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7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걸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다음 주일(15일)에는 강원도 인제 방인웅 장로님 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교회에서 8시 30분에 출발하겠습니다. 많이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사랑방에 비치된 하반기 공동식사 및 정리봉사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쥐뿔도 없는게 자존심만 남았다고?
인도지원 사업을 위해 평양과 개성에 오가며 북녘의 동포들을 다양한 자리에서 만날 때마다 느끼는 것은 '역시 우리는 한 핏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북녘의 사람들은 남쪽의 우리들에 비해 자존심이 매우 강합니다. 너른 벌판과 산악지대를 내달리던 고구려 기상 때문인지 모르지만 지원을 받으면서도 당당하고 자존심을 건드리는 이야기가 나오면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합니다. 남쪽 사람들은 그런 북쪽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식량문제도 해결하지 못하는 주제에 쓸데 없이 자존심만 세다"고 한 마디 합니다. 제한적인 현실에서 그들의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것이 바로 핵무기였을 것입니다. 만약 그들의 자존심마저 짓밟는다면 그들에게 무엇이 남을까요? 그래서 비핵화 협상이 더욱 조심스러울 것입니다.
북한을 보면서 인간의 자존심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북한만이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건 자존심, 자존감을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의 삶이 어떨까요? 인간이라는 존재성, 존엄성조차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엄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돈이라고 믿는 것 같습니다. 천부인권,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해도 돈 앞에서는 짓밟히고 무시되고 북한사람들을 비아냥대는 말을 똑같이 듣게 됩니다. "쥐뿔도 없는 것들이 자존심만 남아서..."
쥐뿔도 없어서 온갖 갑질을 묵묵히 견디던 사람들이 마지막 남은 자존심까지 짓밟히자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습니다. 세상에 함부로 대하고 인격을 모독 비하하며 막말을 하고 종 부리듯 해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용되고 도움을 받는다고 그 인격까지 양도한 것은 아닙니다. 단지 돈이 부족한 것일 뿐입니다. 돈이 인간의 존엄성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 땅의 수많은 기업과 크고 작은 사업장에서 노동자들이, 조국을 떠나 이 나라 저 나라 이민국 앞을 서성이는 난민들이, 단지 가난할뿐인 사람들과 북녘 동포들이 인간으로서의 자존심마저 포기할 때 세상은 진짜 지옥이 될 것입니다. 자존심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따라 지음 받는 자녀라는 증표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형상을 모독하거나 비웃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자존심은 결코 포기되어서는 안 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115년 7월 8일 "십자군을 선동했던 성직자 은자 피에르 레르미트 사망"
은자 피에르 레르미트(프랑스어: Pierre l'Ermite 피에르 레르미트, 생년 미상 ~ 1098년 혹은 1115년경)는 중세 유럽의 한 광신도로 '은(둔)자 피에르'라고도 한다. 그의 일과는 당나귀를 타고 이슬람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이었는데 성 베드로가 그의 꿈에 나타나 그런 명령을 내렸다고 주장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그를 앞세워 전쟁을 교묘히 선동, 십자군 전쟁이 일으켰다. 그런데 피에르는 엉뚱한 생각을 품고 기사 레이날도, 무일푼의 월터라는 사람들과 함께 일반 민중들을 모아서 정식 십자군보다 먼저 출발했다. 이를 군중 십자군이라고 한다. 군중 십자군은 가는곳마다 약탈을 자행하다가 헝가리 기병과 베오그라드의 중장보병에게 대부분 죽고 결국 니케아에서 셀주크 투르크 술탄 킬리지 아르슬란 1세에게 전멸당해, 피에르는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난다. 후에 1차 십자군에 합류하여 안티오키아 공방전에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찔렀다는 '롱기누스의 창'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다가 진위 여부로 재판을 받았는데 그 판결로 죽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오늘날 기독교 세계와 이슬람 세계의 극한 대립과 갈등의 원인을 십자군 원정에서 찾는 견해가 많다. 평화의 왕 예수의 이름으로 전쟁과 갈등을 선동한 기독교의 역사를 반성하고 종교간 화해를 노력해야 한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철길 | 안도현
혼
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앞서지도 뒤서지도 말고 이렇게
나란히 떠나가리
서로 그리워하는 만큼
닿을 수 없는
거리가 있는 우리
늘 이름을 부르며 살아가리
사람이 사는 마을에 도착하는 날까지
혼자 가는 길보다는
둘이서 함께 가리
제7장
성령Ⅱ (3)
3. 우리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며 완전하게 하시며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2. 완전하게 하시는 성령(3)
우리는... 완전하게 하시며... 성령을 믿습니다.
웨슬리 신학자 런연(Runyon)에 따르면, 웨슬리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서 사랑의 근거는 사람이 스스로 노력하여 성취하는 사랑이 아니고, “우리가 성령을 통하여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하나님의 사랑의 완전인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완전한 것이며, 이 사랑은 순수한 은혜고, 하나님의 형상이 되도록 부르신 사람들과 나누시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이다. 우리는 단지 완전한 사랑을 받고 그 안에 참여하는 것뿐이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 마음속에 부어지는 순결하고 완전한 사랑에 우리들이 응답하고 참여함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가득 차서 우리들의 의도가 단순하여질 때 하나님의 형상이 새롭게 회복된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우리를 거듭나고, 거룩하고,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다.
3.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
우리는... 위안과 힘이 되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요한복음 14:26) 여기에서 성령 하나님은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고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분으로 보혜사(保惠師)로 표현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는 것은 성령 하나님이 성자 하나님을 돕는 측면이므로 수동적이라 할 수 있지만, 모든 것을 가르치시는 측면은 능동적이라 할 수 있다. ‘보혜사’는 그리스어로 ‘파라클레토스’(παράκλητσς, parakletos)이며 이 단어는 ‘~를 도와 구원해 주기 위해서 옆에 서 있는 자’라는 수동적 의미가 능동적인 의미와 결합되어서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해주고 그 죄의 잘못을 인식시켜 주는 자’를 의미하기도 하고, 상담자로서 ‘다른 사람을 권고하고 강건케 하며 위로해 주는 자’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와 같이 ‘파라클레토스’는 ‘옆에 서 있는 자’와 ‘강건케 하며 위로하는 자’라는 수동적이면서 능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으므로 한국어 성경들은 ‘파라클레토스’를 다양하게 번역한다. 개역개정과 표준새번역은 ‘보혜사’로 번역하지만, 공동번역은 ‘협조자’로 번역한다. 영어성경들도 다양하게 번역한다. KJV에서는 ‘Comforter’(위로자)로, NIV에서는 ‘Counselor’(상담자)로, NASB에서는 ‘Helper’(돕는 자)로 번역하고 있다. 결국 보혜사는 ‘위로하시는 분’이라는 의미와 ‘강하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 3조는 성령 하나님을 ‘위로와 힘이 되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로마서 8장 26절에 보면,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우리는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성령 하나님은 우리들이 슬픈 일을 당하거나 고난을 당하여 괴로워 때 위로하여 주시는 분이며, 우리들이 시험에 들어서 쓰러지고 넘어져서 힘들어할 때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이다. 감리교인은 참다운 위로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찾아야 하고, 참다운 힘과 용기를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발견해야 한다. 진정한 위로와 힘의 근원이 보혜사 성령 하나님에게 있기 때문이다.
우리와 함께하시는 성령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동일하신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심을 넘어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를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로 인도하셔서 완전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감리교인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화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도달하는 것을 삶과 신앙의 푯대로 삼고 살아가야 한다.
(3) 수요일 편년체*, 2018.7.4.
6:00
○ 부산, 포항, 울산, 남해에 태풍 ‘쁘라삐룬’이 지난다는대 네모 창에 앉은 하늘엔 구름조차 없다. 구름을 한참 기다렸다. 구름을 이유로 좀 더 누울 수 있다.
○ 간밤에 더웠나 보다. 식은땀일까? 티셔츠가 눅눅하다.
6:27
○ “코다(coda) 안녕. 코다야 일어나자.” 스마트키의 열림을 누른다. 자동차키를 돌린다. 사이드미러를 편다. 안전벨트를 맨다. 여기까지는 반복이다.
○ 이사코프(Gregory Alan Isakov)의 『웨더맨(weatherman)』 앨범 폴더로 들어가 「‘O' City Lights(오’ 도시의 불빛들)」를 듣다. “Maria's stoned like a porcelain saint Sweet morphine.(마리아는 깨지기 쉬운 성자처럼 취해 있어요. 달콤한 모르핀.)” 취하지 않으려면 내가 취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텐데. 나는 무엇에 취해 있을까? 몽롱하다.
7:05
○ 학교 경비실 앞, 경비원과 인사를 한다. 자주 궁금한 건 차 안과 차 밖의 눈은 서로 마주할 수 있을까? 난 보이는데 저쪽은 어떨까? 부버(Martin Buber, 1878~1965)는 『나와 너』에서 나는 ‘나-너’의 관계와 ‘나-그것’의 관계가 있다고 했다. 아침의 인사는 ‘나-그것’의 관계인 것 같아 죄송하다. ‘그것’이 아니라 ‘너’가 되려면 얼굴을 보아야 한다. 교장의 주차 자리 옆에 댔다.
7:10
○ 아침 독서를 하다.
○ 생각 하나. 들뢰즈(Gilles Deleuze, 1925~1995)를 생각하다가 ‘자유의지’에 시비를 건다. ‘하자’, 마음이 들면 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늘을 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라는 존재 법칙이다. ‘인식’에 집중해 왔는데 ‘인식’의 ‘여집합(나머지들)’에 관심해야 한다. 어떻게 해방과 예속이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나? 들뢰즈의 고뇌는 2차 세계대전이다. 어떻게 인간이 그렇게 잔혹하게 파괴적일 수 있을까? 학교 변화도 학교 존재 법칙을 따라야 한다. 학교의 변화를 말하며 변하지 않는 이유. 여집합에 집중해야 한다.
○ 생각 둘. 크세노파네스(Ξενοφάνης, 기원전 570~기원전 480), “소나 말이나 사자 같은 동물들이 손이 있어서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신을 그릴 때 소는 소처럼, 말은 말처럼 그리게 될 것이다.” 그리스 신화의 인간중심주의. 그렇다면 하나님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도. 하나님이라는 ‘인식’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라 인식한(된) 것의 밖을 보아야 한다.
7:53
○ 삼성 컬러프린터 토너 신청 기안 작성하다. 1학년 수학여행 답사로 교감이 부재중이다.
○ 병조퇴 신청하다. 10년을 훌쩍 넘긴 일상. 한 달에 한 번은 꼭 가야 한다. 약봉지가 머릿속에 둥 하고, 뒤따라 짜증이 떠오른다. 약봉지라는 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지고 가야 하는 가벼운 무게의 무거운 짐이다.
8:00
○ 교사아침기도회에 들어가다. 10명 내외가 앉았다. 교감의 부재가 느껴진다. ‘내가 소중하게 대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소중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 ‘준비된 것만큼만 이루어진다.’라 생각하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고
안 심은 데 안 난다.
기적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심는 것은 콩이나 팥이 아니라 안이다.
화장실 소변기 벽면의 액자가 떠올랐다.
8:10
○ 「문학」 시험지와 답안지를 수령하고 2학년 1반 교실로 입실하다. 시험 시 유의사항이 방송된다. 아이들이 듣지 않는다. “폰 안 낸 사람?”, “책상 속에는 아무것도 있어선 안 된다.”, “예비 마킹하면 안 된다.” ‘안’ 빼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겠다. 안 되는 것 참 많다.
○ 답안지 먼저 그리고 시험지를 나누어주다. 시험지가 8면이나 된다. 글자들에게서 어떤 냄새가 난다. 사르트르(Jean-Paul Charles Aymard Sartre, 1905~1980)가 『구토』에서 주인공 로캉탱을 통해 맡은 냄새도 이럴까? 존재의 역겨움.
○ 시험지 오른쪽 아래에 이곡(李穀, 1298~1351)의 「차마설(借馬說)」이 있다. “나는 집이 가난해서 말이 없기 때문에 간혹 남의 말을 빌려서 타곤 한다(余(여)는 家貧無馬(가빈무마)하여 或借以乘之(혹차이승지)한다.).” 부버와 들뢰즈가 떠올랐다. 나는 말(馬)이 아니라 말을 빌린다.
○ 학부모 시험 감독이 들어오다. 3명의 아이들이 이미 잠들다. 이어서 또 아이들이 잠들기 시작한다. 존재의 멀미로 해 두자.
9:30
○ 금요일 세미나를 준비하다. 2018년 2차 기독교대한감리회 중등 교목회 세미나를 학교에서 실시한다. 이름표 디자인, 참석자 명단 작성, 인쇄, 재단, 명찰에 끼운다. 커터 칼 재단과 끼우기는 잡스럽게 시간이 드는 일이고 수십 년을 해도 하기 싫은 일이다. 행사 순서지 제작, 인쇄, 접지를 한다. 접지도 귀찮은 일이다. 재단과 접지를 한 장씩 해야 하는 내 편집증이란.
11:00
○ 국어 선생님과 대구탕을 먹다. 조그만 일식집, 고덕 시장 골목에 있는 좁은 가게라 많은 사람이 앉을 수는 없지만 좋은 사람이 오면 식구(食口) 하고 싶은 곳이다. 시장 ‘점’ 같은 일식집은 뉠 ‘방’ 같은 곳이고, 우연한 ‘사건’ 같다. ‘점’이 ‘방’이다, ‘사건’이다로 두어 시간을 다툰 친구가 있다.
○ 선생님과 적폐(積弊)를 논하다. ‘뿌리 깊은 폐해’라는 뜻이다. 선생님은 “선생님 하나하나가 적폐지요. 편함이 길들여진 것. 일반고로 돌아가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아무래도 아이들 공부만 신경 써 주면 되니까. 일반고의 다양한 아이를, 일들을 다시 감당할 수 있을까요?” 적폐는 편함에 길들여져, 변하는 세상에 변하지 않으려는 우리 자신의 생각이다. 저들이 적폐다 말하기는 쉬운데 스스로를 향하기는 쉽지 않다.
○ “어. 다리 괜찮으세요?” 아주머니는 반깁스 다리로 물 쟁반을 옮긴다. “넘어져서 발가락뼈가 부러졌어요.” 화장실에 다녀온 선생님의 눈은 에어컨에서 문으로 그리고 아주머니로 옮겨 묻는다. “어, 다리 괜찮으세요?” 세상은 아직 괜찮다.
12:47
○ 병원에 도착하다. 약이 떨어진다는 재촉을 이야기를 며칠 전부터 들었다. 한 달을 살, 약 뭉치 봉투를 받았다. “혈압이 약간 높네요. 급하게 오셔서 그럴 거예요.” 병원비 계산을 하는데 전화가 왔다. ‘삼성 페이’의 난감함. 통화와 결제를 동시에 할 수 없다. 이동 주차. 약국에 처방전을 안기고 주차장에서 이동 주차했다. 좀 전의 짜증이 둥 하고, 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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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년체(編年體)”, [명사] 역사 서술 체제의 하나. 역사적 사실을 연대순으로 기록하는 기술 방법이다. 『네이버 국어사전』.
"내달 8·15 기도회 공동개최 추진"
남북한 교회 대표가 참가한 한반도 에큐메니칼 포럼(이하 EFK)이 지난달 22-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최됐다. 이번 포럼에 한국 측을 대표해 참가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는 화해·통일위원회(위원장 나핵집 목사) 명의로 발표한 보고서를 통해 “EFK 총회는 △남북정상의 판문점 선언을 지지하고 △‘도잔소 프로세스’의 정신을 이어받아 앞으로 판문점 선언에 기초하여 ‘판문점 프로세스’를 이어갈 것 △판문점 선언의 정신에 따라 대북경제제재를 해제할 것 등을 요구했으며 △한반도 평화대회를 개최한다는 등의 내용을 담은 공식 문건을 채택했다”고 밝혔다.
교회협과 조그련 간의 별도 대화를 통해서는 “향후 인도주의적 협력을 적극 이행하기로 했으며, 내달 8·15 남북공동기도회 개최 문제 등을 논의하기 위해 빠른 시일 내에 실무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교회협은 또한 오는 11월 정기총회 때 조그련 대표단을 초청한다는 뜻을 북측에 전달했다.
한편 북측 대표단은 귀국길에 중국 베이징에서 조국평화통일협의회(대표회장 진요한 목사)와 만나 내달 중 평양에서 ‘남북 공동 조국평화통일 기원을 위한 감사기도회’를 갖는 문제를 협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조국평화통일협의회는 이와 관련해 북측 대표단이 강명철 위원장을 비롯해 윤미 국제담당관, 이금경 직원, 조선종교인협의회 이혁철 사무국장 등이라고 소개했다.
* 이 글은 감리회신문인 '기독교타임즈'에 실린 기사입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득 할머니가 지난 1일 일본 정부의 공식적 사과를 받지 못한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일본은 즉각 반인도적 범죄에 진심어린 사죄를 하고 인류는 전쟁으로 더러운 탐욕을 채우려는 비열한 폭력에 대해 깊이 반성해야 합니다. 이제 27명밖에 남지 않은 위안부 피해자들의 영혼과 육신을 위로해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