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20.05.30 15:20

2020년 5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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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걷고 생명 평화의 삶을 사시기를 당부합니다.

2.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예배 참여시 방역수칙 준수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오늘 5월의 주일 행사를 망라하여 함께 축하하고 응원하는 주일로 지키고자 하였으나 수도권의 코로나19 확산 우려로 취소하였습니다.

4. 건강이 좋지 않거나 어린이들의 감염 우려로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교우들과 코로나로 해외 이주 계획에 어려움을 겪는 가정, 학교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학생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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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서신

제가 절대 성차별적인 사람은 아닙니다만…

 

지난주에 한 농촌선교 단체의 창립기념행사에 참석했었습니다. 별다른 생각 없이 느지막히 도착하였지만 행사장 입구에 들어서면서부터 분위기가 예년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참신한 퍼포먼스도 있었고, 아주 다채로워졌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단체에 후원도 하고 소소하게 돕는 일도 있는 입장에서 기분이 좋았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함께 정리하던 중에 제가 "여성이 많이 들어와서 그런지 행사가 이벤트(도 많아지고 다채로워졌네!)…"라고 말했습니다. 이 단체에는 농촌선교에 특별한 사명감을 가진 여성 목사가 몇 년 전부터 사무국장으로 일하고 있고 작년에는 대학을 갓 졸업한 똑똑한 여성 간사가 합류하였습니다. 또 신학생 여자 후배들이 로비에서 안내와 접수를 하고 있었고요. 저는 다채로워지고 참신해진 이유가 젊은 여성들이 합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남성들이 중심이 돼 진행하는 행사는 제 눈에는 솔직히 좀 칙칙했었습니다. 남성 중심의 세상에서 여성성은 항상 생명력과 대안이 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기분이 좋아서 한 말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사실 괄호 안에 있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말하던 중에 페미니즘 경향이 강한 우리 대학 여성 후배들의 귀에는 거슬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뒤풀이를 마치고 귀가하던 중 아르바이트로 안내를 하던 학생 한 명이 전화를 했습니다. "목사님, 그런 말씀 하시면 안 돼요!" 미처 다 마치지 못했던 저의 그 말 한 마디(생각해보면 다 하지 않은게 다행입니다)에 여성의 성역할을 규정하고 여자이기 때문에 이러저러하다는 선입견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간단히 말해 성차별적이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자기들끼리 뒤풀이를 하다가 제 말을 들은 학생들이 저를 성토했던 것 같습니다. 저를 잘 아는 이 학생은 저를 규탄하기 위해서 전화를 한 것이 아니라 안타까워서 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굳이 안 해도 될 말을 하고, 아니 저 같은(?)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갖고 또 입 밖으로 낸 것이 안타까웠다는 말일 것 같습니다. 지적하고 항변하고 변명하고 서로 비판하는 통화는 버스 안에서 또 버스에서 내려 정류장 앞 벤치에서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이어졌습니다.

솔직히 저는 좀 억울하고 불쾌했습니다. 제 말이 성차별적이라는 지적도 억울했고 또 저도 그렇고 그쪽도 그렇고 잘 알지도 못하는 학생들이 미처 다 맺지도 않은 말 한 마디 때문에 저를 차별적인 사람으로 판단하였다는 것도 억울하였습니다. 부끄럽지만 자타가 공인하듯이 제가 원래 말을 좀 함부로 하는 편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이 말이 듣는 순간 곧바로 불쾌감과 분노가 터져오를 만큼 성차별적이었는지도 동의할 순 없었습니다. 앞으로 어린 여성 후배들 앞에서는 일체 말을 말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서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니 분명 저의 불찰이었고 제가 변화하는 시대의 기준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위 운동한다는 목사가 마땅히 가져야 할 성인지 감수성이 부족했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었고요. 물론 한편으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50여년을 가부장적 사회에서 살아온 저, 그럼에도 모든 차별을 반대하고 나름의 참여를 했던 저를 알아보고 이해하려는 관계의 노력 없이 낙인 같이 내려지는 비판 앞에, 세대 간의 화해와 소통은 영영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낙심도 들었습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보다 더 진지한 성인지 감수성을 갖도록 노력하고 성적인 차이로 선입견을 갖거나 규정하는 일이 없도록 더욱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또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려는 노력도 해야겠습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꾸준히 자기를 변화시키고 타인과 소통하려는 노력 역시 기독인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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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일 고공농성 김용희 노동자의 투쟁이 승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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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설립위원장으로 활동했다는 이유로 1995년 부당해고를 당하고 강남역 삼성 본사 인근 교통폐쇄회로 철탑 위에서 복직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김용희 해고노동자가 열흘이 빠지는 1년인 355일만에 농성을 마치고 땅을 디뎠습니다. 김용희 씨는 기자회견에서 "코로나로 회사들이 정리해고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데 노동자 한 사람이라도 억울하게 해고돼 눈물을 흘리게 하지 않겠다고 했던 문재인 대통령의 노동자 정책은 어디로 갔나? 삼성그룹의 광고비를 많이 받지만 언론인들의 사명감은 무엇인가?"라고 발언하였습니다. 

무노조 경영 원칙으로 법적 권리를 주장하는 노동자들을 부당해고하고 사찰하며 또한 협박과 폭행까지 일삼았던 삼성은 이재용 부회장이 검찰에 소환 조사를 받자 준법감시위원회를 만들고 화해 시도를 하였으며 지난 29일에 해고노동자 김용희 씨에게 사과의 뜻을 밝히고 합의를 타결하였습니다. 더 이상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고 약속하기도 하였습니다. 김용희 노동자의 투쟁 승리를 축하하며 한국의 기업들이 노동자를 탄압 대상이 아닌 협력자로 받아들이는 상생 경영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355일 동안 철탑 위에서 비바람 맞으며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투쟁한 김용희 노동자가 승리로 투쟁을 마쳤습니다. 이 승리가 개인이 아닌 노동자 계급과 한국인 모두의 승리가 될 수 있도록 한국 사회가 바뀌고 정책이 변화하며 기업들이 함께 노력하는 대 전환의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35) 기억을 심고 담기

 

1

 

11시 20분 교무실을 나섭니다. 램프ramp를 따라 5층 교무실, 4층 학년부실, 3층 기숙사부실에서 출발한 선생님들이 흐릅니다. 그 길에 몸을 넣습니다. 교사동을 나와 길게 늘어선 줄이 됩니다. 그 줄 사이 마스크를 확인하고 식사명단에 이름을 찾아 서명하고 손을 소독합니다. 그 줄의 끝은 배식대 국그릇에 국 담기입니다. 

투명 아크릴은 식탁을 여섯 등분하고 그 칸에 식판을 앉히고 의자를 끌어 몸을 넣습니다. 아크릴 직사각형들이 가득한 식당을 한 번 둘러보고는 그 어떤 조준선을 따라 좌우로 상하로 식판을 맞춥니다. 마스크를 벗고 왼손엔 숟가락, 오른손엔 젓가락을 듭니다. 젓가락은 빨간 제육볶음을 들어 숟가락에 옮기고 매콤달콤함과 함께 좀 짤 듯 입으로 넣습니다.

 

그리고 돌아가신 아버지가 시작되었습니다. 정육점에 S형 고리에 매달린 정확히 반토막난 머리 없는 돼지와 동그란 칼날 육절기의 슥삭슥삭 반복 동작, 슈퍼 계산대를 지나 왼쪽에 우뚝 선 냉장고와 둘째 칸 소주, 상가 외부 공용 화장실 지붕 장독대로 향한 사다리를 올라 고추장 항아리.

 

2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아주머니의 방이 있던, 길 쪽으로 난 오래된 회색 집이 무대장치처럼 다가와서는 우리 부모님을 위해 뒤편에 지은 정원 쪽 작은 별채로 이어졌다.(내가 지금까지 떠올린 것은 단지 그 잘린 벽면뿐이었다.) 그리고 그 집과 더불어 온갖 날씨의, 아침부터 저녁때까지의 마을 모습이 떠올랐다. 점심 식사 전에 나를 보내던 광장이며, 심부름하러 가던 거리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지나가곤 하던 오솔길들이 떠올랐다. 일본사람들의 놀이에서처럼 물을 가득 담은 도자기 그릇에 작은 종잇조각들을 적시면, 그때까지 형체가 없던 종이들이 물속에 잠기자마자 곧 펴지고 뒤틀리고 채색되고 구별되면서 꽃이 되고, 집이 되고, 단단하고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처럼, 이제 우리 집 정원의 모든 꽃과 스완 씨 정원의 꽃들이, 비본 냇가의 수련과 선량한 마을 사람들이, 그들의 작은 집들과 성당이, 온 콩브레와 근방이, 마을과 정원이, 이 모든 것이 형태와 견고함을 갖추며 내 찻잔에서 솟아 나왔다.”

-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스완네 집 쪽으로 1』, 김희영 역 (민음사, 2012), 90-91.

 

3

 

‘프루스트 효과Proust Effect’, ‘프루스트 현상Proust Phenomenon’, ‘프루스트적 기억Proustian’이라는 개념은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의 자전적 소설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만들어졌습니다. 소재 ‘마들렌’을 따라 ‘마들렌 효과’라고도 합니다. 이 현상은 어떤 냄새를 통해 불현듯 과거가 효과적이고 생생하게 기억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낭만적입니다. 그리고 폭력적입니다.

 

‘프루스트 효과’가 가진 다른 특성은 ‘우연성’과 ‘비자발성’입니다. 저 깊은 어딘가에 묻혀 있던 숨어 있던, 묻었던 숨겼던 기억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어떤 사건에 의해 끌어 올려져 온 의식을 덮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 기억의 재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과거 어느 시간과 장소, 그 기억을 만든 주인공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 기억이 다시 나타나는 경험의 순간에는 단지 수용자일 뿐입니다. 할 수 있는 일이란 그 재현이 긍정적이길 바랄 수밖에. 그런데 또 그렇지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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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일단 파기름을 내려 합니다. 집에서 불맛과 불향을 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 파기름입니다. 이제 다진 마늘을 넣어 돼지고기와 당근을 볶아 어느 정도 익었을 때 간이 맞도록 고추장, 간장, 소금, 그리고 양배추를 함께 익힙니다. 고춧가루는 빛깔. 마지막 참기름 조금, 깨소금. 여기에는 마법의 가루나 액체도 있습니다. 자랑질을 위해서는 아무도 몰라야 하고 모르게 할 것입니다. 맛난 제육볶음 만큼의 재미입니다.

 

주차장에서 선생님을 만나 야구장을 가로질렀습니다. 

“며칠 전에 야구장 그물을 넘는 홈런이 발생했어요.”

선생님의 자동차는 그물 바짝 주차했습니다. 홈런볼을 피해야 한답니다.

“내일은 그쪽에 대야 할까요?”

“그물에 걸려 떨어지는 공에 맞을 수도 있어요. 하하하”

교사동 로비 체온 점검 기계 앞을 지났습니다.

“발열 체크하셔야 지요.” 노란 라인에 선 선생님이 스크린 안의 얼굴을 빼내어 말했습니다.

“양말을 벗어야 하나요? 히히히”

 

이렇게 할 수 있는 기억을 심고 담았습니다. 기억의 재현? 그건 미래의 마들렌과 제육볶음에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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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또한 수보리여. 만약에 착한 남자 착한 여자가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다가 사람들한테 업신여김을 받으면 그 사람은 전생의 죄업으로 마땅히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되어 있었으나 지금 세상에서 사람들의 업신여김을 받은 까닭에 전생의 죄업이 없어지고 말았으니 마땅히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이다. 

 

復次須菩提여. 若善男子善女人이 受持讀誦此經하다가 若爲人輕賤이면 是人은 先世罪業으로 應墮惡道나 以今世人輕踐故로 先世罪業이 卽爲消滅이니 當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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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을 받아 몸에 지니고 읽어 외우면 사람들이 그를 가벼이 여기고 함부로 대한다. 왜일까? 경을 읽는 것이 그냥 목소리 돋우어 독경讀經하는 것을 뜻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몸받아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데 어째서 업신여김을 받는가? 사람들이 저마다 똑똑한 줄 알지만 사실은 어리석어서 그를 업신여기는 것이지 그가 업신여김을 받을 만한 짓을 했기 때문은 아니다.

 

애꾸 토끼들만 사는 섬에 두 눈 가진 토끼가 들어갔다가 놀림을 받고 쫓겨났다는 이야기가 있거니와 경을 모르는 인간들이 경 읽는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 꼭 그와 같은 현상이다. 보이는 것을 위조로 하여 살아가는 자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는 자들이 바보 병신으로 보일 것이다.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또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의 축복도 백 배나 받을 것이며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가복음 10:29-30)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경을 얻어 몸에 지니고 읽다가 사람들한테 업신여김을 받고는 위없는 깨달음을 얻어 불생불멸의 경지로 들어간다. 횡재가 있다면 이보다 더한 횡재가 있으랴?

 

“업을 지었으니 도망칠 곳이 없게 되었는데 반야般若를 행한 까닭에 무거운 벌이 가벼운 벌로 바뀌었다. 대론大論에 말하기를, 지난 생에서 중한 죄를 지어 마땅히 지옥에 들어가게 되었으나 반야를 행한 까닭에 지금 생에서 가벼운 벌을 받으니, 비譬컨대 마땅히 죽을 죄를 지은 자가 힘있는 이의 보호를 입어 죽음 대신 채찍을 받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僧 若訥)

 

그러니 그가 경을 읽는다 하여 업신여기고 함부로 대한 자들이야말로 얼마나 고마운 존재들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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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벅의 어머니인 케롤라인은 선교사인 남편 사이든 스트리커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와 펄벅 등 세 자녀와 함께 청강포라는 지역에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심한 가뭄이 들었다. 그 때 남편은 다른 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 집안에는 세 자녀와 중국인 가정부만 남아 있었다. 가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캐롤라인이 창가에 서있는데 밖에서 중국인 남자둘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비가 오지 않고 가뭄이 계속되는 원인은 서양인이 이 지방에 들어왔기 때문이야. 그러니 오늘 밤 선교사 가족을 죽여 신에게 바치세.” 함께 듣고 있던 중국인 가정부는 자신에게 평소에 친절히 대해 주던 캐롤라인을 보고 울면서 이번 일만큼은 당신을 도울 사람들이 없을 것이라 했다. 

캐롤라인은 두려움에 빠졌지만 골방으로 들어가 기도하기 시작했고 오랜 기도 후에 가슴속에서 넘쳐 나오는 담대함을 느끼며 밖으로 나왔다. 자정쯤 되었을 때 그녀의 집을 향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캐롤라인은 가정부에게 차와 케이크를 준비하도록 이르고 마치 귀한 손님을 맞이하듯 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 어둠 속에 이미 여러 중국인들이 마당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소리를 낮추어 친절하게 말했다 “여러분, 어서 들어와서 차와 다과를 나누시지요.” 

중국인들은 “이상하네. 우리들이 무섭지 않은가?”라고 웅성거리면서 집안을 둘러보고 이것저것 만져보면서 건들거리기도 했다. 

캐롤라인은 오르간 앞에 앉아 중국말로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비할 데 없는 존귀한 이름의 우리 주여....” 찬송이 끝날 때까지 방안은 조용했다. 그 곳에 모인 중국인들은 결국 얼굴을 마주보고 멋쩍어하면서 하나 둘씩 돌아갔다. 캐롤라인은 의자에 주저앉아 안도의 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그 날 새벽 기적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기적은 친절과 배려로부터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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