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자유'의 달]
인간에게 자유는 가장 소중한 가치이자 정체성 형성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적 자유를 얻기 위해 피흘려 투쟁한 역사가 있으며 영혼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잃어버린 참된 자유의 가치를 소중하게 되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주일입니다. 절망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도 삶의 희망을 발견하고 부활의 능력으로 살아가도록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부활주일 헌금도 정성껏 준비하여 교회 계좌로 입금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코로나19 감염 확산을 우려하는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여 주일예배를 예배당에서 드리지 않으니 가정에서 경건하게 예배하시기 바랍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속히 해제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3. 부활주일을 맞아 목회자들이 가정을 방문하고 부활절 인사를 나누고자 합니다.
4. 교회에서 만나지 못하더라도 개인적인 건강상태나 특별히 기도할 일이 있으신 분은 전화나 문자, 카카오톡 등으로 담임목사에게 꼭 알려주십시오.
5. 15일은 국회의원을 뽑는 총선거일입니다. 국민의 대표를 뽑는 일에 관심 갖고 좋은 사람이 뽑힐 수 있도록 기도하며 투표해 주십시오.
6. 16일은 세월호 참사 6주기입니다. 세월호의 진상이 규명되고 유가족들의 슬픔이 위로받기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목회서신
부활의 아침입니다.
비록 우리가 한 자리에서 예배를 하지는 못하지만 부활주일을 맞이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한 미완성의 부활주일 같은 느낌이 들지만 부활주일은 부활주일이고 교회력에 따르면 2020년에는 4월 15일이 부활주일입니다.
부활주일이니 부활이라는 개념을 생각해봅니다. 사실 우리는 부활과 천국의 개념을 비슷하게 이해하거나 혼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은 우리가 죽은 후에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게 되는 어떤, 알 수는 없지만 매우 좋은 새로운 세상인 반면, 부활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는 것, 특히 성서는 몸의 부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부활하신 곳은 저 세상인 천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이었고 십자가에 못 박히고 창으로 옆구리가 찔린 그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일단 몸의 부활을 겪은 후에 그 몸을 가지고 천국으로 들어가는 것일까요, 아니면 영혼은 휴면상태에 있다가 몸이 부활하면 그때 영혼이 깨어나는 것일까요? 그럼 몸이 부활하게 되는 그 어느 시점까지 우리의 영혼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영혼이 천국에 가 있다가 몸이 부활하는 순간 영혼이 이 땅에 내려와 몸과 합체가 되어 온전한 인격체가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부활한 몸과 합체한 온전한 인격체는 다시 천국에 가는 것일까요, 종말 이후 전혀 새롭게 변모한 이 땅에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것일까요??? 목사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아는 것이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일은 걱정하지 말고 가장 좋은 것으로 베푸시는 하나님께 맡겨두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천국과는 별개로 부활은 몸과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부활은 우리 삶의 문제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몸이 약하거나 병에 걸린 사람, 생사의 갈림길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람의 회복이 부활의 소망이겠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없이 비루한 삶을 하루하루 겨우 버티듯이 살아가는 사람이 내일의 태양을 희망으로 기다리게 된다면 그것 역시 부활의 역사이겠습니다. 코로나19로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그동안 살아온 일상들이 얼마나 소중한 축복이었는지를 깨닫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매순간을 감사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것이 부활주일 아침의 놀라운 체험이리라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의 사건과 경험은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한 번의 사건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매년 봄의 어떤 주일에 맞이하는 부활주일 한 번으로도 부족합니다. 우리가 매주 일요일을 거룩한 날로 기념하며 모여 예배하는 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부활을 상징하고 축하하기 위함입니다만 그것도 부족할 것입니다. 매일 아침에 침대에서 일어나며 난생 처음 맞이하는 전혀 새로운 하루하루를 감격과 감사로 맞이하는 부활의 아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이번 주 수요일은 국회의원 선거일입니다. 지난 20대 국회는 최악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국민이 국가 주권의 주체로 존중받지 못한 죽음과도 같은 시간들을 청산하고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제대로 된 국회를 세워 희망의 미래를 만드는 부활의 날로 만드는 것 역시 우리가 기억하고 기도해야 할 부활의 의미일 것입니다.
저도 요즘 나이 먹어가면서 총기가 사라진다는 핑계로 대충대충 일상을 허송하며 살다가 아내에게 한소리 들었는데… 그럴듯한 말만 떠들 것이 아니라 부활의 기운을 받아 매일매일을 새롭게 되살아나 맞이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해봅니다.
2020년 총선, 올바른 국민의 대표를 국회의사당으로!
수요일(15일)은 제21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 20대 국회는 조국 전 장관 사태로 촉발된 과도한 정쟁과 장외투쟁, 발목 잡기와 막말 대잔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고 국민의 원성이 자자했습니다. 이번 총선에서는 국민의 의사가 투표에 제대로 반영되도록 하자는 취지로 선거법을 개정하여 비례대표 투표를 실시하는데 법의 맹점을 악용하여 거대 정당들이 위성정당을 창당하고 급조된 군소정당들이 난립하는 등 많은 문제도 제기된 데다 코로나 19로 재외국민 투표가 축소되었고 투표율도 감소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선거는 코로나19로 인한 사회 시스템의 변화와 국민의 기본적 생존권 보장에 대한 요구가 고조되어 매우 중요합니다. 특정 계층의 이익을 위해 국민을 볼모로 잡는 정당을 국회에서 몰아내고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며 급변하는 미래를 대비하는 후보가 당선되도록 투표해 주십시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선거철에는 바짝 엎드려 살려달라고 절하지만 막상 당선되고 난 후에는 자기들의 기득권에만 몰두하며 국민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들의 모습이 지긋지긋합니다. 고단한 이 땅의 민중이 주권을 올바로 행사하여 악인을 몰아내고 선한 이웃을 세우게 하시며 함께 행복한 나라를 만들어가게 인도해 주십시오.
부활을 살기 ■ 박성중 목사
하느님의 죽음을 말해야 할 때 부활은 난감한 주제입니다. 피를 토하며 하느님의 죽음을 거부한다고 거부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선포되고 있는 하느님이라면 어떤 의미에서는 죽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하나님 보좌(寶座)를 딱 잡고 살아. 하나님 꼼짝 마. 하나님 까불면 나한테 죽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하고 친하단 말이야. 친해” 이렇게 선포되는 하느님은 이미 죽은 하느님이 맞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예수를 통해 보인 하느님의 뜻이 실현된 하느님의 나라와 관계없다면 뭐 그 하느님의 죽음은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도 합니다.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 1926~) 희망의 신학으로 알려진 독일의 신학자입니다. 그에게서 부활을 다시 읽는 건 하느님의 죽음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부활을 개인적 차원에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오늘 우리 삶에 실현될 수 있음을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죽음에서 다시금 하느님의 생명력 있는 활동을 보고 느끼고 참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결코 달콤한 말로써 위로해 주는 ‘피안의 아편’이 아니라, 이 생명을 거듭나게 하는 능력이다. 희망은 하나의 다른 세계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이 세계의 구원을 바라본다. 성령 안에서 부활은 단지 기대될 뿐만 아니라 벌써 경험되기도 한다. 부활은 매일 일어난다. 사랑 가운데서 우리는 많은 죽음과 많은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살아 있는 희망으로 거듭남으로써 부활을 경험한다. 우리는 이미 여기서 생명을 일깨우는 사랑을 통하여 부활을 경험한다.”
몰트만,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이신건 역 (대한기독교서회, 1997), 90.
좋은만남교회의 부활은 죽은 부활이 아니라 산 부활입니다. 이 부활의 주인공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지금까지 이런 부활절은 없었다? ■ 이관택 목사
‘부.활.신.앙’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 그리고 구원을 향한 열망은 바로 이 네 글자로 축약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이며 궁극적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안식일’을 지키는 유대교를 비롯한 일부 종파와 달리 우리가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교는 매주일을 ‘부활절’로 명명하고, 의미 지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부활을 기념합니다. 또한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노력하며 놀라운 부활의 삶을 사모하고 경험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부활신앙’을 실제적으로 기념하는 ’부활절’은 교회력 절기상 가장 중요한 날입니다. 오늘은 부활의 기쁨이 넘쳐나고, 이 땅의 모든 죽음과 억압과 불안과 공포의 권세로 부터 감히 해방되는 날입니다. 가장 강력하고, 놀라운 신비를 찬양하고 경험해야 하는 날입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로 작금의 세계는 ’전대미문의’, ‘초유의’라는 수식어가 서글프리 만큼 잘 어울리는 하루하루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수십만의 사람들이 병마로 인해 고통 받고 있고, ‘비일상의 일상화’가 그 끝을 알 수 없는 터널 속으로 모든 인류를 몰아넣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 여파로 우리의 신앙공동체도 벌써 한 달 넘게 모이지 못했고, 심지어 부활절까지도 각자의 가정에서 따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서글픈 현실을 맞이합니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부활의 기쁨을 나누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 우리는 현실의 무력함을 감내해야하는 동시에 영혼을 마비시키며 속 깊은 곳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신앙적 무기력감하고도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토록 ‘서글픈 부활절’을 맞이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2020년의 부활절은 어떤 날로 기억될까요?
그럼에도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난 2000년간 이 땅 곳곳에서 ‘서글픈 부활절’을 마주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이 얼마나 많이 있었을까. 몸과 마음, 영혼까지도 옴짝달싹 하지 못할 만큼 비통한 상황 가운데서 부활절을 마주해야 했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로마의 끔찍한 박해 가운데 지하무덤인 카타콤 속 먼저 죽어간 신앙동지들의 주검 사이에서 부활절을 맞이해야 했던 초대교회 교인들의 얼굴, 수없이 많은 전쟁의 한 가운데에서 도무지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을 만큼의 야만과 폭력 속에서 부활절을 맞이한 병사의 얼굴, 600만 명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치 수용소의 어두운 감옥에서, 기아의 벼랑 끝으로 내몰려 아사직전에 있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눈물을 흘리던 아프리카의 한 어머니의 얼굴에서. 상상하면 할 수록 이 땅에 끔찍한 부활절이 얼마나 많았던가 되돌아보게 됩니다. 그 중에는 제가 직접 경험한 2014년의 부활절도 떠오릅니다. 세월호 참사 직후에 마주한 그 슬픈 부활절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무력하고 서글픈 부활절을 떠올려 보니 그 속에는 억울하고 비통하게 고난 받았던 이웃들의 얼굴이 있습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그들의 곁에서 늘 함께 계시며 함께 아파하셨던 하나님의 흔적 또한 찾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이 절망적인 세상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안간힘을 쓰시는 그 분의 부활의 손길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지난 고난주간에 <학개서>를 묵상하면서 지냈습니다. <학개서>에는 무너진 성전을 다시 일으켜 세우시려는 하나님과 그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의 절절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은 예언자 학개를 통해 시종일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나 주의 말이다.”(학개 1:13)
“스룹바벨아, 이제 힘을 내어라. 여호수아 대제사장아, 힘을 내어라. 이 땅의 모든 백성아, 힘을 내어라. 내가 너희와 함께 있으니, 너희는 일을 계속하여라. 너희가 이집트에서 나올 때에, 내가 너희와 맺은 바로 그 언약이 아직도 변함이 없고, 나의 영이 너희 가운데 머물러 있으니,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아라.”(학개 2:4-5)
“그 옛날 찬란한 그 성전보다는, 지금 짓는 이 성전이 더욱 찬란하게 될 것이다. 내가 바로 이 곳에 평화가 깃들게 하겠다. 나 만군의 주의 말이다”(학개 2:9)
혼란한 이 땅에 평화를 약속하신 부활의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는 슬픈 부활절을 맞이했지만 이 가운데에도 굳건히 서 있는 부활의 약속을 잊지 않으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이럴 때일수록 부활의 기쁨을 더욱 많은 이웃들과 함께 나누며 희망 가득한 하나님 나라를 일구어가는 좋은만남공동체가 되길 부탁드립니다.
부활의 기쁨을 통해 여러분의 삶이 더욱 찬란하게 되기를.
그래서 부처님이 이르시기를 보살의 마음은 마땅히 모양에 머물지 않고 널리 베푼다고 하신 것이다.
是故로 佛說菩薩心은 不應住色布施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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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의 마음이란 어떤 마음인가? 어디에도 머물러 있지 않는 마음이다. 보살은 육근六根이 맑고 깨끗하여 어디에도 붙잡히지 않고 마음을 낸다. 어찌 그가 보시를 베푸는데 무슨 욕심을 채우려는 뜻에서 베풀겠는가? 그러나 안근眼根(눈)이 맑지 못한 데 온갖 고통의 뿌리가 있는지라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모양(눈으로 보는 것)에 머물지 말고 널리 베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陣雄)
“어리석은 자는 일을 없애고 마음을 없애지 않는다. 슬기로운 자는 마음을 없애고 일을 없애지 않는다. 보살의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모든 것을 다 버리니 복덕福德을 짓겠다는 마음조차 없다. 여기 버림(捨)에는 세 가지 등급(等)이 있다. 안팎으로 몸과 마음을 모두 버려 허공처럼 어디에도 탐착貪着하지 않게 된 뒤에 힘을 좇아(隨力) 상대에게 응하며(應物) 능소能所(주는 쪽과 받는 쪽)를 모두 잊으면 그것이 크게 버림(大捨)이요, 한번 도를 행하여 덕을 베풀되 곧 돌이켜 그것을 버리고 아무 바라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중간 버림(中捨)이요, 널리 많은 선善을 닦으면서 바라는 바가 있으나 법法을 듣고 공空을 알아서 집착하지 않으면 그것이 작게 버림(小捨)이다. 크게 버림은 횃불이 앞에 있어서 미혹과 깨달음이 다시 없는 것과 같고, 중간 버림은 횃불이 옆에 있어서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것과 같고, 작게 버림은 횃불이 뒤에 있어서 함정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黃蘗禪師)
◆
수보리여. 보살이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이와 같이 널리 베푸는 것이나 여래가 설하기를, 모든 상이 곧 상이 아니라 하였고, 또 설하기를, 모든 중생이 중생 아니라 하였다.
須菩提여,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故로 應如是布施나 如來가 說一切諸相卽是非相이요 又說一切衆生卽非衆生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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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이란 다만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널리 베푸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베푸는 바가 아무 것도 없다. 하되 하는 바가 없고 주되 주는 바가 없다.
“무위無爲의 일(事)에 처하고 말없는 가르침을 행하고 만물을 지으면서 사양하지 않고 낳되 가지지 않고 하되 기대하지 않고 공을 이루고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는” 노자老子 같은 성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겠다.
‘나’가 없는 사람에게 어째 ‘내가 한 일’이 있으랴?
“보살은 법과 재물을 똑같이 베풀어 끝없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사람이니, 만약에 자기가 능히 이익을 준다는 마음을 품는다면 이는 곧 법이 아니요, 능히 이익을 준다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이를 이름하여 머물지 아니함(無住)이라 한다. 머물지 아니함이 곧 부처님 마음(佛心)이다.”(六祖)
미국 북쪽 지방에서 사는 어떤 흑인 직장인 한 명이 먼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흑인은 크리스천이었다. 주일 아침에 숙소 근처에 있는 교회를 갔다. 예배당 계단으로 올라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문 앞에서 안내를 맡은 백인이 이 흑인을 가로막았다. “당신은 여기 들어오지 못합니다.” 흑인은 깜짝 놀랐다. “왜 들어가지 못합니까?” 그러자 백인이 차갑게 대답했다. “여기는 백인들만 모여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흑인은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 흑인은 하는 수 없이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리고 안에서 들려오는 찬송소리를 들으며 혼자서 기도를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비몽사몽 간에 흰 옷을 입은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다. 예수님은 흑인의 어깨를 두드리시며 물으셨다. “너는 어째서 여기에 혼자 앉아 있느냐?” 흑인은 예수님의 옷을 붙들고 말했다. “예수님! 저는 예배 드리려고 이 교회에 왔는데 제가 얼굴이 검다고 들어가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여기 앉아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 흑인의 어깨를 다시 두드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도 그 예배당에 못 들어갔느냐? 나도 그 예배당에 들어가지 못했단다.”
코로나19로 닫힌 예배당 문 앞을 예수님이 지키십니다. 담임 목사님은 어제 밤 영상을 만드시느라 늦잠을 자는 모양입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예배당 지붕에 참새가 가득히 앉아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봄 볕에 해바라기 하고 있는 고양이가 교회 마당 구석에서 졸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코로나 바이러스가 무서워 서로 전화로만 안부를 묻고 성가대원의 가운은 옷장에서 나프탈린 냄새에 쩔어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목숨같이 생각하던 노 권사님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몰래 예배당에 와서 기도하고 돌아갑니다. 돌아오는 임대료 내는 날짜에 개척교회 목사님 속이 타들어갑니다. 요즘은 손님이 없어 밤에 나가 하던 대리 운전도 접고 개학을 못하고 집에 있는 딸 선행 학습 시키기에만 매달려 있지만 가끔 쳐다 보는 하늘이 놋처럼 무겁습니다. 텅 빈 거리에 울려퍼지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로그송이 오늘 따라 짜증이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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