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6.10.01 16:25

2016년 10월 2일 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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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22.jpg

■  알립니다!  ■
1. 오늘은 왕국절 제6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0주일, 세계성찬주일로 예배하였습니다. 다음주일은 사회복지주일입니다.
2.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은 참석과 나눔을 부탁드립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매주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참석을 바라시는 분은 차량운행을 위해 미리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4. 다음주일(9일) 공동식사 후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으로 고구마 캐기 농촌봉사활동을 가겠습니다. 자유롭게 참여하시면 되겠습니다.
5. 10월 3일(월) 오전 10시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열리는 '생명과 평화를 일구는 2016 작은교회 박람회'에 참가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6. 은평토마토학교가 9월 24일부터 시작됐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세계성찬주일] 미국 장로교가 1936년 10월 첫째 주일을 지키면서 유래, 전세계의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에 참여함으로 하나 됨을 체험하는 주일입니다.

■ 목회서신201061002-001.jpg
"만약 악마가 실재로 존재한다고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그것은 하나님도 계시다는 증거이다." 어느 영화에서 나왔던 대사입니다. 맞는 말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뜻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가 매일매일 마주치는 것은 온통 악마의 일들뿐인 것 같습니다.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제 정신인 사람이 없는 것 같고 다들 이기적인 탐욕에 찌들어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서민들은 점점 가난해져 가고 국가는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거둬들인 세금은 각종 비리로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놈들의 호주머니로 들어가 버립니다. 어느 구석 하나 제대로 돌아가 우리 마음에 기쁨이나 희망을 주는 일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가 정말 곧 망하겠다는 생각만이 듭니다.
그런데 왜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은 이 나라와 민족, 백성을 굽어 살피시지 않고 고통 가운데, 탐욕 가운데, 부끄러움 가운데 그냥 놔두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수백 명의 학생들이 물에 빠져 목숨을 잃고 심지어는 70대 노인이 경찰의 물대포에 맞아 1년 가까이 뇌사상태로 있다가 돌아가시기까지 하는데, 왜 하나님은 그저 침묵하시고 악인들의 승승장구를 가만히 보고 계시기만 할까요? 이런 질문은 벌써 수천 년째 계속 됐지만 여전히 명쾌한 해답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를 씨를 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통해서 깨닫게 됩니다. 누군가 지치지 않고 계속 씨를 뿌린다면 반드시 수확의 계절에 놀라운 결실을 얻게 될 것이라는 약속이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릴 지라도 기쁨으로 단을 거둘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씨를 뿌리시는 여러분이 돼주십시오. 

■ 교회와 사회  
역사책에서나 보는 일인줄 알았다 | 안상호 청년

경찰의 진압으로 사람이 죽는다는 건 역사책에서나 보는 일인 줄 알았다. 20세기에나 있을 법하다고 생각했고, 요즘처럼 언론이나 SNS가 발달된 시대인데 설마 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다. 물대포 직사는 위험하기에 하지 말라고 엄연히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했고, 위험하다는 것은 진정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지난 2015년 11월 14일에 나도 죽을 수 있었던 거다. 아니, 죽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죽었어도 우리 부모님은 죽인 자에게 사과조차 받지 못했을 것이다. 내 죽음은 나의 범법 행위 때문이고, 내 죽음을 애도하고 규명하려는 사람들 모두 범죄자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내 빈소는 항상 경찰이 언제 올까 하는 두려운 눈빛과 차가운 긴장감 속에 나즉히 떨고 있었을 것이고, 실시간 속보에 들었다 놓아지는 정신없는 현장이었을 것이다. 
나의 죽음 때문에 다른 빈소들이 모두 빠지고 새로운 빈소도 들어오지 않는 평범하지 못한 문상의 자리였을 것이다. 내 부모님은 장례 절차도 맘 편히 치르지 못한 채 본인의 깊은 슬픔을 맞이해야하고, 끊임없이 정부에 분노해야하고, 몰려오는 경찰을 상대해야하고, 기자회견을 해야 하고, '부검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던 얘기를 수십 번 반복해야했을 것이다.
늘 울고, 슬퍼하고, 분노하고,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힘들어하고, 다시 슬퍼하고, 그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또 분노하고...
감당할 수 없는 총체적 피로로 점점 말라갔을 것이다.

그렇게 물대포를 맞아 죽은 나는 그렇다면 그 당시 그 위험한 곳에 왜 갔는가.
내 삶이 힘들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힘들기 때문이다.
국가가 나와 내 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얼마나 소박하고, 마땅하며, 죄스러움 담아 뗀 발걸음인가.

그런데, 그 내 실존에서 이견이 있을 수 없는, 그토록 자연스러운 발걸음의 대가가 죽음이라니.
시신 탈취라니.
증거인멸 부검이라니.
남아있는 내 사람들을 괴롭히는 일이라니.
사과는 커녕 책임을 인정하지도 않는 당당한 얼굴이라니!
죽인 자가 장례식장에 나타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다지도 뻔뻔하게 몰려온다는 게 말이 되는가!
조문을 와도 용서할 수 없는데 또 내 몸에 손을 대려고!
영장 집행이라는 하찮은 이유로!

무엇보다 무서운 건 ‘정말로 탈취하려 하는구나!’를 봤을 때다.
정말로 증거를 감추려 하는구나!
정말로 없었던 일로 하려 하는구나!
정말로 덮고 넘어갈 생각이구나!
또 죽이려 하는구나!
아! 미쳤다!!!!!!!!!!!!!!!!!!!!!!!!

그 말 외엔 답이 없었다. 

* 이글은 안상호 청년의 페이스북에서 허락 받지 않고 퍼왔습니다.

■ 한자락 詩201061002-003.jpg
 인생 | 나해철

알게 모르게
목숨을 거는 거야
해야 될 일을 하는데

목숨을 거는 거야
자식을 낳아 키우는데

알게 모르게
목숨을 거는 거야
시를 시인이 쓰는데

목숨을 거는 거야
자식이 죽임 당한 이유를
알아야만 하는데   

(세월호 규명시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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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쓴 세월호 규명시 304편이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으로 나왔다. 시인의 절망과 유가족의 고통이 넋두리처럼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리고 그 아픔에서 피어나는 희망을 본다.
‘목숨을 거는 거야’ 

시인은 시를 쓰는데 
농사꾼은 밥을 만드는 일에
성직자는 신을 대변하는 일에
학생은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목숨을 건다

세월호 유가족은 진실을 밝히는 일에 
용산 참사, 백남기 선생 유가족도
이 땅에 억울한 죽음을 맞은 이들은
목숨을 건다

불의한 이들은 불의한 일에 목숨을 거는데
우리는 무엇에 목숨을 거나
나는 무엇에 목숨을 걸고 사나 
 | 지리산


■ 헨리 나웬의 "살며 춤추며"

좋지 못한 감정 「영혼의 양식」
때때로 우리는 분노와 질투심, 누구한테서 거절당한 느낌을 ‘딛고 넘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 부정적 감정에 갇혀 있거나 그 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유혹이다. 그 유혹에 넘어갈 때 우리는 ‘피해자’요 ‘잊힌 존재’요 ‘버림받은 존재’가 된다.
그렇다. 우리는 좋지 못한 감정에 집착하며 쾌락을 느끼기도 한다. 어두운 감정이 일어날 때 그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탐색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러나 그 단계에 머물러 있을 것이 아니라 그것을 딛고 넘어가서 가던 길을 계속 가야 한다.

계시 「친밀함」
계시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는, 사랑하는 것은 안전한 일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다. 불안과 분노와 편협의 장벽이 무너지면서 끝없는 지평선이 펼쳐진다. ‘우리는 먼저 사랑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품에 있기에 나약함을 인정하며 편안하게 껴안을 수 있다.
우리가 안전한 곳에 서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기에 마음 놓고 서 있을 수 있다. 어두운 구렁으로 떨어지지 않고 안락한 집에서 환영받을 줄 알기에 안심하고 항복할 수 있다. 끊임없이 창조하는 능력으로 에워싸여 있기에 안심하고 나약해질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고 사는 것은 새로운 앎의 길이다. 우리는 어둠이 아니라 빛에 둘러싸여 있다. 이 빛을 아는 사람은 볼 것이다. 앉은뱅이가 걷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하고 눈먼 이가 보고 산이 움직인다. 누군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다. “사랑의 표징은 나약함이다. 한 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영광, 세상의 평화, 모든 사람의 선한 뜻이다.

권력의 구름 「친밀함」
여기서 문제는 ‘내가, 다스릴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 인가?’하는 것이다. 다른 데는 말고 가톨릭교회를 보면 책임을 위임하는 데는 무척 빠른데 권위를 위임하는 데는 매우 느리다. 많은 설교와 강연은 현대 세계에서 감당해야 할 사제의 책임을 강조하지만 그 책임에 따라붙는 권위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다.
사제는 자기가 맡은 본당 분위기를 좋게 만들 책임이 있지만 자기 맘대로 규정을 바꾸지 못한다. 의미 있는 전례를 행할 책임은 있지만 절대 이렇게 저렇게 하는 것은 안 된다. 잘 가르쳐야 하지만 정해진 교재와 교안을 따라야 한다.
사람들과 상담할 때 좋은 충고를 줄 책임은 있지만 자기 맘대로 자기 생각을 말해서는 안 된다.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누군가의 생각을 대변해야하기 때문이다. 전체 조직과 기구가 수립되면 삶의 모든 영역이 중앙 통제를 받기 때문이다.
여기에도 이로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 장군의 명령이 같은 부대 안에서 일부 병사한테만 적용되거나 오전 8시에서 오후 5시까지만 이행된다면 그 장군은 결코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 하지만 사제의 경우 문제는 그가 과연 투쟁 중인지 아닌지 하는 것이다. 
게다가 좀 더 복잡한 문제가 있다. 그림자 통치 문제다. 권위를 지닌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가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는 것이고 그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자주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본당신부는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른다. 주교가 어딘가에서 지켜보기 때문이다. 주교 또한 자신이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모른다. 교황청 대사가 지켜보기 때문이다. 교황청 대사도 정작 로마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문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많은 권위를 지녔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문제를 풀수록 구름이 더욱 두껍게 낀다는 것이다. 아마도 권위에 대한 사람들의 두려움이나 불안은 대부분 권위 자체에 연관되어 있다기보다 권력이 구름에 가려 책임자들이 허공의 그림자에 매달려 있는 현실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본당에서 멀어질수록 더욱 희미해지고 익명성을 띤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그림자 통치라는 뜻이다. 이는 우리가 건드릴 수 없는 사이비 신비 속으로 모든 경계가 녹아드는 ‘영원’으로 끊임없이 조회(照會)하게 한다.

■ 영화묵상 - 이관택 목사201061002-002.jpg
“타인의 삶은... 따뜻함의 보고” | 타인의 삶
독일, 2006년,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너스마르크 감독작품  

  나는 다음 달 독일을 비롯한 여러 나라를 여행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이번 여정의 핵심일정은 과거 동독지역이라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종교개혁'과 ‘독일통일'이라는 두 가지 테마가 스며있는 지역이기에 그렇다. 여정을 준비하면서 과거 분단된 독일 상황을 공부하기 위해 영화를 한 편 보았는데 오늘 소개할 <타인의 삶>이다. 

 동독 슈타지(동독의 비밀경찰이며, 한국의 국정원과 같은 정보기관)의 한 요원이 반체제인사를 사찰하면서 생겨나는 심적인 변화를 밀도 있게 그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신의 책무와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 내면의 의지가 교묘하게 충돌하면서 동서 냉전의 실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독일은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를 경계로 두고서 동서로 갈라진 채 반세기를 지냈었다 이미 통일을 이룬지 26년이 되었지만 아직도 독일에선 냉전시대를 배경으로 많은 영화와 이야깃거리들이 흘러 나온다. 물론 한해에도 몇 편씩 분단상황을 가지고 장사질을 해대는 우리나라만 하겠냐만~ 아무튼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냉전으로 인한 싸늘한 분위기가 묵직하게 전해오며 여전히 분단국가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현실을 생각해보게 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영화 상당히 .... 따뜻하다

 지금도 시도 때도 없이 전쟁위기설이 감돌고,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무고한 사람이 죽어나가도 합법적인 공무집행인 양 뻔뻔한 언론플레이를 해대며, 아직도 내란음모죄로 국회의원을 하루아침에 반란수괴 취급하는 나라에서 살고 있는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따뜻함을 느꼈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스치듯한 짝사랑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던지는 주인공의 인생을 보라. 타인의 삶을 도청하며 그 대상의 허점을 찾아내어 궁지에 몰아넣는 일이 그의 본래 삶이지만 결국 그는 그 일을 통해 어느새 사랑을, 정의를, 용기를 얻었다. 그는 타인의 삶을 들여다보며 역설적이게도 자기 자신 속에 있던 낯선 부분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실상 타인을 통하여 자신의 삶을 들여다본다는 것, 내 안의 낯설음과 반응하며 삶을 조율해간다는 것!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결국 그것이 바로 세상을 바꾼다.

 나에겐 이 과정이 참으로 따뜻하게 다가왔다. 비록 동독 비밀경찰의 어마 어마한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였지만, 자신의 탐욕을 위해선 무소불위의 권력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역겨운 권력자의 음탕한 눈빛을 마주해야하는 영화였지만, 내가 낭만적이게 꿈꿔왔던 사회주의가 과거 이 지상에서 얼마나 비정하고 암담하며 불의한 사회였는지를 여실히 폭로하는 영화였지만 .... 따뜻했다!

 불의함이 난무하기를 성서의 계시록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절망적인 2016년 가을. 지금의 암담한 한국사회도, 어딘가에선 이런 따뜻한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그 따뜻함들이 모여야 한다. 결국 빛으로 어둠은 사라지고, 정의로 불의는 뒤집어지지 않겠는가. 물론 영화가 보여준 대로 세상이 뒤집힌다고 권력자의 음탕한 눈빛이 바뀌진 않을지라도... 그 따뜻함은 전달 될 테니.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일평생 이웃과 농촌을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백남기 선생이 국가의 폭력에 의해 근 1년 사경을 헤매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 억울한 죽음과 공권력의 책임 회피, 부검을 통한 은폐시도에 분노하며 이 부정한 정권을 하나님이 정의로 심판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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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01Oct
    by 좋은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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