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고민을 했다. 어디로 어떻게 갈까 하고 말이다. 나올 때는 날이 더웠는데 불과 보름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다. 유난히 추위에 약하다보니 이제 여행이 힘들어진다. 그리고 만나는 사람마다 그 만남은 반갑고 좋지만 어쩔 수 없는 직업병 때문에 나누는 이야기, 즉 목회 이야기는 머리를 더욱 무겁게만 한다. 그러니 이래저래 조금씩 지쳐가니 집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결국 여주방면으로 해서 집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여주로 들어서자 원부리라는 낯익은 이정표가 나온다. 사촌동생인 방영섭 전도사가 지금 목회하고 있는 곳이 바로 원부리교회이다. 진작 와보지 못한 미안한 마음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마을로 들어가 교회를 찾았다. 마침 방영섭 전도사가 집에 있다. 제수씨는 읍내의 어린이집에 일을 나갔다고 한다. 참 많은 젊은 목회자들의 아내들의 헌신을 먹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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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목회자들의 현실이라니 남자로써 자괴감이 적지 않을 것이다. 부임하여 예배당을 싹 수리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한 목회이다. 그러나 주중에는 읍내의 직장에 나가고 주말에는 농사를 짓는, 두 개의 직업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인 마을에서 추수 때는 더없이 바쁜 시기로 요즘은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이 확 줄었다고 한다.
얼마 전에는 사촌형 방일섭 목사, 성일교회에서 비전트립(?)을 와서 마을잔치를 벌여주고 예배당 비품 보수도 해주었다고 한다. 같은 사촌 형으로 내가 별로 해준 게 없어 미안한 마음이다. 요즘은 부근의 큰 교회에서 이 마을까지 전도지역으로 삼아 차를 돌린다고 한다.
대형할인마트와 구멍가게의 싸움이 생각난다. 상도가 떨어졌듯이 목회적 도의가 사라진 것 같다. 지역선교가 쉽지 않다고 한다. 부근의 큰 교회에 나가는 마을사람들은 전도사와 마주치면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고 한다. 지방에서는 교회 부지를 매각하고 읍내로 나오라고 권고하지만 무얼 어떻게 해야 할 지 고민만 쌓이는 표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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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당과 부속건물, 조경을 보수할 것이라는 얘기를 덧붙인다. 절대로 비난하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바라며... 결국 집만 짓고 집수리, 조경사업만 하다 나오는 것이 시골 목회인 셈이다. 하긴 시골 이야기만이 아니겠다. 나도 그걸로 버티고 있으니까 말이다. 어느 순간엔가 도시나 시골이나 예배당 부지 마련하고 집 짓고 건물 유지하는 것이 목회의 전부가 돼버린 것 같아 씁쓸하다. 힘내고 제수씨에게 안부 전하라는 인사만 남긴 채 교회를 나왔다.
조금 더 읍내 쪽으로 오다보니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어떻게 30년도 더 지났건만 이렇게 변한 게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린 시절의 많은 부분을 보냈던 삼교리이다. 내 할아버지는 감리교회 목사셨다. 할아버지는 주로 지방 농촌지역에서 목회를 하셨는데 내가 유년기 때부터 초등학교 시절까지 여기 여주, 삼교리 삼교교회에 계셨다. 내 어린 유년시절은 여기와 얽힌 기억으로 가득 차있다.
추억에 이끌려 마을 진입로로 들어선다. 집들은 조금 더 현대화되었지만 진입로이며 마을을 구석구석 휘감는 골목길은 예전 그대로이다. 삼교교회 예배당도 거의 그대로이다. 예배당 담벼락 밑에서 흙장난을 하다가 건물 무너진다며 꾸중을 하셨던 할아버지, 이제는 신축되었지만 어린 시절을 보냈던 예배당 왼편의 초가집, 밤마다 악당들에게 쫓기는 꿈을 꾸었던 예배당 옆 샛길도 그대로 있었다. 아, 옛날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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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유명하거나 대단한 부흥의 능력을 가지신 분은 아니었다, 아마도. 만약 그랬다면 그렇게 시골교회나 옮겨다니시면서 목회를 하지는 않으셨을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 할아버지는 가장 본받을만한 진짜 목회자의 모습으로 남아계시다. 항상 검소하셨고 부지런하셨으며 자녀들도 잘 양육하셨다. 가족들에게 엄하시기는 하셨지만 정이 깊은 분이셨다는 느낌이 있다.
할아버지가 손수 만들어주신 썰매며 장난감에 대한 기억도 새록새록하다. 아무튼 이제는 낡은 개념이 된 것 같아 아쉬운 청빈한 목사의 이미지를 가지신 분이 할아버지셨다. 큰 회사의 CEO 같은 목사가 좋은 목사라고 이미지화된 오늘날에 할아버지의 청빈했던 삶은 막연한 옛날의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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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는 나의 청년시절을 2년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여흥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2년을 다녔었다. 내 차를 타고 여주에 한철희 목사(지금은 미국 댈러스 신학교에서 수학 중), 이천에 신규석 목사(지금은 미국 세인트폴 대학에서 수학 중)가 함께 다녔다. 토요일에 내려가 하룻밤을 자고 주일 저녁에배를 마치면 다시 만나 서울로 올라온다. 날씨가 너무 좋은 날 토요일이면 곤지암 휴게소에 들러 ‘오늘 교회 안가고 그냥 어디론가 가버리면 어떨까’하는 얘기를 서로 했던 기억이 난다. 내려가면서 가끔씩 들렸던 곤지암 소머리국밥집, 겨울에 빙판에 미끄러져 짚차가 자빠졌던 동네 등등 많은 기억이 있는 곳이다.
여기까지 왔다가 그냥 가는 게 아쉬워 여흥교회에 다닐 때 특별히 내게 잘 해 주셨던 집사님께 전화를 했다. 직장 때문에 만날 수는 없었지만 당시에 가깝게 지냈던 청년을 찾아가 만나보라고 하셨다. 가는 길에는 당시에 중학생이었던 속 많이 썩였던 여자 청년, 이제는 스물 일곱이나 먹은 청년을 만났다.
길거리에 서서 반갑게 인사를 하고 옛이야기를 잠시 나누었다. 학원 교사인지라 아이들이 승합차를 타고 들어오자 우리의 12년 만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다. 집사님이나 청년이나 그때부터 지금까지 교회학교를 섬기고 있는데 한 목소리로 하소연 하는 것이 교육전도사 좀 구해 달라는 것이다. 여흥교회를 나온 이후에도 가끔 전화를 하셨는데 그것도 교육전도사를 구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다닐 때도 그렇지만 지금도 여전히 시골교회로 교육전도사를 나가려는 신학생은 별로 많지 않은가 보다. 지금이 좀 더 심해진 것 같다. 신학생들이 농어촌을 기피하고 도시로만 향하는 것은 참 심각한 문제이다. 꼭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신학대에 들어온 젊은이들이 모두 도시적 성공신화에 길들여진 것은 아닌가 심히 걱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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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님의 말씀대로 여주군 지적공사에 가니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청년, 아니 집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여자 청년들이 몇 있었는데 그 중에 가장 언니였고 성격도 털털했다. 그리고 나를 가장 많이 도와주었다. 그래서 참 가깝게 지냈었는데 12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 신기했다. 그때 함께 했던 청년들은 다 시집가고 여주를 떠났지만 이 집사님은 여주에 남아있다. 그는 고향을 찾은 친구들이 잘 알아볼 수 잇게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노라며 웃으며 말했다.
토요일이나 주일이면 나와 여자청년 셋이서 여기저기로 참 많이 돌아다녔던 기억이 났다. 천서리 막국수를 먹고, 충주댐에 벚꽃놀이도 가고, 중앙탑에도 가보고... 그렇게 우리는 12녅 전의 추억속에만 머무르던 서로를 지금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만큼 지적공사 사무실 테이블에 앉아 추억을 회상하다가 헤어졌다. 이 만남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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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향한다. 2년 동안 꼬박 지나다녔던 이천, 광주, 성남은 지나 집으로 오는 길이다. 그 사이 교통량이 엄청나게 늘어나 있었다. 전혀 새롭게 변한 동네도 있었다. 개발의 바람은 이처럼 길의 모양을 변화시켰다. 아마도 사람들의 마음까지 변화시켰을 것이다. 그것이 더욱 사람다운 마음일는지 아니면 사람의 마음을 잃고 동물적 본능을 갖게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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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에서 여행중인 방협섭 목사를 만나 차안에서 찍다 ⓒ 이필완 |
이로 보름간의 여행은 일단 끝이 났다. 서울연회에서 벌이는 미자립교회 세미나와 지원프로그램 때문에 안식년 휴가가 반토막이 났다.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며칠 동안은 세미나 참석하고 서류도 만들고 주위에 도움도 요청해야 하겠지만 또 며칠은 짬이 나지 않을까 기대한다. 시간을 내서 또 며칠 나갔다 올 생각은 하지만 생각같이 될지는 미지수다. 그리고 이번 여행을 정리하면서 작은교회가 교회로써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들, 젊은 목회자들이 도전해봄직한 과제들에 대해 글로 종합해볼 수 있는 여유가 있기를 바란다.
지금까지 여행 중에 급하게 쓰느라고 허접하기 짝이 없는 여행기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혹여라도 내 글로 인해 부당한 피해를 입으신 분들이 없기도 바란다. 만약 그렇다면 정중하게 용서를 빈다. 끝으로 여행 동안 진심으로 환영하고 맞아주시고 대접해 주신 동지 목회자와 그 가족 여러분, 제가 없는 동안에도 사랑화 협력으로 교회를 잘 돌보신 좋은만남교회 교우님들께 깊이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