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4.21 15:25

2018년 4월 22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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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4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우리도 부활의 기적과 기쁨을 늘 체험하는 복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교회학교가 열립니다. 다음 주일(29일) 오후에는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농촌생태활동을 가겠습니다. 밭 만들기, 장작 패기를 하고 저녁식사를 한 후 돌아오겠습니다. 많은 참석 바랍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열립니다.
4. 안주영 청년의 결혼식이 28일(토) 오후 12시 30분 기독교연합회관 웨딩홀에서 열립니다. 교회에서는 11시에 출발합니다. 많이 오셔서 축복해주십시오.
5. 올해는 전가족 심방을 하겠습니다. 한 가정도 빠짐없이 일정을 정하셔서 담임목사에게 알려주십시오.
6. 해외 여행 중인 교우 가족들이 즐겁고 안전한 여행하고 오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7. 5월 둘째 주일(13일)에 야외예배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견이 있으신 분은 제안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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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아끼고 좋아하는 신학대학 여자 후배 부부를 만났습니다. SNS를 통해서 보는 제가 좀 힘없어 보이고 기운도 빠져 보였는지 전화를 걸어와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자고 하였습니다. 약간 무기력한 감도 없지 않고 나이를 많이 먹고 들어간 저를 '오빠 오빠' 하면서 잘 따르고 성격도 활달했으며 학내문제 사회문제로 어수선할 때도 앞에서 문예활동을 한 참 괜찮은 후배가 오랜만에 만나자는데 굳이 빼기도 뭣해서 약속을 하고 만났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후배가 살이 많이 빠져 있어서 만나자마자 '어디 아프니?'하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아픈 건 아니라고 하는 후배와 저녁을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만나면 옛날 이야기로 꽃을 피우게 되죠. 솔직히 지금 생각하면 못된 송아지 같던 시절이라 개인적으로 얼굴이 화끈거리고 미안하고 또 부끄러운 그런 이야기들이었지만 그것도 아름답고 좋은 기억으로 남겨준 덕분에 웃으면서 오랜만에 좋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다른 후배들도 그렇지만 이 후배도 저에게 '변치 않고 이 자리에 한결 같은 모습으로 남아 있어줘서 고맙다'는 말을 합니다. 고백하면 그런 말이 저를 오늘까지 버티게 해 준 힘이었던 것은 분명지만 이제는 부담스럽고 부끄럽고 또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이 잘 한 일인가는 좀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잠시 후에 후배의 남편이 왔습니다. 그는 서울의 어떤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고 있는데 대학 다닐 때 총학생회 임원을 맡았기도 한 성실하고 선한 사람입니다. 자연스럽게 목회 이야기도 하게 되었지요. 이제는 어느 정도 극복이 됐지만 얼마 전에 교인들과 후배 사이에 오해가 생겨서 맘고생을 많이 해서 살이 빠졌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일로 생각이 많이 복잡하다고도 합니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지만 행복하냐는 물음에는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마음 고생하는 아내를 보면서 그도 내색은 많이 안 했지만 역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다들 만나 반갑게 웃으며 떠들다가 돌아왔습니다.
집에 와서 보니 후배가 '반가웠다, 남편이 나를 만나서 많이 고마워한다'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얻어먹은 것은 난데 뭐가 고마웠을까 생각하면서 목회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봅니다. 꾸준히 자리를 지키고 버티는 거, 사람들과 오해도 하고 풀기도 하면서 그렇게 하루하루 사는 거? 역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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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손님,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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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수요성서대학이 좀 썰렁해졌습니다. 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이 생겼고, 지난주에는 고수정 성도님이 몸살에 걸려 오시지 못하였습니다. 안산에서 너무 추웠던 것 같습니다. 성서대학 마치고 오산리 기도원에 벚꽃이 예쁘다고 보러가기로 했는데 빠지게 되신 분이 많아 아쉽던 차에 미국에 사시는 함옥분 장로님 오빠, 함수종 선생님이 오셔서 함께 점심도 먹고 나들이에도 동행하셨습니다. 미국에서 매주 노인예배의 사회를 보신다는 말씀도 들었고 이번 주일에는 우리교회에 오셔서 함께 예배하시겠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번 주말에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신다고 하는데 항상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나눔장터 운동을 해보려고 합니다”
아무도 안 알아줄지 모르겠지만 우리교회는 나름 환경을 생각하는 교회입니다. 그렇죠? 한동안 꽤 열심히 초록가게도 운영하면서 작은 부분이지만 생태환경운동에도 동참하였고 가급적 주일 점심식사에 유기농 식자재를 사용하려고 노력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요즘은 그런 작은 노력들이 부족한 것 같아 마음에 걸립니다. 이런 생각을 늘 하던 차에 집에도 뒹구는 안 쓰는 물건들, 너무 많이 갖고 있는 물건들, 항상 쓰는 것이 아닌 물건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은 나눠 갖고, 안 쓰는 것은 필요한 사람에게 주거나 바꿔 쓰고, 항상 쓰는 것이 아닌 것들은 빌려주기도 하면서 일상생활에서 비워가는 운동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중입니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도 아닌 것을 너무 많이 소유하고 또 쌓아놓고 사는 것이 바람직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아닙니다. 작은 출발에 많은 관심 가져주시기를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74년 4월 25일    "포루투갈의 반독재 투쟁 카네이션 혁명 성공"
카네이션 혁명(별명: 리스본의 봄)은 1974년 4월 25일에 발생한 포르투갈의 무혈 쿠데타이다. 포르투갈 내에서는 날짜를 따서 4월 25일 혁명(4·25 혁명)이란 이름으로 더 자주 불린다. 40년 이상 독재한 살라자르 정권의 실정과 공산권 국가의 지원을 받는 
식민지 국가들의 반군과 계속되는 전쟁으로 포루투갈 경제는 낙후되었다. 이에 대한 반발로 좌파 청년 장교들은 '국군운동(MFA)를 결성하고 체제변혁을 목표로 세웠다. 카네이션 혁명이란 이름은 MFA가 주도한 군사 쿠데타였지만 혁명 소식을 들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와 혁명군에게 환호하며 카네이션 꽃다발을 안겨주거나 병사들이 멘 총구에 카네이션을 꽂아주며 지지 의사를 표시한데서 비롯한다. 이 혁명 이후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제외한 모든 해외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일괄 포기하였으며, 정권은 군부의 과도 정부를 거쳐 1976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에 의해 민간 정부로 이양되었다.
출처 : 위키피디아(https://ko.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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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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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 잔 해라
산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산을 내려와야 하고
사막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먼저 깊은 우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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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예수 그리스도Ⅱ (3)
2. 우리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가 부활승천하심으로 대속자가 되시고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2.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로 정의와 평화가 입을 맞추는 참다운 생명의 나라이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가 되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구원자가 되신다는 고백이고, 예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를 용서 받음으로 죄로부터 자유로워져서 내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경험할 수 있다고 하여도 사회구조적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온전하게 완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불의한 세력들과 구조들로 인하여 구조적 모순과 악이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이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과 공동체들이 소외되고 억압과 고난을 당하고 있으므로 현실의 세계와 하나님의 나라 사이에는 큰 간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넘어서 사회구조적인 죄(구조악)로부터의 해방도 포함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세상이었지만, 인간의 탐욕과 죄로 인하여 추하고 부조화한 세상으로 변해 버렸다. 인간의 이기심으로 자연은 착취와 억압을 당함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파괴되어 버렸다. 자연세계는 환경파괴로 인하여 이상기후들이 나타나고 자연은 신음을 하고 있다. 인간들은 자연을 이용한 착취의 대상으로만 간주하며 살아오다가 생태계 파괴를 경험하면서 자연의 죽음은 곧 인간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하였다. 창세기의 “땅을 정복하라”(창세기 1:28)는 말씀을 이용/착취로 읽어 가지 않고 보전/관리로 읽어 가면서 인간의 자연의 주인이 아니고 청지기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탄식하고 고통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피조물들도 썩어짐의 종노릇을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려고 한다. 그러므로 자연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야 하므로, 구원의 지평은 온 피조물로 확대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온 세계를 구원하는 우주적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죄를 속죄하는 대제사장으로서 대속자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는 대속자를 넘어서 불의한 구조에 의하여 고난당하는 이들을 고난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구세주이시고, 착취당하고 신음하는 자연과 온 피조물을 해방하는 구세주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승천하심으로 현재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분이므로 그분의 활동은 인간의 내적인 문제에만 제한되지 않고 사회와 자연과 우주로 지평이 확대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대속자를 넘어서 온 세계를 구원하시는 구세주이시다. 결국 감리회 신앙고백은 “구세주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함으로 예수님은 인간의 구원자가 되심을 넘어서 온 세계의 구원자가 되시는 우주적 그리스도임을 고백하고 있다. 
 
3.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압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현은 하나의 문장을 줄여 놓은 표현이다. 즉, “예수님은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을 축약한 표현이다. 그리스도는 메시아와 동일한 의미로 히브리어로 구원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메시아라는 히브리어가 그리스어로 번역되면서 그리스도라는 말이 생겨났다. 메시아와 그리스도는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단어이며 한국어로는 ‘구원자이므로, 메시아, 그리스도, 구원자는 모두 동의어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에서 ’예수‘는 나사렛 예수를 지칭하는 고유명사이고, ’그리스도‘는 하나의 칭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고유명사라기보다는 두 개의 명사가 결합한 것이다.(예수+그리스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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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바람을 보았니?
‘마음나무’을 읽고
 
  티토 자라쉬 무코파드야이 저,  이혜선 역, 한얼미디어, 2005.
 

<템플 그렌딘>이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여성의 이야기였는데, 결국 그러한 장애를 극복하고, 교수가 되고, 더 나아가 웬만한 사람도 하지 못하는 성과들을 달성하며 성공을 이루는 감동적인 내용의 영화였다. <템플 그랜딘>은 나름 훌륭한 영화이지만 삐딱한 시선으로 보자면  그렇고 그런 슈퍼 장애인에 대한 승리주의와 자본주의형 판타지를 표현하는 영화, 또는 장애 때문에 고통받는 이들에게 희망고문을 일삼는 영화라 일축 할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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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통하여 이전에 장애를 소재로 다룬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 자폐성 장애인이 느끼는 세상, 그의 감각과 시각이 영상으로 표현되는 장면 만큼은 이 전에 느끼지 못했던 커다란 자극으로 남는다. 예전에 오랫동안 ‘토마토학교’에 참여하면서, 또 장애인들과 함께 영상활동을 하는 지금까지도 나는 여전히 장애인이 바라보는 세상, 특히 자폐성장애인이 느끼는 감각에 대해 너무나 무관심했고, 무지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연장선상에서 <마음 나무>를 읽은 경험은 영화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풍성한 감수성과 아픔, 그리고 다른 세계와 접하는 지점에서 일어나는 한 개인의 철학적 사고들이 장애/비장애의 범주를 넘어 누구에게나 ‘존재’하고 있음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되었다. 
 ‘티토’를 통해 들여다보는 세상, 자폐성 장애인 당사자의 고백과 감성은 물론 모든 자폐성 장애인에게 적용하여 일반화 시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티토를 통해 나의 사고와 감수성, 그리고 실천의 깊이와 폭을 그 만큼 확장시킬 수 있었다고 감히 고백해 본다.             
 
□ 몸과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다는 것 -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세계가
내 소망이 나에게 그러하듯이 
나를 거부하니 
마음이 아프다.” 
 
 티토의 내면에서 가장 많이 포착되는 장면이 바로 자신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티토는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으면 날개들이 원모양으로 하나가 되고 멈추면 다시 몇 개의 날개 형태로 있는 것 같이, 자신의 몸이 그렇게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져 있는 느낌이라고 고백한다. 실제로 수영을 할 때, 말을 할 때, 체육활동을 할 때, 글씨를 쓸 때, 사소하게 사물을 인지할 때, 티토는 이런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도 역시 자기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을 실망시키기 싫다. 남들과 다른 사람 취급 받는 것도 싫다.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기도 싫다. 관심가는 일을 집중해서 하고 싶고 그것을 할 때, 방해받고 싶지 않다. 자연스러운 욕구들이다. 하지만 이 자연스러운 욕구들은 자폐성 장애를 가지고 있는 티토의 일상에서는 그리 자연스럽지 못하다. 몸이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마음도 자기 멋대로이다. 자기 내면의 여러 자아(신체기관)들도 스스로 소통하지 못하는데, 어찌 타인과 소통할 수 있으랴? 
 나는 여기서 장애의 범주를 더욱 넓혀 이해해보고 싶다. 자기 내면의 힘겨움(그것은 때때로 심리적인 것에 국한하지 않고, 근육과 운동능력 등을 포함한다.)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타인과 함께 소통해야 하는 삶은 장애물의 연속일 수 있다. 소통은 우리로 하여금 안정감과 희망 그리고, 도움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통’이 되지 않는 순간, 삶은 점점 무너져 내린다. 타인과의 소통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소통은 더욱 중요 할진데, 자폐성 장애인의 경우 얼마나 힘이 들지 상상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소통불가의 현실은 횟수와 내용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에게나 맞닥뜨려진다. 몸과 마음이 시원하게 완전히 일치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초보자가 탁구를 배운다고 배운 것만큼 바로 시원하게 탁구를 칠 수 있는가? 피겨스케이팅을 배운다고 김연아가 될 수 있느냔 말이다.) 
 위의 내용이 말도 안 되는 예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실상 장애인의 피해자화도 아니고, 그렇다고 모든 사람에겐 장애가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 중간의 여기저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소통일 것이며, 그 소통의 정도와 소통의 방식을 어떻게 만들어 갈 수 있느냐가 바로 우리의 고민 지점이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이 일치되지 않는 일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그 소통불가의 현실에서 소통의 지점을 정확히 확보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우리 모두가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 좀 더 디테일하게~ 좀 더 섬세하게  
 
“어떻게 놀지요!
말을 못 하니? 
어떻게 말하지요!
말을 못 듣니?
어떻게 듣지요!
한 번 해볼래?
네 해볼래요. 하지만 어떻게 하는지 가르쳐줘요.” 
 
 티토가 만나는 세상에서도 해야 할 것은 정해져 있다.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해야 할지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하지만 난관은 언제나 ‘어떻게’ 하느냐이다. 디테일한 방법과 태도, 그 지난한 노력과 투쟁이 티토의 삶에선 필수적이다.  
 타인과의 만남에서 섬세함이 요구될 때가 있는데, 그것은 같은 방향을 바라보더라도, 그 차이들을 인지하지 못하며, 그 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와 소통의 발전 가능성을 올바로 진단하지 못하게 된다.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 당사자 운동을 하는 이들은 이 날을 ‘차별철폐의 날’로 부르기도 한다. 동정과 시혜로써 장애인을 대상화하는 세파의 곁눈질을 거부하고 진정한 디테일, ‘어떻게’라는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수많은 장애인들을 여전히 거리에서 차별없는 세상에 대해 상상하고, 요구하고 호소하고 있다. 
 
□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그런 세상이 가능할까?
동정이 아닌 수용과 사랑이 있는 곳!
내 이야기가 여러분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다면 
내 ‘희망’은 값진 보답을 받게 될 것이다.” 
 
 결국 티토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나 자연스러운 삶의 모습이건만 단순한 불편함과 어려움을 넘어 결국 수용되지 못하고 거부되어온 자신의 인생에 대한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일 것이다. 내가 처음 토마토학교에 참여했을 때, 학부모님들께서 해 주신 말씀이 생각난다. 우리 아이들이 토마토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많지만, 대학생 선생님들 한명이 변하면 그 만큼 아이들이 살기에 행복한 세상이 되지 않겠냐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장애인들이 힘겨워하는 것은 실상 신체적 장애 뿐 아니라, 장애라는 굴레가 가져오는 그 밖의 것들도 크게 작용하게 된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감히 ‘장애해방’이라는 구호가 우리모두의 당면과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책을 읽으며 인상 깊은 티토의 시가 있다. 8살 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쓴 시라 하기엔  그 통찰의 크기가 사뭇커서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누가 바람을 보았니?
너두 아니고 나도 아니지 
하지만 나무가 머리를 숙일 때
바람이 지나가고 있는거지!”
 
 차별 가득한 이 땅. 나무가 머리를 숙이는 그 때는 과연 언제 오는 것일까.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이번주 금요일에 역사적인 제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립니다. 두 번의 정상회담을 통해 다진 한반도의 교류와 협력의 신작로가 수구반민족 정권의 대결정책으로 철저하게 파괴되는 쓰라린 경험을 하였지만 이번에는 되돌릴 수 없는 화해의 약속을 하고 나아가 북미정상회담에서도 평화적 성과를 거두는 마중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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