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에서 윤성근 사장님의 추천으로 보리슬라프 페키치의 '기적의 시간'이라는 책을 두 권 구입했다. 좀 지루하기는 하지만 좋은 책이라는 추천에 약간 떨떠름 했지만 책의 전문가가 추천하는 말이니 믿고 들고 왔다.
사실 신학, 예수, 하나님... 뭐 그런 단어 나오는 책은 좀 피하고 싶었다. 너무 무거워서 그냥 삶의 이야기(좀 무겁더라도)를 다룬 소설류를 보고 싶었었다. 그런 와중에 소개 받은 책이다.
역시 지루했다. 그나마 책 읽을 마음과 시간이 별로 없는 편이라 진도가 참 안 나갔다. 무슨 소린지도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 그래도 어찌어찌 조금씩 조금씩 읽어갔다. 그런데 읽어가다보니 조금씩 재미가 더한다.
두 달 넘게 손에 쥐었던 책을 다 읽고 내려놓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상당히 이단적인 소재의 소설이다.
내용은 예수의 치유기적과 관련된 일화들을 소개하는데 기적의 치유자인 예수는 부차적으로 등장하고 치유를 받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 모든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그런데 책은 기적적 치유를 받은 이들이 하나같이 그 기적으로 인해 힘겨워하고 치유자를 미워한다는 설정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좋든 싫든 현실에 안주하면서 현실에 익숙해지면서 살아오던 삶이었는데 급작스레 찾아온 치유의 기적이 탐탁지 않은 것도 있지만 삶의 주변부에 거하던 이들이 기적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중심부로 들어오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군상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상황을 좀더 세심하게 고려한다면 기적의 치유는 별로 탐탁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기적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창조적 고민에 맏닥뜨리게 된다.
일방적인 주인공인 예수라는 틀에 따라 성서를 읽던 습관에 창조적인 독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방적 주인공인 쌍방적인 주인공 시스템으로 변화되고 각자의 이야기를 함으로 예수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현상과 현실에만 안주하고 머무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기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내포한다. 긍정적인 기적이 되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의 자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적을 봐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일상의 한 단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도 기적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매 순간이 기적, 긍정적인 기적의 연속이 된다. 기적의 의미, 그리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이 책은 계시의 단계로 접어든다.
끝부분에는 너무 많이 나갔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예수가 아니라 루포의 아비인 키레네사람 시몬이라는 설정은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이 주장했던 내용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후기를 보니 페키치가 매우 독실한 러시아정교회 신자라고 하니 이런 모든 내용이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신앙, 신학적 고민을 담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이미 교리화된 예수이다. 교뢰가 하나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일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살아 생동하는 인물로써의 예수를 보게 하지는 못하는 약점이 있다. 기적의 시간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는 좋은 도전이 된다.
믿으라는 강요와 세뇌, 습관에 의해 믿어지게 된 믿음은 세뇌가 폭로될 때는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철저한 이해와 동의에 바탕한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이라 할지라도 도전 앞에서 의연하게 믿음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기적의 시간은 매우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좀 지루한 책이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치유의 기적을 선물로 받았으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반응해보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 되리라. 단, 너무 교리적으로 읽지만 않으면 말이다.
사실 신학, 예수, 하나님... 뭐 그런 단어 나오는 책은 좀 피하고 싶었다. 너무 무거워서 그냥 삶의 이야기(좀 무겁더라도)를 다룬 소설류를 보고 싶었었다. 그런 와중에 소개 받은 책이다.
역시 지루했다. 그나마 책 읽을 마음과 시간이 별로 없는 편이라 진도가 참 안 나갔다. 무슨 소린지도 도무지 못 알아먹겠다. 그래도 어찌어찌 조금씩 조금씩 읽어갔다. 그런데 읽어가다보니 조금씩 재미가 더한다.

두 달 넘게 손에 쥐었던 책을 다 읽고 내려놓는 순간 만감이 교차한다. 상당히 이단적인 소재의 소설이다.
내용은 예수의 치유기적과 관련된 일화들을 소개하는데 기적의 치유자인 예수는 부차적으로 등장하고 치유를 받은 사람들의 관점에서 그 모든 일어난 일을 묘사한다. 심리 묘사가 매우 뛰어나다.
그런데 책은 기적적 치유를 받은 이들이 하나같이 그 기적으로 인해 힘겨워하고 치유자를 미워한다는 설정이다. 하긴 그럴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좋든 싫든 현실에 안주하면서 현실에 익숙해지면서 살아오던 삶이었는데 급작스레 찾아온 치유의 기적이 탐탁지 않은 것도 있지만 삶의 주변부에 거하던 이들이 기적으로 인해 갑자기 삶의 중심부로 들어오게 될 때 그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군상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런 상황을 좀더 세심하게 고려한다면 기적의 치유는 별로 탐탁하지 않을 수 있는 부분이 존재한다. 그래서 기적은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새로운 창조적 고민에 맏닥뜨리게 된다.
일방적인 주인공인 예수라는 틀에 따라 성서를 읽던 습관에 창조적인 독서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일방적 주인공인 쌍방적인 주인공 시스템으로 변화되고 각자의 이야기를 함으로 예수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진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된다.
또 한편으로는 현상과 현실에만 안주하고 머무르려고 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폭로한다. 기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모두 내포한다. 긍정적인 기적이 되기 위하여는 우리 자신의 자세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적을 봐도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일상의 한 단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일상도 기적으로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다면 매 순간이 기적, 긍정적인 기적의 연속이 된다. 기적의 의미, 그리고 우리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준다. 이런 관점을 가질 때 이 책은 계시의 단계로 접어든다.
끝부분에는 너무 많이 나갔다. 십자가에 달린 것이 예수가 아니라 루포의 아비인 키레네사람 시몬이라는 설정은 그동안 수많은 이단들이 주장했던 내용과 많이 흡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자후기를 보니 페키치가 매우 독실한 러시아정교회 신자라고 하니 이런 모든 내용이 단순히 문학적 장치만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신앙, 신학적 고민을 담은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믿는 예수는 이미 교리화된 예수이다. 교뢰가 하나의 종교를 지키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요소일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살아 생동하는 인물로써의 예수를 보게 하지는 못하는 약점이 있다. 기적의 시간은 이런 약점을 극복하는 좋은 도전이 된다.
믿으라는 강요와 세뇌, 습관에 의해 믿어지게 된 믿음은 세뇌가 폭로될 때는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철저한 이해와 동의에 바탕한 믿음은 개인적인 차원이라 할지라도 도전 앞에서 의연하게 믿음의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기적의 시간은 매우 의미있는 문제제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좀 지루한 책이기는 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치유의 기적을 선물로 받았으나 선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존재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에 반응해보는 것도 즐거운 체험이 되리라. 단, 너무 교리적으로 읽지만 않으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