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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기연(소장 김준우) 식구들의 지리산 나들이에 현지 목회자들이 여럿 모였다. 가운데 뒷편이 필자 방현섭 목사. 지리산에서 만나니 더 반가웠다. 왼쪽부터 여성훈, 김준우, 이승진, 허종, 양재성, 방현섭, 한성수, 김기석, 오현일, 김광철(얼굴은 안보이고), 한성수, 변경수 목사 등 ⓒ 이필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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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용현 목사님은 요즘 매주 월요일마다 거창에서 서울로 올라간다. 전국감리교목회자대회 때문이다. 감리교회 개혁에 목숨을 건 것이다. 거창에서 서울로 매주 왕래한다는 것이 분명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감리교회가 어찌 될 것인지... 백 목사님 부부, 박 목사 부부와 함께 점심식사를 하기로 하였다. 식사 자리에서 백 목사님 목회 이야기를 들었다. 인천산업선교회에서 일하다 탈진하여 잠수하러 거창에 내려왔다가 전혀 생각도 없이 뜻밖에 개척한 것이 대동교회란다. 그렇게 벌써 20년이 지났다고 한다. 이제 100여 명 이상이 모이는 교회로 자라났고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교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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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를 마치고 대동교회 백 목사님 사택으로 왔다. 교회 건물의 한쪽에 사택이 있다. 교회는 지붕에 걸린 십자가로 알 수 있을 뿐이다. 교회 간판이나 네온사인도 없다. 그냥 보면 도무지 교회인지, 무슨 교회인지도 알 수 없는 이상한 교회이다. 목사님이 알커피를 직접 갈아서 사이폰 방식으로 커피를 내려주신다. 서울에서 전감목대회 모임을 통해 만난 때와는 달리 말수가 적으시다. 의외의 모습에 내심 놀랐다. 내가 백목사님을 잘 몰랐고 말수도 적으신 분이 그처럼 열정적으로 감리교 개혁을 위해 일하시는 것을 깨닫고 마음이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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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의 초계중앙교회로 갔다. 초계면 면소재지의 한 귀퉁이에 초계중앙교회가 있다. 초계중앙교회의 이진용 전도사는 갑자기 들이닥친 나를 놀라면서도 반갑게 맞아준다. 이진용 전도사는 나와 마찬가지로 카투사 출신이라 학교 다닐 때부터 인사를 나누었고 그의 아내와 내 아내는 대학동기이자 절친한 친구이이다. 이런 인연으로 관심을 갖고 서로를 지켜보는 관계이다. 이진용 전도사가 무척 바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다행히 집에 있었다. 이 전도사는 목사가 5년, 10년에 할 일을 이미 전도사 시절에 다 하는 것 같다. 역동적으로 목회하는 것으로 이미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의 모습에는 피곤한 흔적이 별로 없다.
합천에서 감리교회는 이단으로 규정돼있다고 한다. 그래서 교회연합모임에도 초대 받지 못했고 보수적 교단의 항의와 시비를 받기도 하였단다. 그런데다가 노무현 대통령 서거 때 추모 현수막을 걸었다가 지역 교회들에게 찍혀 왕따를 당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어린이 도서관을 설치한 것도 시빗거리였는지 지역교회에서 와서 교회가 복음 전하는 일이나 열심히 하지 왜 이런 세속적인 일을 하느냐고 따져 묻기도 하더란다. 이 전도사는 그의 목회가 특정한 이데올로기나 사상에 경도되지 않고 중립적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나 그 지역에서는 중립이 없고 보수가 될 것인지 아니면 이단이 될 것인지의 선택만이 있었다고 한다. 초계중앙교회는 한 마디로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다.
초계중앙교회는 작년엔가 예배당 건물을 매입하였다. 예술적 감각을 살려서 잘 짓던 집이 부도가 나서 매물로 나온 것을 구입한 것이다. 공사가 완벽하게 끝난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기에는 큰 불편이 없었다. 이 건물의 반은 어린이도서관과 청소년들을 위한 자율학습공간을 개방하였고 나머지 반은 예배와 생활공간으로 사용한다. 예배당과 사택이 한 공간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다. 그러나 아직 교인이 많지 않은 상황이라 견딜만 하겠지만 계획이 있어야 할 것이다. 교인은 현재 20여명 선이라고 한다. 교인들은 귀농, 귀촌한 이들을 중심으로 모이는 것 같다. 지역의 교회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편향적이라서 초계교회의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도 있다. 한 차례의 홍역 후에 진성(?) 교인들이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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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들이 교회에 찾아와 공부를 하는데 작년에는 20여명 가까이 와서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교회에서는 매일 학생들에게 저녁식사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 일이 힘이 들었던지 사모의 몸이 단단히 망가져 버렸다. 지금은 고3 여학생 두 명이 와서 공부를 한다. 공부를 마치는 열한 시에는 이 전도사가 차량운행을 하여 바래다준다. 그러나 이 학생들은 교회에 출석하지는 않는다.
이제 곧 바빠지는 시즌이 시작된다. 주민들의 건전한 만남의 광장으로 개방한 교회당 마당 잔디밭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열리게 되는데 이를 기획하고 진행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다. 행사는 음악회, 연주회, 연극 등 다양하다. 이 행사들은 20일 정도의 간격으로 계속된다. 어떤 이들은 이 전도사의 행보를 너무 이벤트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벤트를 위한 이벤트는 아니다. 보수적 지역에서 존재를 알리는 것만도 벅찬 일일 것이다. 보수적 고신측 장로교회가 100년을 넘게 지배해온 마을에서 이단이라는 감리교회가 개척을 한다는 것 자체가 권위와 아성에 대한 도전일 것일 텐데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래도 이진용 전도사의 도전이 성공적이었는지 감리교회 내에서는 모범적 개척사례로 잘 알려져 있고 개척사례를 저예산교회 목회자들에게 소개하는 강연회에도 자주 초청된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를 원했지만 아쉽게도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시간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소심한 것 같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척 정열적이고 진취적인 이진용 전도사의 목회는 내게도 큰 도전과 귀감이 된다. 이 전도사는 내게 개척할 생각이 없느냐며 합천에 좋은 자리를 봐둔 곳이 있다며 웃는다. 그의 개척이 머지않아 귀한 열매를 거두게 되리라고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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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용 전도사 댁에서 나와 깜깜한 밤길을 달려 진주 수곡제일교회로 향한다. 찾는 길이 만만치 않은데다가 길마저 어두워 결국 헤매게 되었다. 대충 얘기를 듣기는 했지만 부근에서 헤매고 지나쳤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문득 그림 같은 집이 눈길에 스쳐 지난 것 같아서 되돌아가보니 정말 예쁘게 잘 지은 교회가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아무리보아도 수곡제일교회라는 간판은 보이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연락되니 그 교회 옆에서 한성훈 목사님이 나오신다.
정말 그림 같은 집이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교회와 사택이 한성훈 목사님 부부가 6년에 걸쳐서 지은 집이라는 사실이다. 원래는 수곡면 사무소 부근에 있었지만 지금은 고개 하나 돌아 더 안쪽으로 들어와 있다. 처음에 집을 지을 때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하였다. 집을 짓는 사람들이 와서 짓는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어 여기저기 알아본 결과 골조가 부실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시공자를 바꾸고 그동안 해 놓은 목조골조를 다 철거하였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직접 알아보고 연구하고 고민하고 물으면서 집을 짓기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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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조, 내장, 외장 등 모든 것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다듬어졌고 정교해졌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았다. 그래서 일손도 많이 갔고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러면서 교회건축에 대한 탁월한 감각도 생겼다. 많은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도 교회정서에 맞는 시공을 할 수 있다고 강조하여 말한다. 외국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예쁜 하얀 집을 지은 것은 농촌지역 주민들이 칙칙한 분위기에서 매일 사는데 주일 하루라도 화사하고 예쁜 교회 예배당에서 와서 위로 받고 쉬다 가게 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화사하고 예쁘게 짓느라고 애를 썼다.
물론 돈이 문제였다. 면소재지에 있는 교회가 건축자금이 있을 리가 없다. 한성훈 목사님은 삼천포에서 질 좋고 맛 좋은 멸치를 직접 떼다가 판매를 시작했다. 한 차 가득 싣고 서울 등 도시지역을 방문하여 교회에 멸치를 판매하여 얻은 수익금으로 건축을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그렇게 해서 6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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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성훈 목사님은 목회가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멸치도 팔고 농사도 짓고 집도 짓는다. 그리 넓은 땅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서 큰 수익을 내지 못하지만 앞으로는 수익이 될 정도의 농사를 지을 생각이라고 한다. 도회지에 살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있다. 농촌에서의 삶이 몸에 익었고 거기서 삶의 의미를 찾은 것이다. 목회에 논농사, 밭농사, 멸치장사, 지방회 일 등을 다 보는 복잡한 삶인데도 한성훈 목사님의 얼굴과 생활에 여유가 묻어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한 목사님은 앞으로 한 켠에 황토집을 더 지을 생각을 하고 있다. 서구와 동양이 건축물을 통해 조화되게 하고 싶다는 이유이다. 또 기회가 된다면 산속에 수도원을 건축해보고 싶으시단다. 그 일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날지, 실제로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집을 짓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가는 그 삶이 목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좋은 시간이었다. 문득 나도 집을 짓던 시절이 떠오른다. 한 목사님처럼 긴 시간 동안 고민하면서 지었다면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양이 되었을 텐데 너무 급하게 짓는데만 급급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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