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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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두 개의 행렬

성경 ; 마가복음 11,7-11
7 제자들이 그 새끼 나귀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등에 걸쳐놓으니, 예수께서 그 위에 올라 타셨다. 8 많은 사람이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다 폈으며, 다른 사람들은 들에서 잎 많은 생나무 가지들을 꺾어다가 길에다 깔았다. 9 그리고 앞에 서서 가는 사람들과 뒤따르는 사람들이 외쳤다. "호산나!" "복되시다!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10 "복되다! 다가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더 없이 높은 곳에서, 호산나!" 11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는 거기서 모든 것을 둘러보신 뒤에,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다니로 나가셨다.


들어가며 :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하고 큰 축제인 부활주일을 한 주일 앞두고 있습니다. 부활주일이 인간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인간의 궁극적인 한계인 죽음의 문제를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을 기점으로 우리는 부활과 영생을 꿈꿀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의 극복을 위한 과정은 우리들 대부분 원치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비난과 고난과 비아냥과 저주, 그리고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종려주일을 보내고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십자가 고난의 의미를 깨닫고 십자가 죽음을 통한 부활의 산 증인이 되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종려주일에 예수님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가는 예수의 행렬 앞에서 사람들은 환호하며 왕에게나 해줄법한 환영과 찬사를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면서 여전히 예수님이 인기 있는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합니다.
1962-1970년에 활동했던 영국의 4인조 록그룹 비틀즈의 멤버인 존 레논은 1966년 어느날 ‘나와 나의 비틀즈 멤버들은 예수보다 훨씬 더 인기가 높다’는 악명 높은 말을 했습니다. 하긴 그 당시를 보면 존 레논은 비틀즈를 향해 환호하고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가는 젊은이들에 둘러싸여 있었던 반면 교회에서는 예수와 가깝게 되기를 열렬히 원하는 십대들의 무리를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그 말이 사실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에 오늘날이라면 비틀즈가 그런 말을 함부로 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있어서 누가 더 인기가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증명해주기 때문입니다. 구글이라는 검색사이트에 들어가서 예수와 비틀즈를 쳐보면 두 단어에 대한 검색역사를 비교하여 한 눈에 그래프 형태로 보여준다고 합니다. 요즘 거기에서 검색해보면 비틀즈가 예수의 반밖에 안 된다고 합니다. 비틀즈의 멤버 중 절반이 죽었고 음반도 새로 발표하지 못했지만 예수는 아직도 가장 많이 읽히는 책의 주인공이고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아직도 살아서 활발하게 활동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오늘날 인기 있는 분 중에 가장 유력한 분임이 분명하고 특히 종려주일을 생각한다면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찌르는 것 역시 분명합니다.

최초의 종려주일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여리고에서부터 예루살렘 가까이 온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은 유월절을 축하하기 위해 거룩한 도시에 모인 4만-20만 명의 순례자들 틈에 어우러졌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 이스라엘의 축제인 유월절은 한편으로는 가장 긴장이 고조되는 때이기도 하였습니다. 유월절이라는 것이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축하하는 일종의 독립기념 축제입니다만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에 있었으니 약이 오를만도 하지요. 축제이지만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독립의 염원을 발산할 기회이기도 하여 유월절 동안에는 실제로 폭동과 봉기가 아주 흔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당국은 유월절 축제가 벌어지는 주간에는 군대를 예루살렘에 주둔시키고 성전과 그 주변을 철통 같이 감시했습니다. 이때 즈음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두 개의 행렬, 즉 빌라도의 행렬과 예수의 행렬을 목격하였을 것입니다.

서쪽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들어온 로마총독 본디오 빌라도의 군대행렬은 무력으로 축제기간 동안의 봉기를 억지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요세푸스라는 유대인 역사가의 기록을 보면 빌라도는 로마군대를 밤에 몰래 이동시켜 군사 규범들과 황제의 흉상을 성전에 갖다 놓게하여 이스라엘 사람들의 감수성을 도발하였다고 합니다.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을 따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교활동을 하는 신성한 성전에 그것을 갖다 놓았으니 그 결과야 불을 보듯 뻔했겠지요. 빌라도는 군대를 시켜 강제해산하려고 하였지만 유대인들은 비폭력 저항을 하면서 연좌시위를 하고 그들의 목을 칼 앞에 스스럼없이 내놓는 사태가 발생하고 나서야 성전 안의 흉상과 군대규범을 제거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예루살렘을 위한 수로 공사에 성전기금을 사용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을 문제 삼아 항의하는 이스라엘 군중들 틈에 위장한 군인들을 뒤섞어 놓고 있다가 신호에 따라 그들이 곤봉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이 일로 많은 검색수를 기록하기는 했을테지만 인기는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시 동편으로부터 계획된 또다른 행렬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나귀 새끼 한 마리를 얻어 그것을 올라타고 예수님은 올리브산으로부터 예루살렘성의 금문에 이르는 가파른 실을 ‘호산나’하고 외치는 군중들과 함게 내려갔습니다. 호산나는 ‘구하여 주십시오’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인데 여기서는 찬양의 감탄사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새끼 등에 얹었고 행렬이 지나가는 길 위에 그들의 겉옷과 주변의 나뭇가지를 꺾어 펼쳐놓았습니다. 이는 왕의 면전에서나 행해지는 환영의 관습이었습니다. 이런 환영의 행동은 빌라도의 행렬을 향해서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인기차트 최고의 정점을 기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아침을 지내면서 기억해야 할 것은 폭력적이고 강력한 제국의 이미지와 평화롭고은혜가 충만한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가 서로 비교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이 했던 행렬은 스가랴 9장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철저하게 기획된 행렬입니다. 스가랴의 예언에 나오는 왕은 백성들의 기쁨의 함성을 받으며 예루살렘으로 들어서고 있는데 그는 의기양양하고 이미 승리를 거둔 듯한 인상을 풍깁니다. 그는 겸손하여 군마가 아닌 나귀를 타고 입성하며 예브라임의 병거를 없애고 예루살렘의 군마를 없이실 분으로 묘사됩니다. 대량파괴의 무기를 사용하는 정복적인 영웅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위해 겸손과 정의와 평화를 가지고 군대의 힘을 깨뜨리실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 왕은 또 군인들이 메고 있는 활을 꺾어 버리시고 뭇 민족에 평화를 선포하실 것이라고 스가랴는 분명히 예언하고 있습니다(슥 9,10).

빌라도의 행렬이 사람들을 지배하고 억누르는 힘, 세상을 통치하는 제국의 영광을 상징한다면 예수님의 행렬은 예수님의 치유사역, 그의 복음의 메시지, 그리고 로마제국에 의해 십자가에 달린 그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하나님이 가져오고 계신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나라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빌라도가 대표했던 제국의 힘은 그 지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었습니다만 오늘날에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전혀 예수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나 같은 세력이지만 새로운 단어와 경쟁해본다면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집니다. 지위, 권력, 힘, 군대의 무력, 강제와 탄압정치로 대표되는 제국의 세계관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승승장구하면서 위세를 자랑합니다. 단지 단어만 로마에서 새로운 국가명으로 바뀌었을 뿐입니다. 특히 미국 문화에서 두드러진 개인적인 평안과 안전, 자기 이익과 부에 대한 갈망이 대표적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아메리칸드림을 쳐보면 아메리칸 드림이 큰 차이로 이깁니다.

우리는 예수를 숭배하고 환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걸었던 고난과 희생의 종이 되는 그 길, 궁극적으로는 세상의 구원으로 통하는 그 길을 따르겠다는 결단과 준비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려주일에 그리도 힘차게 나뭇가지를 흔들어대던 사람들이 금요일에는 흔적도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습니다. 예수님을 성전과 제국의 권력자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준 채로. 그들은 조심스럽게 인기순위를 비교해보다가 예수의 길보다는 안전한 자기보존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기껏해야 혹은 최악의 경우 몹시 불편하고 부담스러운 일이 되는 때에 우리도 그들과 똑같은 선택을 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학교에서든, 직장에서든, 혹은 가정에서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종종 급속히 추락한 혹은 전혀 인기 없어졌음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철저한 복종을 통해 온 세상에 희망과 구원을 가져오기를 갈망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혼자 인기를 얻으려고 안달한 것이 아닙니다. 온 세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즉 보다 거룩하고 고상한 방향으로 고양시키기를 원했습니다. 결국 바울의 빌립보서 2:10-11의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말씀대로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의 의미를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나가며 : 장황하게 얘기가 전개되었지만 결론은 매우 간단합니다. 우리는 빌라도의 행렬, 힘과 권력, 폭력과 공포를 무기로 하는 제국주의적 행렬에 가담할 것인가, 아니면 고난의 길, 섬김과 희생의 길, 그리고 죽음의 길이지만 결국 부활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승리하는 예수님의 행렬을 따를 것인가 입니다. 종려주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선택입니다. 그냥 예수를 인터넷 상의 인기검색어 정도로만 인정할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를 것이냐 하는 것 중의 선택 말입니다. 마리아가 그랬듯이 여러분들도 좋은 것을, 영원히 빼앗기지 않을 것을 선택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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