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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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8일 성령강림절 제8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변태를 위하여'

이관택

본문: 사도행전 9장 1~9절

1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면서, 살기를 띠고 있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마스쿠스에 있는 여러 회당으로 보내는 편지를 써 달라고 하였다. 그는 그 '도'를 믿는 사람은 남자나 여자나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묶어서,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는 것이었다.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오늘의 말씀 제목은 ‘변태를 위하여’입니다. 참 도발적인 제목이지요. 여러분은 ‘변태’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먼저 떠오르십니까? 약간 음흉한 그런 눈빛을 지닌 채, 여자 속옷이나 훔치려 드는 사람들을 변태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또 요즘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자행되는 성범죄들이 잇따르고 있는데, 그런 짐승 같은 놈들을 비판할 때, 흔히 ‘변태 성욕자’라는 말을 쓰더군요. 혹은 소위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 예를 들어 동성애자나, 남자인데 여자같이 옷을 입었다던가, 말투나 몸짓을 여성스럽게 하고 다니는 사람, 이런 이들을 성적 소수자라고 하는데요. 어떤 사람들은 이 성적 소수자들을 ‘변태 같다’라고 비꼬기도 합니다. 하여간 ‘변태’라는 단어가 우리에게는 그렇게 긍정적이고, 밝고, 이 사회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해 갈 수 있는 아름다운 단어로 들리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變態-변태’라는 단어는 실제로 그렇게 부정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한자로 풀어보면 變(변할 변), 態(모습 태) 다시 말해, ‘변하여 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사전을 살펴보니 변태는 보통 “동물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큰 형태 변화를 거쳐서 성체가 되는 현상”을 뜻하고 있는데, 곤충, 양서류, 어류, 절지류, 갑각류 등등 많은 생명들이 ‘변태’라는 과정을 통하여, 성장하고 성숙하며, 자연의 순리 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의 몸과 존재를 변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삶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변화’를 겪게 됩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으면서 몸이 변하고, 마음이 변해가게 마련이지요. 내가 변해온 지난 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환경의 변화, 학습으로 인한 생각의 확장, 그것과 동반하여 일어나는 여러 가지 변화들. 또 이러한 것들을 통한 나의 인식의 변화, 그리고 신앙의 변화가 있습니다. 비단 사람만 그렇습니까? 곤충과 같은 작은 생명체도 끊임없이 변화합니다. 알에서 애벌레로 그리고 성충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 씨가 땅에 심겨진 후 줄기로 자라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 봄이 여름이 되고, 가을이 되며, 겨울이 되는 것 또한 변화의 과정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이며, 이 변화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에게 다가오는 숙명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살아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며,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곧 죽은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우리로 하여금 변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봐~” 이런 노래가 있듯이, 여러분은 지금 살아계시죠? 그럼 지금도 계속 변하고 계실텐데요. 과연 어떤 방향으로 변해가고 있습니까? 보통 외적으로는 성장하고, 내적으로 성숙해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방향은 어디를 향하고 있나요?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면 어떻습니까?

변화하는 그 과정은 때론 자연스럽게 진행이 됩니다. 하지만 때론 엄청나게 고통스러운 거부감을 동반하면서 찾아오기도 하지요. 사춘기를 지나는 청소년기를 떠올려 보십시오. 몸과 마음의 변화로 인해 괴롭고 무서웠던 기억들을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이 중에 어떠한 변화는 그 사람이 구성하는 삶을 통째로 바꿔버릴 만큼의 결정적인 변화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마치 곤충이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성충이 되는 과정과 같은 절대적인 사건으로 찾아옵니다. 아르헨티나의 한 젊은 의사가 있습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천식이라는 병이 있는 유약한 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유약한 몸과 달리 모험심이 매우 강했던 그는 친구 한 명과 남아메리카 이곳 저곳을 오토바이 한대를 타고 여행하게 됩니다. 마치 작년에 방현섭 목사님처럼 말이죠. 그 젊은 의사는 오토바이 여행을 하던 중에 곳곳에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 폭력적이고 부패가 가득한 독재정권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사람들, 1달라가 없어서 병을 치료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의사가 되는 것을 포기하고, 불의한 사회 구조를 바꾸고자 혁명가가 되기로 결심합니다. 그 사람이 누굴까요? 우리가 잘 아는 쿠바 혁명을 성공시킨 체 게바라입니다. 꼭 이렇게 극단적으로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떤 시점에서 그 전의 나와 완전히 다른 나를 만나게 된 변화의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결혼을 한다는 것, 아이를 낳는 다는 것 또한 그러한 변화의 경험이 되겠지요.

이러한 결정적인 변화를 바로 '변태'라고 얘기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버리는 이러한 변태는 다시는 알로, 또 애벌레로 되돌아갈 수 없음을 뜻합니다. 선하게 변화된 사람은 다시 악해 질 수 있지만, 선하게 변태된 사람은 다시 악하게 돌아갈 수 없습니다. 달걀이 후라이가 되거나 삶아지는 것은 달걀의 변화된 모습이지만, 달걀이 부화하여 그것을 깨고 병아리가 나온 것! 그것이 바로 변태한 모습입니다. 변태했다는 것은 존재 자체가 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함께 단순한 변화의 차원이 아니라 변태의 차원으로 우리 삶을 한 단계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고민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울의 회심 사건이 나타난 본문입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열성적으로 쫒아 다니면서 죽이기까지 했던 인물이 바로 사울이라는 사람입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라는 도시에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여러 무리와 함께 그들을 잡아다가 다시 예루살렘에 끌고 오기 위해 다급하게 달려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던 길에서 바로 오늘 본문과 같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 3 사울이 길을 가다가, 다마스쿠스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 4 그는 땅에 엎어졌다. 그리고 그는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하는 음성을 들었다. 5 그래서 그가 "주님, 누구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6 일어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을 일러 줄 사람이 있을 것이다"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7 그와 동행하는 사람들은 소리는 들었으나, 아무도 보이지는 않으므로, 말을 못하고 멍하게 서 있었다. 8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서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의 손을 끌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갔다. 9 그는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예수님을 만난 이 후, 사울은 이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던 사람이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되어서,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이제 사울이 아니라 바울이라 불리게 되었으며, 율법으로, 머리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몸으로, 그의 삶으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회심사건은 그야말로 엄청난 변화, 즉 변태 아닙니까? 예수님을 만나고 나니까 이름부터 바뀝니다. 이름이 바뀌었다는 것은 그의 존재 자체가 바뀌었다는 것이지요. 지금의 바울을 보면서 예전의 바울을 상상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변태입니다. 혹시 나비가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 모습이 되는 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지금의 나비를 보면서 예전의 애벌레를 상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떻습니까? 아니 삶을 살면서 이러한 변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혹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너 예전하고 정말 달라졌네!” 라고 이야기 하는 것 들어보신 적 있습니까? 신앙생활 한다는 것은 나의 삶의 많은 부분을 하나씩 하나씩 바꿔나가고 변태시키는 과정일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신앙적인 차원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전반에 해당되는 사항이기도 합니다.

제 경험을 예로 들겠습니다. 저는 상당히 남성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지금은 제 주변의 사람들이 군대에 간다고 했을 때 제가 그렇게 폭력적인 군대 같은 곳은 아예 가지 말고, 양심적 병역거부를 하라고 권유하기도 했지만, 저는 예전에 남자는 당연히 군대를 가야한다고 생각했고, 특별히 저 자신도 해병대나 공수부대에 갈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 여성을 보는 시각도 그저 외모로 등급을 나누어 평가하고, 여성은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내 안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각이 언젠가부터 바뀌어 집니다. 계기는 지금의 제 여자 친구를 만나면서, 또 기독교적인 세계관을 좀 더 자세히 공부하면서 이전에 내가 가진 인식이 얼마나 반신앙적이고, 폭력적이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또 그러한 삶의 태도와 시각을 바꾸기 위해 노력해왔습니다. 물론 지금도 노력하는 중입니다만, 작년에 동강으로 레프팅을 하러 갔었는데 우리 배를 인도하던 강사가 노를 저을 때 구호를 외칩니다. 그 사람이 ‘오리’하면 참가자인 우리는 ‘꽥꽥’을 해야 하고, 강사가 ‘오빠’, 하면 사람들이 ‘달려’을 해야 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노를 젓는 것이 여러 사람이 타이밍도 맞춰야 하고, 재미도 있어야 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가끔씩 ‘쭉쭉’하고 외쳤고 사람들이 ‘빵빵’이라고 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저는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며, 여성 자체를 비하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꿀벅지’라는 말과 ‘쭉쭉빵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때 강사님께 그 구호는 하지 말아 달라고 건의를 했습니다. 분위기가 안 좋아지더군요. 지금도 여성을 외모로 평가하는 말을 들으면 상당히 불편합니다. 또 저는 2006년부터 예비군 훈련에 가서 총을 쏘지 않습니다. 총을 쏘는 나의 작은 행위가 전쟁이라는 커다란 행위를 전제로 연습하고 있는 것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무엇보다, 생명과 정의와 평화의 하나님께서 전쟁연습을 좋아 하실리 만무하고,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열등한 존재로 차별하실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직도 순간순간 남성 중심적인 생각을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많은 부분 폭력적일 때가 있지요. 하지만 그 이전의 저와 지금의 저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변태'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신앙인으로서 변태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삶의 어떤 곳에서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신앙인이라면 오늘 우리가 살펴본 바울과 같이 신앙적인 변태를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떠해야 할까요? 두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번데기’ 시간을 잘 지내야 한다는 겁니다. 번데기 시간이 언제 입니까?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한 중간 단계가 바로 번데기 시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껍데기 안에서 변화를 위한 몸부림을 치는 시기 아닙니까? 겉에서 볼 때는 아무 움직임도 없는 것 같고 마치 죽어있는 듯 하지만, 그 안에서는 얼마나 힘겨운 몸부림이 있겠습니까? 그 작은 번데기 안에서 살이 찢어지고 뼈의 위치가 바뀌는 엄청난 작업이 진행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그 번데기 시간을 잘 지내면 결국엔 아름다운 나비가 되는 것이지요. 이것을 보면 번데기 시간 단순한 변화가 아니라 뭔가 조금 쓰라림이 있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변하는 데에는 이 같은 쓰라림이 필요하기도 하죠. 그래서 여성학자 정희진이라는 분은 “안다는 것은 상처 받는 것”이라고 얘기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어 쓰러진 후, 아나니아에게 고침을 받기 전까지의 3일간이 바로 이 번데기 시간에 해당됩니다. 3일간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실 기약 없는 암흑 아닙니까? 그 보지 못하는 두려움이 얼마나 컸을까요? 또한 바울은 이 기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거의 죽음을 경험한 시간이라 할 수 있지요. 이 때 바울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자신의 삶과 믿음, 그리고 신앙에 대한 모든 부분들을 살피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그 시간 얼마나 큰 고통과 쓰라림이 있었을까 생각합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부활한 것도 3일의 시간 아닙니까? 죽음도 이겨내고 새로운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 시간, 그 시간에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을 박해했던 자신을 반성하고, 새로운 삶의 자세를 끊임없이 구상하고, 하나님께 여쭤봤을 것입니다. 이 번데기 시절에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성찰’과 ‘기도’입니다. 성찰은 나를 돌아보는 것이고, 기도는 그 성찰과 하나님의 뜻을 연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40년, 예수님의 공생애 전 40일 금식기도 또한 번데기 시간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나비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 나의 체질을 바꾸고 나의 비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바꾸는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뜻에 맞는 변태, 즉 신앙적인 변태를 위해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 각 자에게 있어서 번데기 시간은 언제일까요? 누구는 3일 정도이지만 어떤 사람은 40년이 될 수도 있는 번데기 시간, 아니 매주일 하나님 앞에 묵상하는 시간이 번데기 시간일 수도 있고요. 시험이나, 결혼, 출산처럼 인생의 중요한 사건을 앞에 두고 있는 시간이 번데기 시간일 수 있습니다. 또는 나에게 있어 정말 고통스러운 시간이 번데기 시간일 수 있습니다. 그 시간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진정한 나와 대면하고, 잘못된 나를 반성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과정으로 삼는다면 분명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변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신앙적인 변태를 하기 위한 두 번째는 바로 나를 둘러 싼 껍질을 깨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전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는 공동체가 바로 이스라엘 공동체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원래 누구입니까? 이집트의 노예들입니다. 또한 그들이 이집트를 탈출해 광야생활을 하면서 그 주변의 히비루라 불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생겨난 것이 이스라엘이지요. 누가 봐도 밑바닥 인생들인 이들이 결국 하나님을 만나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의 이름을 얻게 됩니다. 또 그 젖과 꿀이 넘치는 가나안 땅을 그들의 유업으로 받게 됩니다. 그들의 노예신분!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였지만 그것이 원래 그들의 모습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소중한 존재들 아닙니까? 노예라는 것은 인간이 만들어낸 사회적으로 부과된 껍질 아닙니까?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이 껍질을 깨고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이 되는 과정입니다. 이스라엘 광야 40년의 경험은 이 껍질을 온전히 깨는 과정이고요. 그 속에서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발견하는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살펴 보십시오. 어떤 껍질이 여러분을 둘러싸고 있습니까? 신앙적으로 변태한다는 것은 그 껍질로부터 진정으로 자유해 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계획하신 고귀한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을 평가하고 규정하는 그러한 껍질로부터 벗어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어떤 껍질은 오히려 나를 안주하게 만듭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우리로 하여금 오히려 그 껍질로부터 보호받게 만들죠. 하나님이 아니라 돈의 많고 적음이 우리를 편안하게 하느냐 불안하게 하느냐의 기준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가서 무엇을 합니까?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지요. 풍요의 신인 바알의 껍질이 하나님인 줄 착각했던 것입니다. 또 그것이 편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끊임없이 나를 둘러 싼 껍질을 깨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변태를 꿈꿔야 합니다. 아까 이야기한 정희진 씨는 아는 것은 상처받는 것인데 그것은 그 동안 무지로 인해 보호 받아온 나의 삶을 돌이킨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껍질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오히려 평안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남을 죽일 만큼의 죄를 짓고도 사람이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이 무지의 껍질 때문이죠.

장 지글러라는 사람이 쓴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라는 책을 보니 하루에 평균 10만명이 굶어 죽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 이순간도 5초에 한 명씩 사람이 굶어 죽고 있는 겁니다. 이 사실이 놀랍지 않으십니까? 5초에 한 명씩 죽어가는 지금 우리가 평안할 수 있는 이유는 ‘무지’ 때문이지요.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고 하면 이 무지의 껍질을 깨야 합니다. 가만 보면 메스미디어 같은 곳에서 굶어죽는 이들의 이야기가 잘 나오지 않습니다. 열심히 일하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는 바로 이러한 무지 때문에 그렇습니다. 욥이 왜 고통을 받습니까? 가난이 왜 생겨납니까? 우리의 생각으로 함부로 평가할 부분이 아닌 것이지요. 우리는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껍질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의 개인적인 껍질을 깨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사회를 둘러싸고 있는 껍질을 깨는 것 역시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지와 신앙적인 회개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 서로를 정죄하던 신앙의 분위기 자체를 바꿉니다. 모든 사람이 예수님 안에서 한 자녀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껍질을 계속 깹니다.

바울은 번데기 시간을 잘 보냈던 사람입니다. 또 자신의 껍질을 끊임없이 깨었던 사람입니다. 우리가 좋은 만남 공동체에서 함께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이러한 변태를 위한 과정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마다 변태하는 계기가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토대로, 어떤 사람은 행복한 경험을 토대로, 아니면 오늘 바울과 같이 우연적이고 신비적인 사건을 토대로 변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변태는 절대로 1회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변태를 통해 하나님께로 가기 위한 끊임없이 치열한 노력이 뒤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이라는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 싱클레어가 자신의 껍질을 파괴하는 경험을 하며 고통스러워합니다. 하지만 껍질을 깨고 나와야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은 지금 애벌레입니까? 번데기 입니까? 나비입니까? 어찌보면 우리는 항상 번데기 시간 안에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또 우리는 껍질 속에 들어 있는 존재입니다. 신앙여정은 아마도 하나님의 품에 갈 때까지 계속 변태하고, 계속 껍질을 깨는 과정일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변화에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살아있는 모든 것은 변합니다. 가만히 있어도 변합니다. 이왕 변할 바에는 하나님의 품을 향해 적극적으로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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