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 정복
아론과 미리암의 죽음에 이은 모세의 죽음으로써 출애굽 세대는 종말을 고한다. 그 후 여호수아를 지도자로 세운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을 밟으니 요단 강물이 끊겨 멀리 사르단 가까운 아담 변방에 쌓이게 되었다.(수 3:16)
요단 강물은 갈릴리 바다와 야르묵 강이 합해지면서 두 배로 유량이 늘어나며 얍복 강이 합류되는 지점을 지나면 사해에 이르기까지 유량에 큰 변화가 없다. 그런데 아담 변방은 바로 얍복 강이 합류되어 거의 최대의 유량을 갖는 좁은 계곡 근처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 지점이 지진 등으로 무너져 내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쉽게 마른 강을 건널 수 있었을 것이다.
가나안 정복은 3단계로 구분되어진다. 첫째가 중앙 산지의 정복, 둘째는 유다 지파의 땅이 된 남부 지역의 정복, 셋째는 북부 지역인 하솔의 정복이다. 그리고 가나안땅을 주겠다는 약속은 다윗시대에 이르러서 완료된다.
점진적인 가나안 정복 사건은 고고학적으로 파괴와 화재의 흔적으로 입증되어진다. 이스라엘의 첫 정복지는 중부 지역에 위치한 여리고이다. 존 갈스탕은 1930년대 여리고를 발굴하여 대재난에 의해 파괴된 성벽과 화재가 극심한 지역을 찾았다. 성벽은 12피트 두께의 내벽과 6피트 두께의 외벽을 가진 이중벽으로 구성되었으며, 불에 탄 벽돌과 재, 숯덩이들이 나타났는데, 주전 1385년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결론 지어졌다.
여호수아는 남부 5개 도시 연합군을 격파했는데, 그 도시 가운데 하나인 라기스를 발굴한 결과 파괴된 흔적을 찾을 수 있으며 이곳은 주전 1220년경으로 추정된다. 고고학자 야딘이 하솔 지역을 발굴한 결과 주전 13세기경에 극심하게 파괴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파괴는 누구에 의한 것인지 알 수 없다.
1887년 중부 이집트의 고대 아케나톤의 수도인 텔 엘 아마르나에서 설형 문자 토판이 발견되었다. 이 토판에는 모두 377개에 달하는 문서를 찾았는데 대부분의 문서는 주전 14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그 가운데 예루살렘 왕 압두 헤바가 아피루의 침략을 물리칠 군대를 보내달라고 바로에게 여러번 편지를 보내어 간청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아피루가 히브리인들이라면 여호수가의 인도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도시들을 침공하고 있었다는 설명이 가능하다.
홍영의 전도사 (중계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