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6.02 22:58

2018년 6월 3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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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일 및 평신도주일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제라는 고백으로 평신도의 지도력과 역량을 확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수요성서대학을 종강하였습니다. 마지막 종강 모임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 구하며 방학 중 계절학기 강의를 통해 최종 정리를 하겠습니다. 이번 학기에 열심히 참석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4. 윤성일 집사님 부친 윤영권님께서 지난 28일 저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셔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유가족에게 위로의 인사를 전합니다. 

5. 8일(금) 저녁에 교역자 부부모임을 갖고 함께 식사하며 공동목회 계획을 논의하겠습니다. 교역자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6월 생일 축하] 방인웅 장로님(3일), 고남곤 권사님(6일/음 3.22), 박순용 집사님(7일), 이관택 목사님(10일), 김영순 권사님(21일), 방현섭 목사님(25일), 김희수 어린이, 남기평 목사님(28일)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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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관한 새삼스러운 명상

 

5월, 우리 교회에는 두 건의 장례가 있었습니다. 이재원 성도님과 윤성일 집사님이 사랑하는 아버지를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리고 6월을 시작하는 첫 날 저는 충북 음성에서 전혀 알지 못하는 여섯 분의 이장, 납골예식을 집례하였습니다. 지금까지 18년 동안 목회를 하면서 이렇게 죽음을 가깝게 느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저는 장례식을 제대로 집례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많지 않은 교인이지만 비교적 젊은 연령층이라서 그럴 것입니다. 또 직계가족이 돌아가시는 경우에도 기독교인이 아닌 경우가 많아 위로예배 한 번 제대로 드린 기억이 없습니다. 교우들의 배경이 전통적 기독교 가정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교회의 자유로운 분위기를 설명하는 요인 중 하나일 겁니다. 아무튼... 

죽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죽음을 대하는 우리의 가장 대표적인 태도는 공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와 장소를 알 수 없고 순서도 없다는 죽음을 공포의 대상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라는 거부할 수 없는 현실,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름다운 삶은 죽음도 아름답고 수치스러운 삶은 죽음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죽음은 그 후손들의 삶에도 아름답게 아로새겨지지만 추악한 삶을 살다 간 사람의 죽음은 역시 그 후손들의 삶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어렵지 않게 봅니다. 그러니 죽음은 한 개인의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크고 작은 의미로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죽음을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 극복해야 하는 것, 반드시 이기고 부활해야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으며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위한 관문, 과정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죽음이라는 삶의 일부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요즘 돌아가는 세태를 보면 잘 사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잘 죽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부활을 준비할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어떻게 늙어가면서 어떤 죽음을 맞을까 준비하는 것 역시 우리 삶에 꼭 필요한 훈련과 연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49년 6월 6일    "친일경찰의 반민특위 습격, 6.6사건 발생"

일제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되고 1948년 제헌의회를 구성한 후 이승만 정부의 반발을 무시하고 반민족행위자처벌특별법을 제정했다. 이 법에 따라 10월 12일에 저명한 독립운동가이자 국회의원인 김상덕을 위원장으로 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반민특위는 일제의 힘략전쟁에 기여한 화신재벌 총수 박흥식, 독립투사 250명을 체포하고 17명을 처형한 악질 친일파 이종형, 변절자 최린, 친일 변호사 이승우, 악질 경찰 이성근 등을 잡아들였으며 1949년 1월 25일에는 악질 친일경찰의 대표인 노덕술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국내 지지기반이 약하여 친일파와 손잡고 장기집권의 무기로 써먹을 생각을 한 이승만은 특위에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강요하였고 일제 경찰 출신과 친일파들은 물리력을 동원, 6월 6일 새벽 국가기관인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특위요원 35명을 납치, 중부서에 감금하고 심한 가혹행위와 고문을 가하였다. 이후 6월 26일에 백범 김구 선생이 안두희에게 살해당하면서 반민특위는 극도로 위축되었고 어수선한 틈을 타 국회는 반민법을 무력화시키는 개정안을 발의하였다. 반민법은 공포 후 채 1년도 안 돼 종말을 맞았고 검찰 송치한 559건 중 38건만이 재판종결을 하는 등 대부분의 친일파들은 무죄나 가벼운 자격정지 처벌을 받아 결과적으로 친일파 척결은 무산되었다. 출처 : 오마이뉴스 블로그(http://blog.ohmynews.com/jeongwh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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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그리피스(Michael Griffiths)는 평화봉사단으로 남미 아마존에 갔다.

그는 어느 날 숲 속을 거닐다가 이상한 나무 그릇 하나를 주웠다.

나무로 깎아 만든 것인데 배 모양을 하고 있었다.

원주민의 부엌도구 같기도 해서 숙소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며칠을 두고 보아도 아무 쓸모없어 보였다.

그릇으로 쓰기엔 너무 길쭉하고 이미 썩어 색깔도 나빴다.

더럽게 보여 식기로 쓸 마음도 안 생겼다.

그래서 문 밖에 버려두었더니 누가 가져갔는지 없어졌다.

그 후 그 물건에 관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1개월 뒤 계곡 마을에서 음악연주가 있었다.

원주민의 악기를 연주하는 민속음악제 같은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마이클 그리피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을의 소녀가 악기를 가지고 나와 연주하는데 

원주민들이 사용하던 옛 하프였다.

그런데 놀란 이유는 그 아름다운 음악보다 하프 통이

바로 자기가 버린 나무 그릇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무가치한 밥통같아 보이는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훌륭한 악기로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볼 줄 아는 눈이 없는 사람에게는 쓰레기여도 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는 보물입니다. 인간은 육체 만으로 본다면 가치가 볼품없는 질그릇입니다. 수명의 한계도 분명하고 병들고 죽을 몸입니다. 그러나 그 질그릇이 그 속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질그릇이 어떻게 쓰임을 받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다릅니다. 가치를 아는 눈이 지혜의 눈입니다.

오늘 지혜의 눈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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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성령Ⅰ (5)

 

2.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2)

     우리는...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성령을 믿습니다.

 

웨슬리는 칭의와 신생의 관계는 개념상 논리적으로 칭의가 앞서고 신생이 뒤에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동시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칭의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신생이 이루어진다. 인간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죄를 회개하고 용서함을 받으면 칭의가 이루어지면서 동시에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난다. 이것이 신생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칭의는 내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신생은 내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다. 우리의 죄를 용서받는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고 십자가 사건은 이천 년 전에 이스라엘의 골고다 언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내 밖에서 일어나는 사건이지만, 신생(거듭남)은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내 안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결국 칭의는 성자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면, 신생은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순간(in the moment), 역시 우리는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거듭남(신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웨슬리의 말을 직접 인용하여 정리해 본다면, “한마디로 말해서 거듭남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악마적인 마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마음’으로 바뀌는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의 본질이며,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은’ 것입니다.” 거듭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교만이 겸비로, 거친 마음이 온유한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거듭남은 성령의 역사로 우리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이다. 예수님도 진리의 영인 성령은 “그가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복음 14:17)고 말씀하셨다.

감리회 신앙고백 3조는 성령 하나님에 대하여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라고 고백하면서 신생(중생)의 역사에 있어서 성령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역사하심으로 고백하고 있다. 삼위의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도록 역사하시는 성령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심으로 거듭남(신생)으로 인도하신다.

 

제7장 

성령Ⅱ (1)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감리교의 구원관은 칭의(稱義, justification)와 신생(新生, new birth)을 넘어서 성화(聖化, sactification)를 강조한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은 “거듭나게 하시며”를 넘어서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라고 고백한다. 여기에서 ‘거룩하게 하시며’는 성화를 가리키고, ‘완전하게 하시며’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가리킨다. 성화와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신생과 같이 성령 하나님의 주도적인 역사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1.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1)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며... 성령을 믿습니다.

 

칭의가 성자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는 것이라면, 성화는 성령 하나님을 통하여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과정이다. 모든 종교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추구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도 죄로부터 자유와 해방을 구원의 핵심적인 문제로 간주하였다. 자신의 죄로부터 자유롭게 해방되기 위해 심각하게 씨름하였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로마서를 통하여 인간의 죄는 ‘오직 믿음으로만’ 해결될 수 있음을 깨달았고, 이것은 프로테스탄트 신앙의 기본적인 원리가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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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다. ‘다큐작업’이라 하니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사실 아무 대책 없이 카메라

를 들고 무작정 찾아가고, 기다리고, 허리가 휘어지도록 인사하고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어떻게든 주인공과 말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시간을 달래는 일이 주요업무라 하겠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일 텐데 다큐멘터리 작업은 그 시작부터 끝까지 전 과정이 사람의 마음 문을 열고, 열고, 또 여는 작업이 아닌가. 상처투성이로 떠밀려 거리노숙을 하는 홈리스에게 "당신의 삶을 보여주세요"라며 무리한 요구를 일삼는 ‘무지막지함’. 그리고 그 요구에 대해 응답하길 기다리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느끼는 ‘막막함’이 바로 다큐 작업을 하면서 수시로 경험하는 일상적 감정이다. '무지막지함'이야 송구한 마음으로 성찰하고 방향을 다듬어 좀 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나의 태도를 수정하면 된다지만 '막막함'이란 감정을 이겨내긴 좀처럼 쉽지 않다.  

막막한 심상에다가 뭔가라도 그려줘야 했기에 찾은 영화가 이창준 감독의 <왕초와 용가리>였다. 일단 내가 하고 있는 작업과 소재가 비슷하다는 점. 그리고 독립다큐멘터리 영화로써 극장개봉까지 하면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 이 영화를 선택하게 된 이유라 할 수 있다. 영화를 본 지금 그 막막함이 해소되었냐고? 글쎄. 또 다른 종류의 막막함과 답답함을 느꼈다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다큐멘터리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일명 '안동네'라고 불리는 영등포 쪽방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감독은 주인공 '왕초' 상현과 '용가리' 정선을 통하여 가난한 홈리스(주거가 부재하거나 불안정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풍경을 잔잔하면서도 재미있게 풀어내려고 노력한 듯 보인다. 하지만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삐딱한 궁금증들이 계속 생겨나는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고, 나아가 빈곤의 실제와 환상 사이를 제 멋대로 오가는 우리 사회 전체의 편향된 시선과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20180603_003.jpg

 

영화는 제목 그대로 '왕초' 상현과 '용가리' 정선 두 주인공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영화 속에서 ‘왕초’ 상현은 쪽방촌 '안동네'의 대장 같은 이미지로 등장한다. 비록 가난한 쪽방살이 신세지만 동네 주민과 이웃들을 챙기며 굽힘없이 살아가는 모습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영화에는 상현이 부산에 살고 있는 부모님과 아들을 만나러 가는 장면, 바닷가에서 구슬땀을 흘려가며 미역잡이 일에 열중하는 모습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상현은 안동네에선 든든한 이웃, 고향 집에선 좋은 아들이자 아버지이며, 가난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부지런히 노동하는 믿음직스럽고 성실한 사람이다. 

반면에 ‘용가리’ 정선은 영화 내내 시종일관 땅바닥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누워있다는 건 만취상태라는 이야기이다. 4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큰 덩치와 울그락 불그락한 얼굴을 지니고 있지만, 항상 술에 절어있는 정선은 매우 나약해 보인다. 이 사람 저 사람이 툭툭 치고, 놀리기 일쑤인데도 정선은 그저 술에 취해 희미한 눈동자로 응대할 뿐이다. 그가 ‘용가리’라는 별명을 갖게 된 것은 자신의 등을 한가득 메우고 있는 용 문신 때문이겠지만, 용가리의 용맹함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정선은 시종일관 의지박약하고 병약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고향에 계신 늙은 어머니에게도 근심거리인 정선. 결국 지병으로 죽음을 맞이할 때, 그의 곁을 마지막까지 지키는 건 등 뒤에 새겨진 용가리 뿐이었다.

나는 앞서 이 영화의 시선이 불편하다고 언급했다. 그것은 빈곤의 실상을 보여준다고 하면서 유독 ‘왕초’와 ‘용가리’로 상징되는 극단적인 두 인물의 삶을 선택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에 대한 위험성 때문이다. 여기서 

‘왕초’ 상현의 삶은 옹호 받고, 동정 받아야 할 가난, 사회의 주류가 이해하고 응원할만한 가난으로 이해될 공산이 크다. 반대로 ‘용가리’ 정선의 삶은 부정적 이미지로 점철된 소위 전형적인 홈리스의 모습이며 가차 없이 비난받아 마땅한 가난으로 평가될 여지가 다분하다. 문제는 이러한 극단적 이분법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이분법의 사고가 진행되면서 안동네를 살아가는 여타 수많은 주민들의 다양한 삶(가난)은 생략되며 더 나아가 왜곡된다. 현실에서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왕초’ 캐릭터를 발견한 것은 이 다큐멘터리의 쾌거일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왕초’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대다수의 쪽방주민들은 ‘용가리’와 같은 전형적인 홈리스로 인식되고 매도된다. 이것은 우리 사회에서 빈곤에 대한 편견이 발생하고 강화되는 과정이며, 이 영화가 불편한 진짜 이유이다. ‘왕초’와 같은 사람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모든 홈리스가 ‘용가리’와 같지 않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은가. 편견의 시선은 이 같이 자명한 진실을 가린다는 점에서 매우 허구적이다.    

 

편견의 시선이 가리는 진실은 이것만이 아니다. 영화를 보면 이상하리만치 ‘왜’라는 질문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현과 정선이 무엇 때문에 가난해졌는지, 상현이 그렇게 성실하게 일하는데도 왜 여전히 빈곤의 수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지, 정선은 왜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사회구조적 원인과 제도적 한계들을 짚어 보지 않고 영화는 각 자의 개인사를 조명하는 것에 그친다. 이는 도심을 걷다가 마주치게 되는 거리 홈리스를 보면서 ‘왜’라는 질문을 발동시키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과 오버랩 되며 섬뜩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빈곤은 철저하게 사회경제적인 구조의 문제이고, 모든 사회구성원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공동의 책임이지만 우리 안에 내재한 편견의 시선은 가난을 철저하게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키고, 빈곤의 진정한 원인에 대해 함구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세상은 자신들의 편견과 멸시의 시선을 수정하지 않기 위해서 빈곤에 대해 있지도 않은 이분법의 논리를 만들어내고, 빈곤의 진실을 외면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 <왕초와 용가리>는 그 익숙한 시선을 그대로 쫓아가면서 대다수 사람들에게 면죄부를 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다큐 작업을 하면서 거리 노숙을 하는 분에게 직접 듣게 된 이야기를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내가 가장 힘든 것이 과연 배고픔 때문일까? 

아니야. 길거리 지나는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는 거. 

그 멸시 가득한 시선이 가장 견디기 힘들어.”20180603_002.jpg

 

예수 공동체가 바리새파를 위시한 당시의 종교권력과 가장 극명하게 달랐던 점은 무엇일까. 나는 그 답을 ‘예수의 시선’에서 찾았다. 간음죄를 짓고 돌에 맞아 죽을 처지에 있었던 여인, 민족을 배신했다며 왕따를 당하고 있었던 세리, 더러운 병에 걸렸다며 고립된 채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병자를 바라보던 예수의 그 따스한 시선 말이다. 예수의 시선에는 상상력과 인간애가 가득했다. 문제의 원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보는 상상력, 그 사람을 칭칭 감고 있는 편견의 굴레를 풀어보려는 인간애가 그것이다. 오늘 날 빈곤을 향한 총체적인 문제는 결국 상상력과 인간애의 부재가 가져온 것이리라. 

 

서두에 다큐작업을 하면서 내가 느끼는 일상적 감정을 ‘무지막지함’과 ‘답답함’이라고 표현했었다. 빈곤을 바라보는 이 사회의 ‘무지막지함’과 ‘답답함’ 사이에서 우리는 과연 예수의 시선을 얼마만큼 유지할 수 있을까. 시력이 나쁘면 안경을 쓰면 되고, 안경의 도수가 안 맞으면 렌즈를 새로 하면 될 테지만 내면적으로 각인된 시선의 방향과 색깔, 즉 눈빛을 수정하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저 사람은 눈빛이 좀 무서워!" 라고 말하며 경계하는 경우가 있지 않은가. 가난한 사람을 쳐다보는 당신의 눈빛. 일단 그것부터 좀 사근하게 해놓지 않으면 당신의 눈빛 때문에 누군가는 불편하고 속상하고 심지어 공포스러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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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보면 좋을 영화

<아무도 모른다>(Nobody Knows)

고레에다 하로카즈 감독, 140분, 일본, 2004

 

영화 <아무도 모른다>는 아름다우면서도 비극적인 영화이다. 사랑스러운 4남매가 티격태격하며 집나간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주요 내용이기 때문에 보는 내내 아역들의 연기에 흐믓한 미소를 연발하게 되지만 결국 영화가 끝난 후 관객들은 충격을 머금을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실제 일본에서 발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는데, ‘빈곤’이란 문제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위태로울 수 있게 하는 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영화감독 중 한명인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원래 다큐멘터리 작가였기에 그의 극영화 초기작품은 다큐멘터리 형식을 많이 차용하고 있다. 특히 <아무도 모른다>는 그의 두 번째 다큐멘터리 <그러나... 복지를 버리는 시대로>를 극영화화했기 때문에 아름다운 영상의 이면에 빈곤을 향한 감독의 냉철한 시선을 느낄 수 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영화와 상관없이 <아무도 모른다>라는 제목은 ‘빈곤’의 성격을 가장 잘 규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대에 ‘빈곤’은 은폐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단지 물질적 재화의 부재상황을 넘어 총체적 난국으로써 개인의 삶을 파멸에 이르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빈곤’으로 인한 고통은 그 누구도 평가하거나 재단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절대 알 수 없다’라는 마음이 아니면 ‘빈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어느 정도 왜곡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한국GM이 한국에서 철수하지는 않았지만 군산공장을 폐쇄하였습니다. 희망퇴직을 신청하지 않은 직원이 600여명이나 되지만 200명만이 다른 지역의 공장으로 전환배치되고 나머지는 최대 3년간 무급휴직을 하게 된다고 합니다. 당장의 생계를 위해 일용직을 전전하게 될 노동자들이 속히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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