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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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 여자가 잘 해야 합니다

성경 ; 요한복음 12,3-7

3 그 때에 마리아가 매우 값진 순 나드 향유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 발을 닦았다. 온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다. 4 예수의 제자 가운데 하나이며 장차 예수를 넘겨줄 가룟 유다가 말하였다. 5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 6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가 아니다. 그는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 7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 날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들어가며 : 며칠 초여름 날씨처럼 따뜻해서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도 봤습니다. 그런데 이제 비가 오면서 기온이 떨어지고 주중에는 0도까지 떨어질꺼라고 합니다. 내놓았던 화분을 지난번 추위에 다시 들여놓았다가 날이 너무 좋아서 또 낑낑대며 내놓았는데 다시 들여놓아야 하려나 봅니다. 이것만 봐도 인생은 굽이굽이의 연속입니다. 좋은 일이 있는가 하면 나쁜 일도 있고 기쁜 일이 있는가 하면 또 슬픈 일도 닥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모든 일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크신 뜻을 발견할 줄 알고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 자리에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하는 이들에게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믿음이 충만하게 함께 하시기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3월은 여성의 달로 정했습니다. 여성이라는 단어가 인류사회에서 사용된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기는 여성의 참정권, 투표권 행사도 채 10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수천 년 인류 역사에서 여성이 사람 대접을 받은 것이 최근의 일입니다. 옛날 이집트에서 발견된 문서, 일 때문에 멀리 떠나갔던 노동자 남편이 아내에게 쓴 편지글이 발견되었는데 거기에 보니 곧 태어날 아이가 사내아이면 그냥 키우지만 딸이면 내다 버리라고 쓰여 있습니다.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지만 실제로 역사에서는 이런 일이 무자비하게 행해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정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여성에 대한 폄하가 자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여성과 남성이 대립해서 싸우고 대결하는 구도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여성의 여성됨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여성의 여성성이 고작해야 노동력인 아들을 얼마나 잘 낳는가, 남성의 성적인 욕구를 얼마나 잘 채워주나, 집안 살림을 얼마나 잘 하는가, 얼마나 남성에게 잘 순종하느냐로 평가되어 왔습니다. 여성의 미덕은 남자와는 크게 달라 순결, 순종, 다산, 생활력 등으로 꼽았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도 역시 여성을 그런 역할로만 봐왔습니다. 심지어 성경도-이 부분은 사실 후대의 첨가구로 판단되지만- 여성은 교회에서 입 다물고 조용히 봉사나 잘 하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사실 예수님의 생각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성을 특별히 여성으로 보지 않고 인간으로 보셨습니다. 그래서 남성들에게 하셨던 것과 똑같이 만나서 대화하고 식사를 함께 하고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사마리아여인과의 관계가 그랬고 마리아와의 관계도 그랬습니다. 수많은 여성을 고치시고 위로해 주셨습니다. 연전에 인기를 끌었던 ‘다빈치코드’라는 책에서도 예수의 가장 사랑하는 제자가 여자, 마리아였다는 주장으로 이야기를 풀어갈 만큼 예수님은 격 없이 여성들을 대하시고 가까이 하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평등사상이 초대교회가 세워지고 얼마 되지 않아 무시되고 거부된 것입니다. 그것은 남성이 교회의 주도권을 쟁취하고 남성중심적으로 교회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남성의 주도권이 기독교사상의 본류인 예수님의 말씀까지도 거부하고 부인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개탄스러운 일입니까! 사실 나도 남자이지만 남성의 생각이라는 것이 대부분 힘과 완력에 의존한 것입니다. 남성이 역사의 중심에 선 것은 힘과 완력으로 여성을 밀어내고 모계사회를 부계사회로 재편한 것입니다. 그래서 남성이 주도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전쟁과 파괴 등의 무력적 시위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교회, 기독교가 십자군 전쟁, 마녀사냥, 오늘날의 이라크전쟁까지 갖가지 명목으로 끊임없이 파괴와 전쟁을 일삼는 것은 복음적이지도 않고 남성이 주도하는 한계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면서 세 번에 걸쳐 제자들에게 예언을 하십니다. 그런데 남성 제자들의 반응은 영 시원치 않습니다. 심지어 수제자라던 베드로는 예수님께 항의하면서 ‘그럴 수 없다’고 덤볐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바로 체험하고서도 배에 빵을 싣지 않아서 전전긍긍하는 제자들의 모습은 예수님의 심중을 알지고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못하는 증거입니다. 그러면서 누가 제1인자인가, 누가 예수님의 오른 쪽 자리에 앉아야 하느냐로 다툼을 벌이는 것이 복음서에 나와 있는 제자들의 현 주소입니다.


그러나 오늘 읽은 말씀의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의 길을 기어이 가시는 이유를 알고 그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유향을 준비하여 예수님의 가시는 길,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준비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무슨 생색내기도 없었고 무슨 폭력이나 다툼, 분쟁도 없었습니다. 그저 조용히 와서는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향긋한 내음이 온 방에 가득 찼습니다.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그 행위에는 위로와 격려와 지지와 용납,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남성의 반응은 가룟 유다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그 비싼 것을!’ 계산이 앞섰고 질타가 뒤이었고 분노가 터져나왔습니다. 조용한 섬김의 행위가 폭력과 무력적인 질타, 탐욕으로 짓밟힌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가룟 유다, 즉 남성의 반응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마리아의 행위를 칭찬하시면서 그 행위가 복음이 전해지는 곳이라면 꼭 전해져서 기념이 되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세계는 새로운 지도력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파괴와 전쟁, 다툼과 힘자랑의 패러다임에 지친 나머지 위로와 격려, 포용과 사랑의 패러다임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서 여성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여성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만 봐도 이 시대가 얼마나 여성성, 모성애에 갈급한 지를 잘 보여줍니다. 여성이 국가의 통치수반이나 요직을 차지하는 일이 빈번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박근혜 씨도 정치적인 입지가 매우 중대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박근혜 씨를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독재자요 폭군이었던 아버지의 후광을 힙 입어 오늘의 지위를 차지한 것이나 정치적으로 수구적인 역사적 반동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배신과 다툼, 실력행사와 완력이 판을 치는 정치판에서 어머니 육영수 씨의 생전의 부드러웠던 모습이 투영된 박근혜 씨의 모습 역시 부드럽고 푸근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이 시대가 여성성이야말로 미래적 대안으로 인정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회도 여자가 잘 해야 삽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위협적으로 꾸중하는 아버지 상의 하나님을 너무나도 강조해왔습니다. 그러다보니 교회가 사랑과 용서의 공간이 아니라 정죄와 꾸짖음의 공간이 돼왔습니다. 많은 이들이 이런 교회의 모습에 실망하여 교회를 뛰쳐 나갑니다. 불행하게도 사랑과 자비를 실천해야 할 교회 안에서도 폭력과 완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지금 감리교회 안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비단 감리교회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제 교회는 달라져야 합니다. 엄하신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라 자상하고 다정다감하시며 자식을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기도하시는 어머니 하나님의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여자가 잘 해야 한다는 말은 여자가 잘못했기 때문에 잘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남성들이 망쳐놓은 것을 회복하고 치유할 수 있는 것은 여성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여성들이 더 많이 사랑하고 더 많이 포용하고 더 많이 헌신할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다워질 수 있을 것이고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머리로 한 교회로 바로 서는 전제조건이 될 것입니다. 거기에는 또다시 옥합을 깨뜨리는 자기희생이 있어야 하며 남성들에게 비아냥과 협박을 받는 위험도 포함됩니다. 그러나 그 헌신은 반드시 온 방안을 가득 채운 향유의 향기처럼 세상을, 교회를 변화시키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지지를 받을 것이 확실합니다. 교회에게 있어 여성이 미래입니다. 여성이 희망입니다. 파헤쳐져 상처입고 아파하는 자연 생태계도 여성의 부드러운 손길의 쓰다듬음을 필요로 합니다. 이제 여성성이 교회에서 새롭게 주목 받아야 하며 새롭게 주목 받을 수 있도록 여자들이 잘 해야 합니다.

 

나가며 : 예수님은 폭력과 물리력보다는 사랑과 자비, 부드러운 위로와 쓰다듬음을 더 선호하셨습니다. 그 자신이 그렇게 사람들을 만나셨고 위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남성보다는 여성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리고 남성은 도무지 못 알아들을 때 여성은 알아듣고 예수님의 요청에 응답하였습니다. 교회의 미래는 여성에게 달려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사는 길도 여성에게 달렸습니다. 여성이 잘해야 합니다. 여성의 여성성을 통해 교회를 회복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우리 여성 성도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고 여성을 존중하며 여성성의 개발을 위해 함께 기도하는 남성 성도들이 되시기를 우리 주인이자 친구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부탁하며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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