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 3일 주현절후 제4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하늘의 시간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13:44-50
44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발견하면, 제자리에 숨겨 두고, 기뻐하며 집에 돌아가서는,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 밭을 산다." 45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46 그가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면,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그것을 산다." 47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48 그물이 가득 차면, 해변에 끌어올려 놓고 앉아서, 좋은 것들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들은 내버린다. 49 세상 끝 날에도 이렇게 할 것이다. 천사들이 와서, 의인들 사이에서 악한 자들을 가려내서, 50 그들을 불 아궁이에 쳐 넣을 것이니, 그들은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지난 월요일 화요일 이틀간 지리산 둘레길을 다녀왔습니다. 보통 지리산 둘레길을 걷다보면 인심이 좋은 주막도 많고, 정감어린 마을들도 많이 만난다고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 걸었던 코스가 새로 만들어진 코스인지라, 마을은커녕 조그마한 구멍가게 하나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덕분에 이틀 모두 점심도 3~4시가 되어서야 먹을 수 있었지요. 마을 만나기가 그렇게나 어려웠는데, 사람만나기는 쉬웠겠습니까? 여행이 사람 만나는 맛인데, 강아지 한 마리 만나기가 어려웠습니다. 덕분에 걸으면서 기도도 많이 하고, 참 고즈넉하고, 소박한 여행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 쉼터에서 만난 여성분이 인상에 남습니다. 함께 동행했던 목사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제가 신앙서적을 읽고 있는 것을 보시고는 말을 걸어오시더군요. 자기도 교회 다니는 신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서 일장 설교를 하는 겁니다. 자신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저에게도 믿으라고 합니다. 이미 저는 믿고 있다고 했는데도요. 그런데 듣다보니 뭔가 조금 이상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데도, 자신이 천국을 갈까, 못갈까 의심을 한다는 거예요. ‘그렇죠. 믿음을 확신하기가 어렵잖아요.’ 그러면 그건 진정한 믿음이 아니랍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의심하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자신은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천국 갈 확신이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나님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피로 우리 모든 죄를 씻어주셨기 때문에 그것을 진심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에 내가 어떻게 말씀대로 사는가의 문제는 ‘율법적’이기 때문에 별로 중요치 않다는 겁니다.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고 생각할 때, 그 분이 한 사람의 이름을 제게 소개해 주더라구요. “형제님께 소개해 드릴 분이 있습니다. 혹시 박. 옥. 수 목사님에 대해 들어보신 적 있으세요?”
그 분은 이단으로 분류되고 있는 ‘구원파’를 믿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 구원파시네요?”라고 물었더니 “구원파라뇨. 우린 구원파가 아니라 구원입니다”라고 아주 당당하게 이야기 하셨습니다. ‘구원파가 아니라 구원이다! 참 당당하시네’라고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분의 이야기는 계속 되었습니다. 짧은 시간에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천국과 지옥,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이야기 되었다가 ‘7년 대환란’과 ‘666 짐승의 표’까지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이야기가 거기까지 이어지자 저는 더 이상 들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겐 ‘휴거 트라우마’가 강하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제가 금촌에서 장로교회를 다녔는데, 그 때 “7년 대환란”이라는 외국영화 상영회를 했습니다. 그 시골에서 영화를 보여준다니까 어른들은 물론이고 동네 아이들까지고 모두 모여서 옹기종기 영화를 보았습니다. 내용은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 믿음이 없어서 휴거되지 않은 사람들이 군대에 쫒기고, 경찰에 쫒기는 내용이었지요. 결국 잡혀서 단두대에 목이 잘리는 참수형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는 것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짐승의 표, 그러니까 ‘바코드’를 손목과 이마에 받지 않기 위해서 산 속에 들어가서 농사를 지으며 양을 키우기도 했고, 물건을 훔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 교회 목사님과 전도사님에게 화가 납니다. 단두대에서 목이 댕강 댕강 잘리고, 총 맞아 죽고 하는 그런 엄청난 폭력물을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주다니요. 예수 잘 안 믿으면 그렇게 된다는 것 아닙니까? 전 그로부터 10년간 불안과 공포 가운데 살았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잘 믿고 있나? 혹시 예수님이 오셨는데, 내가 휴거가 안 되면 어떻하지? 7년 대환란의 때를 어떻게 견뎌내지? 잠잘 때 종종 악뭉을 꾸기도 했구요.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도, 옷 매무세를 가다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하니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정말 믿음이 좋았던 것 같습니다. “나는 휴거 될 수 있을까?”가 나의 청소년기 대부분을 장악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감신대에 가서 신학을 제대로 배우면서 그 영화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목회자의 길로 들어선 것이 저에겐 진정한 구원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감신에 오지 않았다면 저는 평생 불안과 공포에 떨면서 살아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끔찍하지요. 여기 계시 분들 중에 혹시 저와 비슷하게 본인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을까 못받을까 노심초사하고, 고민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여러분은 신학교에는 안 갔지만 제가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7년 대환란 그 영화는 황당한 삼류 SF영화입니다. 혹시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셨던 분들이 있다고 하면 자유하십시요! 바코드가 짐승의 표라고 이야기하는데, 그것 때문에 저는 그 좋아했던 새우깡을 3년간 먹지 않았던 것을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전화카드만 보면 경기를 하고, 버스카드가 나왔을 때, 밥도 먹지 못했던 일이 생각납니다. 6이라는 숫자만 봐도 눈을 감아버리고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제게 자유함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감옥이었고, 절망이었습니다. 오로지 하나님께만 잘 보여서 선택 받는 것, 다시 말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엊그제 어머니와 논쟁을 했지요. “넌 도대체 천국과 지옥을 믿기는 하는 거니?” 어머니는 그러면서 본인은 천국가기 위해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이 여전히 신앙의 화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휴거가 아직도 유효하구나! 지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은 정도는 다르겠지만 내가 겪은 아픔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완전한 자유함을 누리지 못한 제 안의 모습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궁금한 것은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가고, 예수를 믿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는데, 그 ‘믿음의 기준’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구원파는 그 믿음의 기준이 본인에게 있습니다. 자신만 거리낌이 없다고 한다면, 100% 확신만 있다면 천국에 간다는 것입니다. 그의 삶이 아무리 개판을 치고, 죄로 물들어 있어도 말입니다. ‘100% 믿음’이란 것이 가능하다는 것도 참 놀랍습니다. 100% 무가당 쥬스라는 오렌지 쥬스도 실은 100%가 하나도 없다고 하는데 말입니다. 자신의 마음과 의지가 100% 일 수 있다는 것은 거의 초능력 수준이 아닙니까?
구원파와 다르게 우리 기독교에서는 구원은 하나님의 영역이라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 믿음의 양을 측정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을까요? 어렸을 때 저는 이 부분에 대해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저에겐 죽고 사는 문제였으니까요. 사람의 믿음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는 것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청소년 때에 수련회 다녀오면 성령의 불이 마음 속에서 활활 타오르지 않습니까? 그 때엔 믿음의 전투력이 100%가 넘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어쩔 때는 교회도 나가기 싫고 아무것도 안 믿어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수 좋게 내 믿음 상태가 좋을 때, 오시면 난 천국에 가고, 믿음 상태가 나쁠 때 오면 난 지옥에 가는 걸까? 이게 고민이었습니다. 그래서 내 믿음이 좋을 때 예수님 오시라고 기도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아니면 이 믿음의 양이라는 것이 마일리지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걸까? 믿음이 쌓이고 쌓여서 일정 수준을 넘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일까? 제 궁금증들이 실상 웃기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에서 교회에 다니면서 갖게 되는 고민들 그리고 집중하는 부분들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믿는 데에는 관심을 집중하지만, 예수님의 삶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예수님을 따르는데 까지 나아가질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한번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실상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우리 인식의 한계를 대변하는 것 같습니다. 천국과 지옥은 완전히 서로 다른 두 개의 공간일까요? 어디서부터가 천국이고 어디서부터가 지옥일까요? 사람들은 이분법적으로 사고하기를 즐깁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사람들의 성향이 아니라 사탄의 성향이기도 합니다. 이분법적인 사고는 우리 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듭니다.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어 버리죠. 천국에 가면 영원히 행복하고, 지옥에 가면 영원히 고통에 빠진다. 저는 아직 잘 모르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여러분께 천국이 어떻다. 지옥이 어떻다 이야기 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가 수평선이나 지평선을 보면 어떻습니까? 수평선은 하늘과 바다를 정확하게 나누고 있습니다. 지평선은 하늘과 땅을 정확하게 나누고 있지요. 그렇지만 실제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우리 눈의 한계로 인해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하늘과 바다가 만날 리가 없습니다. 하늘과 땅이 만날 리가 없지요. 하늘과 바다 밖에 없는 것 같지만 실제로 하늘과 바다 사이에 엄청난 공간들이 있습니다. 하늘과 땅밖에 없는 것 같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엄청난 공간이 있습니다. 어디서 부터가 하늘인가? 이거 애매한 문제입니다. 저는 천국과 지옥의 문제는 이러한 이분법을 깨뜨리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천국이 아니면 지옥입니까? 지옥이 아니면 천국입니까? 그러한 이분법적 사고는 우리의 삶에서도, 죽음에서도 깨어져야 합니다.
성서를 이것을 깨뜨리고 있습니다.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차례에 걸쳐 천국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 말하는 방식이 우리가 천국과 지옥을 생각하는 방식과 완전히 다릅니다. 오늘 본문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늘 나라는, 밭에 숨겨 놓은 보물과 같다.” “또 하늘 나라는,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 “또 하늘 나라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서 온갖 고기를 잡아 올리는 것과 같다.” 우리는 천국을 어떤 멈춰있는 공간이나 장소라고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천국을 현재진행형으로 말씀하십니다. 또한 동사형으로 말씀하고 있지요. 이 말씀을 볼 때, 천국은 상당히 구체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머나먼 훗날이 아니라 지금 여기 나의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천국이 밭에 숨겨놓은 보물이라는 것은 천국은 우리의 일상에서 만날 수 있다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밭은 농부에게 있어서 매일 만나는 삶의 터전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천국이 숨겨져 있다라는 것입니다. 이 천국을 발견하면 자신의 전부와 바꿔서라도 지켜야 한다고 하십니다.
또 천국은 좋은 진주를 구하는 상인과 같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그 상인의 마음이 바로 천국입니다. 좋은 진주를 구하려는 마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주의 교회를 위해 좋은 진주를 구하려는 그 상인의 마음 그 자체가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천국은 고기를 잡아 올려 좋은 것과 나쁜 물고기를 구분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삶 가운데, 옳고 그름을 고민하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골똘하고, 기도하는 것 자체가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천국의 가르침을 보면서 모세를 따라 이집트를 벗어나 출애굽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났습니다. 이들은 이집트를 벗어나 하나님께서 마련해 주신 진정한 하나님 나라를 횡단하는 중에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과는 이미지가 약간 달랐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인도해주신 하나님 나라의 여정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이집트의 제국의 논리, 인간의 논리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준비하시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탈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삶의 여건이 더 나아졌다라고 할 수 있습니까? 어찌보면 더욱 불편해 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노예가 아닙니다. 자유인이고,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자신의 모든 것과 바꾼 것입니다. 천국을 발견하면 자신의 모든 것과 바꿔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 완전히 달라진 생활을 합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이 이집트 제국의 시간을 따르는 삶이었다면, 이들은 지금 하나님의 시간 즉 하늘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제국의 시간을 따르는 삶은 노예의 삶이지만 하늘의 시간을 따르는 이들은 하나님께 속한 삶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삶이 하늘의 시간을 사는 것이지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먼저 기도하는 삶이 바로 하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의 삶입니다. 하늘의 시간을 살아가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동체도 하늘의 시간을 살았습니다. 로마제국의 거대한 제도와 체제, 그 숨막히는 지배체제에서도 그들은 로마의 시간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습니다. 카타콤이라 불리는 지하 무덤에서 살면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천국의 기쁨을 만났습니다. 하늘의 시간은 결국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가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삶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시간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천국에 대해서는 성서에서 더욱 더 많고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천국이 어떻다라고 확언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합니다. 천국은 우리를 가둬두는 것이 아니라, 자유하게 한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탈출하게 합니다. 이 땅의 논리, 이 땅의 시간으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어디까지 자유할 수 있느냐하면 죽음까지도 이겨낼 만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로마의 지배체제, 이집트의 지배체제가 그들의 뜻에 따르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 협박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협박 아닙니까? 하늘의 시간을 사는 이들에게는 죽음 까지도 더 이상 협박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우리들, 하늘의 시간을 누리는 자유함은 죽음의 속박도 막지 못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 모두가 하늘의 시간을 살아내길, 그리고 천국의 비밀을 깨닫고 복을 누리시길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