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의 세계-정치적 세계
신구약 중간시기까지
홍영의 전도사(중계교회)
1. 이스라엘의 멸망
팔레스타인의 지형적인 조건은 많은 정복자들의 관심을 끌게 하였다. 사울과 다윗이 왕정제도를 확립한 후에(BC 1000년), 이스라엘은 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주변국과 경쟁과 조화를 이루며 성장할 수 있었으나, 솔로몬이 죽은 후에 북쪽은 여로보암이 이끄는 이스라엘, 남쪽은 다윗의 후손들이 통치하는 유다로 각각 분열되었다(BC 926년). 북 왕국은 왕권을 차지하려는 일곱 번의 쿠데타를 경험하면서 국력이 약해져, 북쪽에 서 생겨난 강대국 앗수르의 희생물이 되었다(BC 721년). 앗수르인들의 이주정책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정착 이후 '분산'되어 진다. 남 왕국은 주변국가와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침으로 침공을 모면한다. 하지만 앗수르를 무너뜨린 바벨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은 정복당하고 파괴된다(BC 571년). 이때 이후로 지성소의 법궤가 사라진다. 예루살렘과 주변 지역의 많은 거주민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 하지만 앗수르와는 달리 바벨론인들은 포로들에게 사유재산을 인정하였으며, 어느 정도의 자유권도 허락한다.
2. 페르시아 정책
이후 바벨론도 페르시아에 의해 약화된다(BC 539년). 고레스는 잡혀온 유대의 이전 거주민들을 포함하여, 모든 타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들의 고국으로 돌아갈 것을 허용하는 포고령을 발표하였다. 바벨론에 거주한지 두세대가 지나서야 잡혀온 이스라엘 백성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돌아온 유대인들은 많지가 않았다. 바벨로니아는 4대 문명 발생지 가운데 하나였다. 황폐한 땅에서 포로로 잡혀간 이들에게 그곳은 물과 먹을 것이 풍족한 지상낙원이었다. 그들에게 돌아가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야훼 신앙과 고국에 대한 열망 때문이었다.
3. 이스라엘 민족의 복귀
포로로 잡혀갔던 자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서 예루살렘과 그 주변지역을 재건하기를 시작하면서, 천천히 유다의 정체성이 회복되었다. 하지만, 돌아온 자들에게는 자신들이 '남은 자'라는 자각이 있었기에 그 지역에 머물고 있던 자들과 화합할 수 없는 적대감을 갖게 된다. 이 기간은 유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종교적 그리고 사회적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투쟁한 기간이었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여전히 페르시아의 통치 하에 있었고 자신들을 방어할 어떠한 군사력도 없었기에 페르시아 통치자의 통제를 받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모세의 법과 성전의 신성함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주변국가의 문화와 사상에 융합되어졌다.
4. 마케도니아의 헬라제국
팔레스타인의 국력이 약해져갔고, 그에 따라 서서히 세력을 키웠던 마케도니아 제국은 남쪽으로는 이집트까지 동쪽으로 인도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이런 과정 속에 팔레스타인은 아무런 저항없이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통치에 들어간다(BC 332년). 이후 알렉산더가 죽자 마케도니아는 두개로 나눠지게 된다(BC 323년). 이들 정복자들은 유대인들에게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자율권을 허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