것이나 전쟁에 나가기 전에 우림과 둠밈을 던져 승산을 따져보는 일, 선지자나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께 묻고 전쟁에 나갔던 일을 보면 고대와 사사시대, 그리고 왕국시대까지 하나님은 분명히 전쟁을 주관하는 신으로 인식되었다.

 

지역의 신

오늘날 하나님은 범세계적이며 우주적인 신으로써 숭배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한낱 한 지방 혹은 한 지역의 신으로 여기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길 것이다. 물론 그렇다. 하나님 자신이야 어디 변함없이 항상 그분이셨지만 하나님을 이해하는 사람들의 방식이 그처럼 편협했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다. 모든 신이 다 그렇겠지만 이스라엘이 섬기던 하나님 역시 한 지역, 한 지방의 신으로부터 출발하였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여러 신들과의 경합에서 승리하여 왕 중의 왕이 되신 분이라고 보는 것이 학술적으로 보면 타당하다.

하나님의 이름과 관련하여 나오는 지명이 여럿 있다. 예를 들어 벧엘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미 공부한 대로 ‘엘’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지칭한다. ‘이스라엘’의 경우에는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뜻이다. 벧엘은 하나님(엘)의 집(벧)이라는 뜻이다. 지명에 ‘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경우에는 특별히 그 지방, 그 지역이 하나님께 속한 지역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유명한 지방성소들이 있었던 곳이 바로 하나님이 관할 하시던 지방이다. 아무튼 하나님 자신은 분명 아니겠지만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하나님은 분명 특정한 지방의 신으로부터 출발한 존재임은 분명해 보인다.

 

산의 신

하나님은 산신이라는 생각이 이스라엘 백성의 뇌리에 있었다. 하나님은 항상 산에서 현현하셨다. 모세가 하나님을 처음 뵌 것도 하나님의 산이라고 불리는 호렙산에서였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불러 계명을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탈출하여 광야를 헤맬 때 아말렉 민족과 싸우게 된다. 이때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데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는 아말렉이 승하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가나안 땅을 점령한 이스라엘 백성들도 대부분 산지에 거주하였다. 평지의 비옥한 땅은 아직도 가나안과 블레셋 사람들이 거주하였고 실제로 이스라엘은 산지에 살았는데 이도 역시 하나님이 산신이라는 의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블레셋은 이미 철기문명을 가진 문명인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은 아직도 청동기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한 상황이었다. 평지에 철기문명을 가진 블레셋은 철병거를 가지고 있었고 주요 병력이 철병거대였다. 그러나 병거가 산에까지 올라와서 자유롭게 다니지는 못한다. 이런 군사적인 열세 때문에 산에서 평지로 내려가지 못한 이유도 있기는 하지만 아무튼 그들에게 있어서 산은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더욱 안전한 곳이라는 의식이 있었다.

남북왕국시대로 넘어와서 엘리야가 바알의 400명 선지자들과 한 판 붙은 것도 역시 갈멜산에서였다. 하나님은 이때 하늘에서 불을 내려 예비한 번제물을 다 태우시는 기적을 보이셨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합왕이 득세하는 것을 보고 엘리야는 실의에 차 있는 중에 죽기를 소원했다. 그런데 천사가 그를 먹이면서 하나님의 산 호렙(호렙산과 시내산은 같은 곳으로 보인다)으로 가게 하였다. 그곳에서 미세한 소리 가운데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새 힘을 얻게 된다.

또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치러 왔을 때에도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산의 신이기 때문에 평지에서 싸우면 자기들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는 대화를 나눈다(왕상 20,23).

이처럼 이스라엘이 섬겼던 신, 하나님은 산의 신으로 여겨지고 숭배를 받았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산지를 거점으로 하고 있었던 연유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물론 하나님을 우주의 신, 창조주로 고백하지만 여러 신이 경쟁하던 다신적 상황에서는 특히 산신으로 이해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다신적인 상황에서 바알이 우뢰와 비를 관장하는 농업적 신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시대적인 배경 자체가 신을 어떤 특징적인 상황과 배경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때였음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구약전기시대에 나타난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우주적인 존재는 아니었다. 아니 우주적인 신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창세기 1,1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과 관계하시는 하나님은 제한적인 분으로, 그리고 지역적인 한계와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을 넘어서지 못하는 분, 여러 지역의 다른 신들과 경쟁관계에 있던 신으로 이해된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셨던 질투와 분노, 그리고 멸절의 명령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간다.

사실 하나님이 이렇게 제한적인 분, 특정한 한 분야를 관장하는 신으로 이해된 측면이 있었던 것은 하나님 그 자신의 특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해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세계관과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세계관이 편협하였기에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을 이해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상은 여러 모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결론을 한 가지 도출 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세계관이 넓으면 넓을수록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도 그만큼 커진다는 것이다.

구약후기로 넘어오면 하나님의 위상이 상당히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바야흐로 신약시대에 이르면 국경과 민족을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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