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의 삶과 ‘치열한’ 삶 무엇이 다른가?
- 책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고 -
도대체 언제부터일까?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이 책에 의하면 ‘프로야구’가 잠식하는 세상에는 승리주의와 경쟁주의의 또 다른 이름 ‘프로복음’이 존재한다. 프로의 세계는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 무한경쟁 및 승자독식의 체제이며, 노동의 유연화를 접목한 개인적, 구조적 차원의 노골적인 자본주의화를 이야기한다. 죽을 만큼 열심히 살아라! 단 한명의 친구가 네 옆에 있던지 말던지, 네 몸의 어느 한 구석에서 검은 세포가 미소를 짓던지 말던지, 그저 성공하기 위한 갈고 닦음, 다시 말해 치열한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가 인생의 좌우명이 되어 버린 세계, 그것이 바로 프로의 세계이다.
어제 어머니와 대화하다가도 이 ‘프로가 되어라’라는 말은 여러 번 등장한다. 말씀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 설교의 프로가 되어야 한다! (난 교회 전도사니까) 맥락상 전문인이 되라는 말이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로라는 것은 필시 나의 앎을 수단으로 거래를 잘 하는 사람 또는 그러한 삶의 모습을 이야기 하는 것 아닌가! 세상을 승자와 패자로 나눌 때 확률은 반반인 것 같지만 종국에는 모두가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게임이거늘(사람의 자원과 능력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연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 있던가?),
결국 몇 사람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이 루저가 될 수밖에 없는, 아니 단 한 사람도 끝까지 살아남을 수 없는 구조 아닌가? 온 국민의 환호 속에 프로 중의 프로라 일컬음을 받던 축구선수 안정환은 결국 우리의 기억 속에서만 살아남아 있지, 그의 현재 모습은 단연 루저 그 자체 아닌가! 이놈의 프로복음이 외쳐 되는 진실의 실상은 성공 이후를 상상해 볼 때 맥없이 털썩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마치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 그 맹목적 성공을 향한 달음박질만을 강요하지 그 이 후의 삶에 대한 상상은 불허하는 것이 프로의 법칙이다.
지난번에 함께 나눈 촘스키의 입장에서 진실을 이야기해야 하는 지식인들이 책무를 다하는 삶 또한 프로복음과 다르지는 않은 고단하고 치열한 삶이지만, 여기서 이야기되는 치열함은 ‘프로’가 되는 치열함과는 그 결이 다르다. 이 땅에서 억울하게 소외당하는 민중들의 고단함에 존재자체로 미안함과 불의를 느낄 수밖에 없는 이들이 진실을 알고 그 진실에 맞게 살아가려하는 지식인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안주하지 않고, 고민하고 책을 보고, 실천하며 삶의 터전과 감수성, 상상력을 더 넓은 범주로 확장시키고자 몸부림치는 것 아닌가?
나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처럼 일부러 져주는 야구경기를 할 수 있는 위인은 못된다. 사실 돌아보면 대안적 삶을 부르짖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것 같지만 그것의 뿌리에는 결국 어떤 종류의 프로가 되기 위한 발버둥이 아닌지 다시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이 부딪힌다. 여유있게 루저됨을 누리면서 살아갈 것인가? 아님 이 ‘프로’만이 살아남는다고 떠들어대는 미친 기차를 멈추게 하기 위해 죽어라 뛰면서 기차 안의 사람들에게 창밖을 좀 보라고 소리칠 것인가! 미친 기차야 어딜 가든말든 그냥 혼자 여유롭게 불어오는 바람을 즐기는 것, 과연 오래 할 수 있을까? 삼미의 팬클럽은 한 몇 개월간 했나보다. 하지만 좀 더 지속적으로 많은 이들이 함께 멈추지 않는 한 미친기차는 계속 갈 것 아닌가!
아무튼 이래저래 치열하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치열하지 않으면 이 프로의 세계가 요구하는 시대에 그럭저럭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맘 편히 살 수 없을 테니 말이다.
함게 생각해 볼 거리
- 여유 vs 나태 / 프로 vs 치열 무엇이 다른가? 넌 어디에 속하나?
- 넌 뭘 지향하나? /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팬클럽 뭐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