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정의'의 달]
5월은 가정의 달이기도 합니다만 한국현대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5.18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 달이기도 합니다. 폭력으로 자유가 박탈되고 민주적 시민의 권리가 유린된 사회의 가정은 또다른 부조리였음을 깨닫습니다.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하나님 나라가 이 땅 위에 세우기 위해 함께 기도하기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4주일입니다. 우리 일상의 매순간이 부활의 체험과 감동으로 가득하기를 기도합니다.
2. 지난 주일부터 시범적으로 현장 예배를 재개하였으나 여전히 코로나19 감염예방을 위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요청되고 있습니다. 많은 불편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나와주시고 집회 방역수칙 준수를 위하여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3. 건강이 좋지 않거나 어린이들의 감염 우려로 함께 예배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기억하시고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4. 어린이주일, 어버이주일, 야외예배 등의 교회행사는 정부의 방역정책에 맞춰 진행하겠습니다. 양해를 구합니다.
5. 서울연회가 5월 12(화)~13일(수)에 은평교회에서 열립니다.
목회서신
시골에 계신 부모님께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해 개인적 시간이 많아져서 강원도에 부모님을 뵈러 가는 시간이 좀 많아졌습니다. 이번 연휴에도 가족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코로나가 도시를 거의 마비시켰지만 농촌에는 별로 피해가 없습니다. 코로나건 메르스건 봄을 맞은 농촌은 바빠집니다. 부모님이 그동안 소, 개, 흑염소를 두루 섭렵하시다가 올해에는 닭을 키우십니다. 백봉오골계, 청계를 키우시며 청란을 판매하신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농촌에서 최소한의 생활을 할 수가 없으니 올해도 청양고추 3,500주를 심으신다고, 밭을 다 갈아놓으셨습니다.
밭에 비닐 씌울 때 와서 도와드린다고 해서 이번에 다시 간 겁니다. 연휴 기간이라고 차가 막혀서 돌고 돌아 네 시간이 넘게 걸려 왔더니, 산본 사는 여동생이 아들과 일찍 와서 이미 다 씌워놓았더군요. 늘그막에는 역시 딸이 있어야 하나봅니다. 그래서 그 밭에 고라니와 멧돼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빙 둘러 그물을 치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뭔가 일을 엄청 시킬 것 같이 부르셔서 큰맘 먹고 가지만 도시에서 바쁘게 사는 아들 내외가 안스러우신지 언제나처럼 '나머진 내가 슬슬 하면 돼, 이제 그만 들어가'로 마무리를 하십니다.
몸이 전 같지 않으셔서 자주 편찮으시고 넘어지시기도 하니 힘들어 올해까지만 농사를 지으시겠다고 하십니다. 태어나면 자라고 늙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니 그저 그 안에서 매순간 행복하면 그게 복이려니 생각합니다. 다행히 두 분은 무척 행복하다십니다.
이모저모
지난 주일에 시범적 예배 재개를 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인하여 중단되었던 예배당 현장예배를 지난주에 시범적으로 재개하였습니다. 원래 교인이 많은 게 아니다 보니 시범적이라고 해도 오실 분들은 거의 다 오신 것 같습니다. 정부의 방역 지침에 따라 의자 간격을 벌려놓았고 설교자는 물론 모든 분들이 마스크를 쓰셨습니다. 물론 입장하실 때 체온계로 온도를 재고(체온계 빌려주신 민지애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명단을 작성하였고요. 입원 중이신 분과 아이들이 있는 가정, 가족 모임이 있는 가정은 못 오셨지만 설교하신 박성중 목사님 가족이 오셔서 모두 열세 명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오랜만에 모여서 그런가, 마스크를 쓰고 계셔서 그런가, 분위기가 좀 엄숙한 느낌이었습니다. ^^
고민을 많이 했는데 결국 예배 후에는 공동식사를 하였습니다. 멀리서 오신 분들이 계신데, 돌아가시는 길에 혹시라도 기진할까 걱정하신 예수님의 마음으로 간단하게 카레를 준비하여 맛있게 먹었습니다. 거리를 유지하며 마주 앉은 식사 풍경이 좀 낯설기는 하였습니다. 가을에 다시 코로나가 유행할 꺼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다행히 현재는 좀 진정이 되는 분위기입니다. 재개된 예배가 다시 중단되는 일 없이 잘 이어지면 좋겠습니다.
악의적 북한 관련 가짜뉴스 생산과 유통을 중단하라!
미국과 일본, 한국의 보수언론과 국회의원 당선자들이 만들고 유통시킨 북한 김정은 위원장의 사망설 혹은 건강이상설이 가짜뉴스로 판명되었습니다. 김 위원장의 최근 20여 일간의 행보가 확인되지 않자 미국 CNN이 사망설 혹은 위독설을 보도하였고 이에 탈북민 출신 국회의원 당선자 태구민, 지성호가 "혼자 일어설 수도, 제대로 걸을 수도 없다는 점 한 가지는 분명하다." "김 위원장의 사망을 99%로 확신한다. 다음 주 즈음에 사망을 발표할 것이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난 2일 북한 관영매체 '조선중앙통신'이 1일에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김 위원장의 모습을 공개하면서 '북한 내 특이 동향은 없다'는 정부의 발표가 옳았음을 증명하였습니다. 한국은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이기에 북한 관련 소식이 정세를 악화시키고 국민을 혼란에 빠뜨릴 우려가 있음에도 일부 세력이 정치적 목적으로 가짜 뉴스를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시도입니다. 더 이상 북한관련 가짜뉴스를 악의적으로 생산 유통하는 일을 방치해서는 안 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한반도의 분단은 극복되고 치유되어야 함에도 분단으로 이익을 얻고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려는 악한 세력들이 가짜뉴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며 선동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한반도 평화에 대한 분명한 선택을 하게 하시고 평화의 하나님께서 혼란과 대결의 대가로 이익을 얻으려는 이들을 심판하십시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따로 붙들고 "주님, 안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하면서 예수께 대들었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24 그 때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오너라. 25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 26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이득이 있겠느냐? 또 사람이 제 목숨을 되찾는 대가로 무엇을 내놓겠느냐? 27 인자가 자기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자기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터인데, 그 때에 그는 각 사람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 줄 것이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마태복음 16:21-28(새번역)
모든 생명은 반드시 ‘변화’합니다. 살아있으면서 변화하지 않는 생명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비록 겉으로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 같은 존재도 시간을 가지고 세세히 살펴보면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는 살아있다는 것의 또 다른 증거입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진행되는 변화 중에서도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애벌레가 번데기로 변하고, 번데기가 나비로 변화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그저 겉모양의 변화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이전으로 되돌아 갈 수 없는 완전한 질적 변화를 포함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결정적인 생명의 변화를 ‘변태’, ‘진화’, ‘성숙’, ‘회심’, ‘성불’ 등 다양한 용어로 표현하기도 합니다.
소설 데미안에서는 이 같은 변화를 알의 껍질을 깨고 새로운 세상에 나오는 병아리에 비유합니다. 그 동안 나를 가두고 있었던 껍질을 파괴해야지만 새로운 세상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스스로 깨고 나오는 ‘그 때부터’가 비로소 새로운 세상의 시작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삶이 변화하는 두 번의 분깃점이 등장합니다. 이 분깃점을 기준으로 예수님의 사역은 점점 더 깊어지고, 치열해집니다. 이 치열한 변화야 말로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만들어 가는 출발점입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기 시작하셨다.” (마태복음 4:17)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하며,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해야 하며,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태복음 16:21)
마태복음 4장에는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이겨낸 예수님의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광야에서 홀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기도하였으며, 자신의 내면에 자리한 사탄의 존재와 씨름했던 예수님은 그 때, 세례자 요한의 체포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탐욕과 악한 기운으로 가득 찬 세속적인 삶의 방식이 싫어서 성읍을 빠져나와 광야로 피정했던 예수는 다시 마을로 돌아 갈 것을 다짐합니다. 성서는 이 경이로운 예수운동의 분깃점을 이런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예수의 결정적인 첫 번째 변화는 여기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마을로 돌아온 예수는 ‘그 때부터’ 공동체를 이루어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기적과 치유의 사역을 펼쳐나갑니다. 또 불의한 권력에 저항합니다. 가는 곳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귀신들린 이가 치유되며, 범죄 하던 이들을 회개케 하는 희망의 운동. 예수운동은 절망스러운 풍경으로 가득 차 있던 ‘갈릴리’라는 지역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나갑니다.
오늘의 본문인 16장은 예수공동체의 또 다른 분깃점입니다. 가는 곳마다 승승장구하던 제자들에게 오늘 예수께서는 죽음과 부활을 처음으로 예고합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함께 십자가를 질 것을 요구하십니다. 갈릴리에서의 엄청난 성과를 뒤로하고 예루살렘으로 험난한 죽음의 여정을 떠나자고 하시는 제안입니다. 광야에서 마을로 갈 때는 혼자의 몸이었지만, 이제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예수의 결단은 한층 더욱 쉽지 않습니다. 심지어 수제자인 베드로와는 멱살잡이까지 하는 극심한 갈등상황까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쉽지 않은 새로운 시작을 향한 결단이 선포되는 이 장면을 성서는 이런 표현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그 때’부터 예수의 공동체는 껍질을 깨고 나와 전혀 새로운 존재로 살아가는 성체의 모습으로 변모합니다. 예수께서 어떻게 세상을 구원할 수 있었을까? 되돌아보면 ‘그 때’에 변화를 거부하지 않고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껍질 안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그 때’는 언제입니까? 우리에게 변화를 기대하시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때’ 말입니다. 당신은 그 때를 아십니까?
15
수보리여, 만약에 착한 남자와 착한 여자가 있어 아침에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많은 몸으로 널리 베풀고, 대낮에 다시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많은 몸으로 널리 베풀고, 저녁에 또한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많은 몸으로 널리 베풀어, 이렇게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 겁을 몸으로 널리 베풀어도, 만약에 다시 한 사람이 있어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스르지 않으면 그 복이 저보다 많을 것인데, 하물며 베껴서 몸에 지니고 읽으며 남을 위해 풀어준다면 어떠하겠느냐?
須菩提여. 若有善男子善女人이 初日分에 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고 中日分에 復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고 後日分에 亦以恒河沙等身으로 布施하여 如是로 無量百千萬億劫을 以身布施라도 若復有人이 聞此輕典하고 信不下逆이면 其福이 勝彼리니 何況書寫受持讀誦하여 爲人解說이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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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말하는 보시布施는, 중생을 교화하는 법시法施를 뜻하는 것으로 읽는다.”(王日休)
0(zero)을 숫자로 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리 큰 수도 0보다 클 수 없고 아무리 작은 수도 0보다 작을 수 없다. 그러므로 숫자의 크기를 0에 견주어 말할 수는 없는 일이다.
몸으로 널리 베푸는 일은 아무리 오래 많이 해도 결국 꿈속에서 하는 일이다. 다만 헛되고 헛될 따름이다. 경經을 받아 지니고 읽는 일은 꿈에서 깨어나는 일이다. 꿈에 아방궁을 수백 채 지니는 것보다 깨어나서 초가 삼간에 살 일이다. 이것과 저것은 나란히 놓고 견줄 상대가 못 된다.
“하루에 세 번씩 갠지스 강 모래알처럼 많은 몸으로 널리 베풀면 헤아릴 수 없는 복을 받겠지만 그것이 다 세간世間의 복이다. 세간의 복을 받는 자는 번뇌의 인因에 물들고, 이로 말미암아 악을 짓게 된다. 이 경전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스르지 않으면 이로써 좋은 뿌리(善根)를 심는 것이다. 좋은 뿌리가 아미 심겨졌으니 날마다 자라서 세월과 함께 무성해진다. 이는 곧 출세간出世間의 복이다. 앞의 것에 견줄 바가 아니다. 그 복이 저보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王日休)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 드는 일에 경황이 없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주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누가복음 10:38-42)
그렇다.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하지 않아도 될, 하지 말아야 될 수 많은 일에 쓸데없이 분주하여 한 가지 필요한 일을 놓치고 마는 중생이 있어서, 오늘도 [금강경]은 존재 이유가 충분하다. 다만 그 필요한 한 가지가 만사 젖혀 두고 경이나 외면서 눈뜬 맹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언젠가, 무릎 위에 성경을 펼쳐 놓고 그 ’말씀‘을 옆사람에게 해설해 주느라고 바로 자기 앞에 비틀거리며 서 있는 노인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는 여자를 전철에서 보았다. 그토록 민망한 꼬라지라니!
세상의 즐거움과 흥분, 모험을 찾아 한 평생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사람이 있었다. 그가 해보지 않은 일이라고는 없을 정도로 온갖 일을 다 했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의 전선에서는 구급차 운전병으로 일했다. 그리스와 터키 전쟁에서는 종군기자로 일했으며, 아프리카에서는 사냥꾼이 되어 사자와 코끼리를 사냥했다. 쿠바에서는 군수 공장을 경영하는 사업가로 수완을 발휘하며, 틈틈이 바다낚시를 즐겼다. 파리에서는 특파원으로 일했으며, 파리와 스페인을 무대로 한 작가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탄 비행기가 두 번씩이나 추락했지만 살아남았으며, 세 번 이혼하고 네 번 결혼했다. 그가 쓴 한 소설 작품의 첫 머리에는 이런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 말라 얼어붙은 표범의 시체 하나가 나둥그러져 있다. 과연 표범은 그 높은 산봉우리에서 무엇을 찾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마침내 195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작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나이 62세가 되던 해인 1961년 7월 미국 아이다호의 자택에서 그가 애용하던 사냥총으로 스스로 생명을 끊었다. 자신이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그는 정상의 산봉우리에서 쓰러져 피 흘리는 표범의 운명이 된 것이다. ‘킬리만자로의 눈’,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노인과 바다’등의 수많은 명작을 남긴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이야기이다.
이 세상에서 찾아낼 더 이상의 기쁨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은 허무이며 죽음입니다. 온 세상을 찾아다녀도 영원한 만족과 기쁨은 찾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은 오직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차지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한일서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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