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3일 성령강림절 좋은만남교회 낮예배 설교
하나님의 눈물
이관택 전도사
본문: 호세아 6장 3절
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요즘 나라가 온통 난리입니다. 아니 전 세계가 난리입니다. 각 가지 정치적 사건들과 경제적 이슈들 그리고 환경적 요인들이 전 세계를 휘몰아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얼마나 흉측한지, 그리고 무절제한 개발과 소비와 향락 문화가 반세기 만에 지구를 어떤 꼴로 만들고 있는지를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눈으로 실시간으로 목도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하나님 앞에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최근 만 해도 중앙아시아의 1년이 넘게 이어지는 가뭄, 인도에서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싸이클론, 미국에 떨어진 야구공만한 우박, 전 유럽을 마비시킨 아이슬란드의 화산 폭발 등등으로 요약되는 자연재해가 과연 인간의 탐욕과 무관할까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정도로 지금 전 세계 곳곳에 불어 닥친 이상기후와 그로인한 생명들의 몰살 사건은 바로 우리 인간의 탐욕과 직결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여기저기 생명들의 비명 소리가 들리는 듯 한 요즘! 전국 곳곳에서 삽소리와 포크래인 소리 그리고 생명이 죽어가고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소리들이 요동치고 있는 요즘,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서의 하루 하루는 어떠합니까? 얼마 전 어떤 모임에 갔는데, 모임을 갖기 전 요즘 각 자가 어떻게 지내냐는 질문을 가지고 서로의 삶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가 뭔 줄 아십니까? 바로 바쁘다는 말이었습니다. 바쁘다 바뻐! 바빠 죽겠다. 그 모임은 소위 대안적인 삶을 지향한다고 하는 사람들, 인권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도 그랬습니다. "바쁘다!" 이 말은 현대인들이 가장 많이 쓰는 말이기도 하고 요즘 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현대의 산업화 되고 개인화된 삶의 양태에서 바쁘지 않으면 왠지 상품가치가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보여지는 경향이 있지요 그래서 바쁜 것이 뭔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프랭클린 다이어리 같은 것에다가 빼곡하게 스케줄을 적어놓고 그 다이어리가 시키는 대로 순간 순간을 복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또 뭔 연예인도 아닌데 그 꽉찬 스케줄을 으스대는 것이 요즘시대 우리 모습 아닌가 성찰해 봅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끼리 하는 인사중에 그 친구를 은근히 치켜 세워주는 인사가 "요즘 많이 바쁘지?"로 시작합니다. 솔직히 무한 경쟁 사회인 현대의 한국사회에서 바쁘지 않은 사람은 단순히 경쟁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경쟁력 자체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기 일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백수라서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마저도 마음만은 죽어라 바쁘게 움직입니다. 그래야 이 바쁜 세상에 적응이 좀 될 테니까 말이죠. 아이들은 각종학원 때문에 바쁘고, 심지어 노인들마저 노인들도 자기 용돈 벌이는 본인이 하는 그런 바쁘게 사는 노인이 쓸모 있는 사람으로 칭송받는 상황이지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모두가 바쁜 거죠 일이 바쁘고, 마음이 바쁘고, 결국 삶이 바쁩니다.
모두가 쉴 줄 모르고 100m 질주를 하는 듯 바쁘게 살아가는 시대. 그러다 보니 옆에 있는 친구 얼굴 볼 여유가 없지요. 달리기 하는 내내 시선은 보이지도 않는 목표점을 응시하고 뛰고 있는데 어떻게 내 맘 한 구석 어딘가에 자리한 또 다른 열정과 꿈을 들여다 볼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을 내 삶에서 구체적으로 살아 낼 수 있을까를 고민하며 기도할 수 있겠습니까? 함께 뛰는 모두가 경쟁자 일 뿐인데요, 어떻게 잠시 여유를 부릴 수 있겠습니까? 잠깐 쉬는 것도 더욱 높이 날기 위해서 움츠리는 메뚜기 같이, 다리 접고 최대로 멀리 뛰려고 하는 개구리 같이 '전략적 휴식'일 뿐이겠지요. 진정한 쉼과 안식이 아니라 휴식만이 난무하는 것이죠. 언제 날아 오를까 타이밍만 끊임없이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가 잠시 쉬고 있는 그 자리를 세세히 둘러 볼 수 있는 여유가 있겠습니까? 지금 내게 주어진 환경과 사람들에 대해 충분히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지금 여기는 안중에 없지요 저기 보이지 않는 어딘가만을 계속 갈망할 뿐입니다. 이런 삶이 하나님께서 과연 우리에게 주신 삶의 원래 모습일까요? 우린 다시금 내가 딛고 있는 이 곳이 어딘가? 또 나와 함께 서있는 옆 사람은 누군가? 그럼 나는 또 누군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내가 왜 여기에 존재하지? 라는 근원적 질문이 없는 삶. 질문이 없으니 답이 없죠. 뛰긴 뛰는데 왜 뛰어? 살긴 사는데 왜 살아야 하지?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고민해 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늘 저희는 야외예배로 진행합니다. 물론 예배는 교회에서 드리고 있지만 실상 지금부터 야외예배는 시작된 것이지요. 우리가 보통 5월에 야외예배를 가는데 가는 목적이 뭘까요? 그냥 날씨도 좋은데 한 번 놀아보자! 예 그것도 아주 중요한 목적일 것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날씨가 좋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우리가 결국 하나님의 얼굴을 보기 위함이 아닙니까? 저 푸른 신록의 자연 속에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의 놀라움을 경험하기 위해 우리는 야외로 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좀 더 가까이 경험하고 새소리와 시냇물과 웅장한 아지랑이를 우리 온 감각으로 만나는 사건이 바로 야외예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기 위함이고요 하나님의 뜻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번 야외예배에는 평범하지만 아주 중요한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너를 알고 나를 알고 님을 알고]입니다. 바쁘게 살기 때문에 놓쳐 버린 3가지를 찾는 것이 바로 오늘 야외예배를 진행하면서 우리가 염두해 두어야 할 것입니다. 흔히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지요. 그 아는 것이라는 말 안에는 ‘지식’, ‘믿음’, ‘경험’ '전통‘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이성과 감성과 촉감, 상상력 등이 모두 동원되는 행위가 바로 아는 것이지요 그런 면에서 야외예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너, 그리고 나, 그리고 하나님은 평상시 교회에서, 우리의 삶 속에서 접하는 하나님과는 조금 색다른 부분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기대됩니다. 바닷가에 서서 수평선을 바라다보면 참 우리네 인생이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구나 라는 생각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수평선 너무에 진짜 바다가 있기 때문이죠. 그 수평선 너머에 진짜 섬! 진짜 다른 나라의 육지가 있습니다. 그 기대와 상상력은 우리의 지식적인 측면과 영적인 측면, 감성적인 측면을 모두 동원해야 진짜 바닷가의 묘미를 알에 되죠 야외예배에서 만나게 될 우리의 모습이 수평선을 바라보는 마음이면 좋겠습니다.
오늘 성서 본문은 제1성서라고도 불리는 구약성서 호세아서의 한 구절입니다. "3 우리가 주님을 알자 애써 주님을 알자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호세아서는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자녀삼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배신하고 기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의에 대해 가슴아파하시고 좌절하시며 눈물 흘리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저 녀석들 저렇게 살면 안 되는데, 탄식하면서 오죽하면 선지자 호세아로 하여금 음란한 여인인 고멜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하나님이 느낀 아픔을 느끼게 했을까. 언뜻 말도 안되는 이야기 인 것 같지만 그만큼 하나님께서 세상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 마음을 헤아려 보면 왠지 코끗이 찡해집니다. 앞에서도 이야기 하였지만 끝없는 인간의 탐욕은 계속해서 새로운 바벨탑을 쌓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지금은 과거 그 어느 시대보다도 폭력이 교묘하게 우리의 생활전반을 통제하고 있지요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얼마나 당황해 하시고 가슴아파하시겠습니까?
지난 주간에 방 목사님께서 안동에 있는 권정생 선생님의 생가에 방문하셨다고 합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몽실언니, 강아지 똥등 유명한 동화들을 쓰신 이동문학가인데 평생을 가난한 삶을 지향하며 조그만 교회 종지기를 하시면서 홀로 사셨다고 합니다.
나는 여기서 권정선 선생님의 짧은 동화 '하느님의 눈물'을 소개하려 합니다.
한 산토끼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돌이라고 합니다. 토끼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칡넝쿨이랑 과남풀이랑 뜯어 먹으면 맛있지만 참말 마음이 아프구나. 뜯어 먹히는 건 모두 없어지고 마니까" 토끼는 이렇게 생각하다가 풀무꽃풀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풀에게 다가가 말합니다. "풀무꽃풀아, 널 먹어도 되니?" 풀무꽃풀이 깜짝 놀라 쳐다보고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토끼가 다시 물어봤습니다. 널 먹어되냐니까? 풀무꽃풀은 울먹이며 "죽느냐 사느냐하는 대답을 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니?" 라고 대답했습니다. 토끼는 그 말해 얼른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풀무꽃풀은 꼿꼿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먹힌다는 것 그리고 죽는 다는 것 모두가 운명이고 마땅한 일인 것이야. 토끼는 그 말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 날 토끼는 댕댕이 넝쿨도, 고수대 나물도 바디취 나물도 먹지 못했습니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었고 토끼는 해를 향해 자신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고 하소연을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해님은 "넌 정말 착한 아이구나 그런데 먹지 않으면 죽을 텐데 어쩌지"라고 걱정하였다. 토끼는 차라리 자신이 죽는게 낫겠다고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고 말았다. 어느새 밤이 되었습니다. 별빛이 반짝일 때 토끼는 하늘을 향해 외쳤다 "하느님, 하느님은 무얼 먹고 사셔요?""보리수 나무 이슬하고 바람 한 줌 그리고 아침 햇빛 조금 마시고 살지" 그러자 토끼는 너무나 방가워 하며 자신도 하느님처럼 바람 한 중과 햇빛을 먹고 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래 그렇게 해줄게. 하지만 아직은 안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처럼 남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세상이 오면 금방 그렇게 될 수 있단다. 토끼는 물었다 "이 세상 모두가요?" "그래 이 세상 사람 모두가" 하나님이 힘주어 말하고선 그리고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했습니다. "하지만 내가 이렇게 애타게 기다리는데도 사람들은 기를 써 가면서도 남을 헤치고 있구나" 그 때 토끼 얼굴에 물 한방울이 떨어졌습니다. 하느님이 흘린 눈물이었습니다.
이 동화에서 하나님이 흘린 눈물은 호세아 시대의 하나님과 지금 우리 시대의 하나님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다림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애써서 알 필요가 있습니다.
새벽마다 여명이 오듯이 주님께서도 그처럼 어김없이 오시고
그 하나님은 창세기 1장 5절에서와 같이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지나게 되는 하루를 창조하신 하나님입니다. 밤을 지나 새벽 미명 속에 새로운 희망을 주고 새날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계식니까? 그것도 매일 같이 말입니다. 아침이 되고 저녁이 될 때 하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될 때 하루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구절입니다.
해마다 쏟아지는 가을비처럼 오시고, 땅을 적시는 봄비처럼 오신다.
비는 사실 축복 강하게 오거나 스미게 오거나. 오늘 비가 오는 것 - 하나님의 눈물을 맞는 것 함께 울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나요?
창세기에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상 깊은 구정이 있습니다 -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는 시선에 대한 이야기이죠. 내가 어떤 시선으로 존재를 바라보는가 생명을 바라보는가. 어떤 사람은 자연을 돈벌이로만 치부하지요 어떻게 하면 골프장을 만들 수 있을까? 등 오늘 우리가 자연을 우리의 눈요기 거리로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연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동행자이지요 오늘 우리가 만나는 모든 호흡하는 생명을 향해 함께 살아가자는 마음을 표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너를 알기 - 이웃과 자연을 포함한 모든 생명
나를 알기 - 나의 범위가 어디까지
'님' -의미 부여된 특별한 존재 바로 하나님
‘조율’을 노래하며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