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월 13일 주현절후 제1주 및 신학대학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마지막이라 생각했다
이관택
본문: 열왕기상 17:8-14
8 주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다. 9 "이제 너는, 시돈에 있는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에서 지내도록 하여라. 내가 그 곳에 있는 한 과부에게 명하여서, 네게 먹을 것을 주도록 일러두었다." 10 엘리야는 곧 일어나서, 사르밧으로 갔다. 그가 성문 안으로 들어설 때에, 마침 한 과부가 땔감을 줍고 있었다. 엘리야가 그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마실 물을 한 그릇만 좀 떠다 주십시오." 11 그 여인이 물을 가지러 가려고 하니, 엘리야가 다시 여인을 불러서 말하였다. "먹을 것도 조금 가져다 주시면 좋겠습니다." 12 그 여인이 말하였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13 엘리야가 그 여인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방금 말한 대로 하십시오. 그러나 음식을 만들어서, 우선 나에게 먼저 가지고 오십시오. 그 뒤에 그대와, 아들이 먹을 음식을 만들도록 하십시오. 14 주님께서 이 땅에 다시 비를 내려 주실 때까지, 그 뒤주의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며, 병의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나라든, 어느 시기이든 시절이 악할 때가 있습니다. 요즘 “레미제라블”이라는 영화가 엄청난 흥행을 하고 있습니다. 언뜻 들으면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어감으로 들리는 “레미제라블”이라는 단어는 우리말로 해석하면 “비천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하지만 레미제라블은 특정한 한두 명의 가난한 사람들 이야기가 아닙니다. 시대가 만들어낸 너무나 비참하고, 억울하고, 서러운 사람들이 바로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이 영화는 프랑스혁명 이후, 자본주의 초기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당시는 노동자를 보호하는 근로기준법이나, 그나마 가난한 사회적 약자들을 돌보는 사회적 안전망이 전무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양극화가 극대화되어 돈이 있는 사람은 마치 왕족이나 귀족처럼 살았고, 그 외의 돈이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노예나 다름없이 살아가던 시절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하루 20시간씩 노동을 하는데, 노동 강도가 너무 심하여 대다수의 아이들이 눈이 멀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에 버려졌지요. 먹을 것이 없으니까 사람들이 자기 이빨을 뽑아서 팔고, 머리카락을 자르고, 심지어 여자들은 몸까지 파는 일이 일상적이었던 시절입니다. 사람들은 그 시대를 거지와 부랑아와 창녀의 시대였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시절이 악했다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을 살펴보면 앞에서 언급한 레미제라블 영화보다도 더욱 혹독한 시절이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이 사르밧 지역에 당도했을 때, 한 과부를 만납니다. 지금 이스라엘 땅은 오랜 가뭄으로 시냇물마저 몽땅 말라버린 시기였습니다. 사르밧에 오기 전에 엘리야는 그릿시냇가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까마귀를 통하여 엘리야에게 양식을 공급해 주셨고, 엘리야는 그나마 그릿시냇물을 마시면서 하루하루를 지냈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릿 시냇물조차 결국 싹 다 말라버릴 정도로 비가 오지 않았습니다. 정말 엄청난 가뭄이었습니다. 가물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농사가 제대로 되었을 리가 만무하지요. 먹을 것이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3년 동안 가뭄이었다니까 지금의 우리로서는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조차 상상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더군다나 이스라엘에서 과부라고 하면 가장 가난한 사람 아닙니까? 우리가 알 수 없는 기구한 운명 때문에 과부가 되어 시골 한쪽 구석에서 살던 이 어머니와 아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혹독한 가뭄까지 겹쳐서 이제 먹을 양식이, 또 먹을 물이 하나도 없는 그 사르밧 과부와 그의 아들은 말 그대로 비참하고 절망에 가득 찬 사람, 즉 레미제라블이었습니다.
그런데 논바닥이 쫙쫙 갈라지고, 우리의 가슴까지 메마르게 하는 그 가뭄보다도 더욱 절망적인 상황이 무엇이었느냐! 바로 당시 이스라엘의 왕이 아합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합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독한 왕입니다. 아합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악하고, 형편없었는지는 성서에도 잘 나와 있습니다. 열왕기상 16장 25절에는 아합왕의 아버지 오므리 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오므리가 주님께서 보시기에 악한 일을 하였는데, 그 일의 악한 정도는 그의 이전에 있던 왕들보다 더 심하였다.” 그런데 16장 33절에 아합에 대해서도 이렇게 나옵니다.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 왕들보다 더 심하게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하였다.” 오므리 왕이 최악인 줄 알았는데, 그의 아들 아합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최악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영적으로도 당시는 완전한 암흑시기요. 완전히 메말라 버린 시대였다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아합의 악행을 벌하기 위해 비를 멈추셨습니다. 가뭄은 결국 아합의영적 타락 때문에 시작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혹독한 가뭄이 있기 이전에 이미 이스라엘은 영적인 가뭄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 앞에 온전히 서고자 불철주야 예배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나라입니다.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소통이 이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끈입니다.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시대를 사니까 돈이 중요할지 몰라도 당시의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었습니다. 힘들고,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들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누가 아프면,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우면 하나님께 무릎 꿇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기쁨이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들이 조상 때부터 수백 년을 살아온 방식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붙잡고 살아온 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의 방식이었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가뭄이 무엇을 뜻합니까? 아합왕과 그의 아내 이세벨은 이스라엘에 바알과 아세라 신상을 세우고 우상천지를 만듭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를 죽여 없애고, 쫒아냅니다. 아까 엘리야가 그릿시냇가에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했는데, 엘리야도 하나님의 선지자로써 쫒기는 도망자 신세였습니다. 선지자들도 없고, 전국 각지는 우상천지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날 수 있는 통로가 점점 사라졌습니다. 백성들의 신앙의 열정도 점점 꺼져갑니다. 이 영적인 가뭄은 결국 백성들의 삶 자체를 와르르 무너뜨리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이제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삶의 기쁨을 어디서 찾습니까? 삶의 지향점을 어디에 둡니까? 이전엔 하나님이 전부였는데, 하나님이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삶이 어떠했을까요? 아마도 처음엔 잘 몰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점점 영적으로 메말라가고, 갈급해지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렇게 영적인 가뭄이 오고 그 뒤에 실제로 비가 오지 않기 시작합니다. 진짜 혹독한 가뭄이 찾아 온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이미 끊어진 상황에서, 견딜 수 없을 만큼 혹독하고 지독한 가뭄이 찾아 온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전 같았으며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구할텐데, 이제 대놓고 하나님께 기도도 못하게 하는 그런 영적인 가뭄의 시절 아닙니까?
그러한 시절~ 희망도 없고, 비전도 없고, 실제로, 먹을 것도 없어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삶이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나이든 양반이(엘리야죠?) 과부와 아들 둘이 사는 집에 와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아니 가뭄에 물을 달라는 사람도 참 이상하지요? 과연 그 집에 아무에게나 줄 물이 넉넉하게 있었겠습니까? 지금 뭔가 분주하게 땔감을 주워 모으고 있던 과부는 그럼에도 그 일을 멈추고 물을 가져다주려 합니다. 저는 이 장면에서 물을 주는 과부의 마음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가뭄의 시기에 물을 나눠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영혼의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분주하게 무언가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돕기 위해 그 일을 멈추고 부엌으로 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 과부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이것만 봐서도 보통 사람은 아닌듯합니다. 우리 삶을 생각해보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쉽지 않은 일 아닙니까? 제가 얼마 전 분당에서 진짜 큰 교회 몇천명이 모이는 교회에서 부목사로 일하는 동기를 만났습니다.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성역비를 얼마 받는지에 대해 이야기 하였습니다. 제 3배를 넘게 받더라구요. 그렇다고 넉넉하냐? 그런데도 항상 쪼들린답니다. 뭐 얘들 키우고 그러려면 쪼들리겠지요. 하지만 지금 쪼들리는 사람이 지금보다 2배를 더 번다고 여유로워 질 수 있을까요? 아마도 아닐 것입니다. 물이 많다고 목마른 사람에게 물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갈수록 태산이라고 엘리야가 이번엔 먹을 것을 달라는게 아닙니까? 이 가뭄에 과부가 사는 집에서 먹을 것을 달라는 것은 얼마나 뻔뻔한 행동입니까? 이건 뻔뻔함을 넘어 무례한 것이지요. 아마 마음씨 착한 과부도 기가 막혔을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어른께서 섬기시는 주 하나님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합니다. 저에게는 빵 한 조각도 없습니다. 다만, 뒤주에 밀가루가 한 줌 정도, 그리고 병에 기름이 몇 방울 남아 있을 뿐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지금 땔감을 줍고 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가서, 저와 제 아들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것을 모두 먹으려고 합니다.“
과부는 지금 기가 막힙니다. 그래서 엘리야에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 합니다. 지금 밀가루가 한줌이고, 기름 몇방울 남았는데, 아들이랑 그거 먹고 죽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장한 말입니까? 이미 이 과부의 얼굴에서 희망의 빛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과부는 엘리야가 하나님을 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기도를 구하지도 않거든요. 다만 두려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이거 먹고 죽으려고 한다는 겁니다. 과부는 그것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양식이 마지막 양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더욱 뻔뻔하게 이야기 합니다. 아주머니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 가득한 그녀에게 먼저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냥 평상시처럼 음식하세요. 마지막처럼이 아니라, 평상시처럼 음식 하세요. 비장하게 두려운 마음으로 음식하지 마시고, 편안하게 하세요. 그리고 그 음식은 제가 먹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사르밧 과부는 그 이야기에 순종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지금 내가 만드는 이 음식이 마지막 음식이 아니다. 지금이 마지막이 아니다. 더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절망의 순간이지만 마지막인 것처럼 호들갑 떠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평상시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엘리야는 순종한 과부를 보면서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비가 올 때까지 밀가루가 떨어지지 않을 것이고,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던 과부와 아들에게도 새로운 삶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마지막”이라는 단어의 순 우리말이 “맞이막”입니다. 맞이하는 막입니다. 마지막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는 순간이라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니 끝나는 지점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랑 겹쳐집니다. 초등학교가 끝나는 동시에 중학교가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총각이 끝나는 지점에 유부남이 시작되는 것 아닙니까? 이 땅의 마지막이 저 세상의 시작 아닙니까? 지금이 마지막이라고, 지금이 끝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 지금이 절망이라고, 아픔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야기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히 상상도 못할 새로운 계획이 있으십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만남은 이 후에 더욱 놀라운 기적 사건으로 발전합니다. 이 아들이 죽게 되요. 그런데 그 때 엘리야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은 아들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리고 엘리야가 3년만에 아합왕을 찾아갑니다. 그 동안 도망다녔었지만 말입니다. 또 바알선지자들과 대결을 하여 승리합니다. 지긋지긋한 가뭄도 끝이 나고 하늘에서는 폭포수 같은 단비가 내립니다.
엘리야와 사르밧 과부의 만남은 그 동안 영적인 가뭄상태에 있었던 이스라엘의 새로운 시작점을 알리는 만남이었습니다. 이 후에 벌어질 모든 기적들이 이 둘의 만남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사르밧 과부는 그 날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하나님은 그 날을 시작으로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셨던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엊그제 또 한명의 쌍용자동차 노동자가 자살 시도를 하였습니다. 이미 23명의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이번에 일어난 자살시도는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철렁이게 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절도 영화 레미제라블의 배경이 되는 세상만큼이나, 사르밧 고부가 살았던 시절만큼이나 참 악합니다. 영적으로 가뭄이고, 실제로도 가뭄같이 느껴집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절망해야 되겠습니까? 각 가정도 힘이 들지요. 그렇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건 우리 생각이구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저 평상시처럼, 일용한 양식에 감사하고, 오늘 하루도 기쁨으로 이끌어주실 하나님의 계획을 의지하며, 언제 가뭄이 있었냐는 듯이 쏟아지는 폭포수 같은 단비를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 충만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