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7.14 15:30

2018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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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8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오늘은 강원도 인제 방인웅 장로님 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기 위해 왔습니다. 여러분의 참여와 노고에 감사드리며 뜻깊은 시간을 보내고 갈 수 있도록 협조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3. 사랑방에 비치된 하반기 공동식사 및 정리봉사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4.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가 7월 28(토)~29일(주일)에 열릴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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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은 개뿔?!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는 SNS 페이스북에서 가끔 재미있는 기능이  보입니다. 예를 들어 '당신과 가장 닮은 연예인은?', '당신의 전생은?' 뭐 대충 이런 심심풀이 기능인데 이게 진짜로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이런 소소한 기능들로 마음이 즐거워집니다. 얼마 전 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지나치다가 '당신의 한글자'라는 기능이 있어서 보니 그의 한 글자는 '복'이었고 그 기능을 사용해 본 어떤 사람들은 '술', '왕'이라고 나왔다고 하더군요. 

몇 번을 그냥 지나치다가 저도 심심풀이로 한 번 해봤습니다. 단지 이름 석 자만 기입하면 한 글자가 나오는데 제 이름을 치자 잠시 뜸을 들이더니 '돈'이라는 한 글자가 나왔습니다. 그걸 보는 순간 피식~ 헛웃음이 새나왔습니다. '돈'이라니? 내 인생에 돈이라니? 돈이 많다는 건지, 돈이 지지리도 없다는 건지? 많다는 것이면 개가 풀 뜯어 먹는 소리이고 지지리도 없다는 소리면 쪽집게입니다.20180715_003.jpg


돈은 개뿔?! 이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가슴을 치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네가 지금까지 살면서 돈이 없어서 죽고 싶었던 적이 있었느냐, 밥을 굶은 적이 있었느냐, 원하는 것을 갖지 못한 적이 있었느냐?" 지금까지 살면서 부자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나와 우리 가족은 가난하다'고 자기최면을 걸면서 살아왔지만 돈이 없어서 절망하거나 깊은 슬픔에 빠졌던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돈이 흘러 넘쳤던 적은 없지만 궁핍해서 시름하던 적도 없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큰 욕심 내지 않고 살아왔었고 분수에 맞춰 삶을 설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12-13절에서 바울은 "나는 비천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큰 부자였다면 제 삶이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솔직히 좀 부끄럽습니다. 가진 재산이 많아서 부자이고 풍요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들을 잘 사용하면서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참된 부유함일 것입니다. 제 삶에서 돈은 항상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게 적절하였던 것 같습니다. 돈만이 아니라 모든 것이 제 삶에 항상 적절하였습니다. 그래서 더욱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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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손님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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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오후에는 좀 특이한 손님이 우리 교회에 다녀가셨습니다. 저와 논산훈련소에서 같이 훈련 받고 부대는 다르지만 같은 카투사로 복무하였던 

전우(?) 이강근씨가 6학년 초딩 두 명과 함께 교회에 방문하였습니다. 딸이 학교에서 북한에 대해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받았는데 제가 생각이 나서 얼굴도 좀 볼겸 남양주 덕소에서 우리 교회까지 일부러 찾아온 것입니다. 생기가 발랄하다 못해 폭발 직전인 초딩 여학생 둘이 카메라로 저와 인터뷰 하면서 동영상까지 찍어갔습니다. 제 친구는 통일비용에 대한 부담 때문

에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았다는데 통일수익이 더 막대하다고 애기해주니 놀라더군요. 한 시간 가량 짧은 만남이었지만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그나저나 그 천방지축들이 학교 발표는 잘 했으려는지... 딸은 영 어색해요~ ㅋㅋㅋ


“통일을 기대하는 바쁜 행보”


저는 감리회 선교국의 평화통일위원회에서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화해통일위원회에 전문위원으로도 참여하고 있고요. 지난 주간에는 두 개의 위원회가 각각 모임을 열고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교회의 역할을 찾아보고 한국의 교회가 함께 기도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습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후 속도감 있게 한반도의 평화정착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으나 미국의 압박과 종전선언 외면에 항의하는 북한의 시위로 줄다리기가 장기화될 조짐이 보여 다들 염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평화가 정착될 수 있도록 모두 마음을 합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2006년 7월 15일    "소셜 미디어 플랫폼 중 하나인 트위터가 시작되다."

트위터(Twitter)는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자 마이크로블로그 서비스이고 "트윗(tweet)"이란 말은 작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나타내는 영어 낱말이다. 트위터는 단문 메시지 서비스(SMS), 인스턴트 메신저, 이메일 등을 통해 “트윗(tweet)”을 전송할 수 있으며 140자가 한도인데, 지역에 제한 없이 전 세계 이용자와 짧은 글로 대화를 주고 받거나 친구를 맺을 수 있다. 사용자 수가 많으며, 실시간 대화와 비슷한 방식으로 이야기가 오가는 특징이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시작한 이야기가 급속히 유포되어 세계적인 이슈가 되는 일도 일어난다. 스마트폰의 급속한 대중화에 의해 트위터도 함께 대중화되고 있다. 스마트폰의 특징인 시공간의 제한 없이 어디서든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즉각적으로 반응을 보이고 참여할 수 있다는 점 덕분에 트위터의 이용률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실례로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과 고용불안에 항의하여, 20여일간 공장점거투쟁을 벌일 당시에 스마트폰을 이용해 트위터에 글을 올림으로써 투쟁소식을 전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루머와 가짜 뉴스 생산과 유포라는 취약점도 있다. 더 빠르게 더 많은 데이터를 전송하는 시대를 앞두고 있는 오늘날 장단점을 반성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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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무드(Talmud)에 나오는이야기이다.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진 여인이 물을 긷다가 우물에서 보석을 발견했다. 마침 그 때 삶의 슬픔에 지치고 가난한 친구가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친구는 그녀가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고 있으며 오늘 우물에서 보석을 발견하게 된 이야기를 들었다. 

보석 소리를 듣는 순간 친구는 부러워 하는 마음이 생겼다.

“나도 저런 보석만 가질 수 있다면 기쁨으로 인생을 살 수 있을텐데...” 

친구는 별 기대감이 없이 지나가는 소리로 여인에게 말했다. 

“내 사정이 매우 어려운데 그 보석 나에게 줄 수 없겠니.”

그러자 뜻밖에도 여인은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하자고 하며 성큼 보석을 건내주었다. 친구는 너무나 기뻐 보석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마음 속에 이상한 깨달음이 찾아왔다. 그것은 이 보석이 자신을 기쁘게 하기보다는 점차 불안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친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여인의 집으로 돌아가 보석을 되돌려주며 말했다.

“친구,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은 보석이 아니라 이 보석을 선뜻 나에게 건내줄 수 있었던 너의 마음인 것 같아. 네 마음속에 있는 그 기쁨을 내게 줄 수 없겠니.”

이 때 여인이 친구에게 성경말씀 한 구절을 들려 주었다.

느헤미야 8장 10절의 말씀이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The Joy of the Lord is your strength)


밖에 있는 환경이나 물질보다 더 존귀한 것은 우리 안에 계신 주님이십니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이 주시는 기쁨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무기가 아니라 성령님 주시는 기쁨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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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회 신앙고백 4조는 성경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는지, 성경의 본질은 무엇인지, 성경의 역할은 무엇인지에 대하여 고백하고 있다. 교리적 선언은 4조에서 은혜에 대하여 고백하고 성경에 대한 고백을 5조에 넣고 있지만, 감리회 신앙고백은 성경에 대한 고백을 4조에, 은혜에 대한 고백을 5조에 넣고 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으며, 구원과 신앙생활의 충분한 표준이 된다고 고백하고 있다.

웨슬리의 신학, 더 나아가서 감리교 신학의 4가지 기준은 성경, 전통, 이성, 경험이다. 여기에서 성경은 가장 우선적인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존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완전]이라는 책에서 자신은 ‘한 책의 사람’이 되려 한다고 기록하면서 자신이 ‘성경의 사람’이 되려고 하였음을 고백한다. 가톨릭은 성경의 권위보다 교회/교황의 권위를 우위에 놓는다. 그 이유는 많은 문서들 중에서 정경(正逕, Canon)으로 결정한 것은 교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일으킨 종교개혁 3대 원칙 중의 하나는 ‘오직 성경으로만’이며, 교회/교황의 권위보다 성경의 권위를 우위에 놓는다. 감리교를 비롯한 프로테스탄트는 이러한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간다. 


1.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믿습니다.

성경은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으로 이루어져있으므로 엄밀하게 말한다면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여러 권의 책으로 구성된 ‘책들’이다. 기원전(B.C.)과 기원후(A.D.)를 나누는 분기점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듯이 구약과 신약을 나누는 분기점도 나사렛 예수의 탄생이다. 구약은 예수님이 탄생하시기 이전에 기록된 문서들이고, 신약은 예수님이 출생하신 이후에 기록된 문서들이다. 현대 신학자들은 ‘구약성경’(Old Testament)이라는 표현보다는 ‘히브리 성경’(Hebrew Bible)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성경은 어떻게 기록되었을까? 감리교는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에 살을 붙인다면 성경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들에 의하여 기록되었다는 의미이고, 성경을 글자로 기록한 것은 사람들이지만 그 사람들을 인도하신 분은 성령이므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고백할 수 있다.

성경은 어떻게 우리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을까? 성경은 현재의 완성된 모습(책)으로 어느 날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수많은 세기를 걸쳐서 기록되었고, 다양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들의 손에 들어왔다. 성령이 현재의 모습으로 완성되기 이전에는 구전(口傳)의 단계가 있었고, 구전으로 전승되기 이전에는 역사적 사건들이 있었다. 출애굽을 실례로 생각하여 본다면, 출애굽이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고, 이 사건에 대하여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그전 전승의 시기를 거쳐 문서로 기록하였다. 복음서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고, 이 사건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승되다가 문서로 기록되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서 삶을 사시다가 부활승천하시면서 이 땅을 떠나신 것은 A.D. 30(33)년경이며, 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마가복음이 기록된 시기는 대략 A.D. 70년경으로 추정한다. 그러므로 A.D. 30(33)년 이전에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라는 사건이 있었고 A.D. 30(33)에서 A.D. 70년경까지는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 단계가 있었으며, A.D. 70년경이 기록의 단계였다. 더 나아가서 기록된 많은 문서들 중에서 정경(正逕, Canon)으로 결정하는 정경화의 단계가 있었다. 결국 성경이 우리의 손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을 단순화하여 본다면, 사건-구전 전승-문서화-정경화로 정리할 수 있다. 구약의 정경화 과정은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며, 신약의 정경화는 사도성, 영감성, 보편성이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히포 회의(A.D. 393)와 카르타고 회의(A.D. 397)에서 확정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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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15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16 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마태복음 5:13-16(새번역)


예수께서는 지금 험한 산에 오르는 것조차 마다하지 않고 자신을 만나기 위해 모여든 절박한 사람들 앞에서 말씀을 전하고 계십니다. 소위 ‘산상수훈’의 초반부인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사람들에게 큰 소리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답답한 삶의 무게를 덜어내고자 각자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이 험한 산등성이까지 찾아온 이들에게 예수께서는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묻지 않고, 그 보다 먼저 ‘당신의 존재’가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질문에 사람들은 적잖이 당황했을 것입니다. 삶의 문제에 파묻혀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민을 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이와 같은 모습이지 않을까요?20180715_004.jpg


  

 놀라운 것은 예수께서 희망의 기색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시면서 “여러분이 세상의 소금입니다.”, “여러분이 세상의 빛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금은 음식의 핵심이며 음식 전체의 맛을 조율합니다. 빛은 세상의 중심이며, 세상의 밝기를 결정합니다. 예수께서는 각자의 걱정거리 때문에 산등성이까지 찾아온 남루한 이들의 존재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분노하고 절규하는 그들의 발걸음을 단순히 살기위한 버둥거림이 아니라, 이 세상을 더욱 맛있고,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나갈 의미 있는 발걸음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께서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질문을 이어갑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소금인데, 어떤 소금입니까?”, “여러분은 분명히 빛인데, 어떤 빛입니까?” 소금은 짜야 제 맛이고, 빛은 등경 위에서 방의 구석구석을 비춰야 비로소 빛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니까요. 우리는 매일매일 각자의 문제꺼리 앞에서 작아집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오늘 말씀하신 것 같이 나 자신의 문제는 분명히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이는 곧 세상의 문제입니다.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나의 문제를 이웃과 함께 나누고, 이웃의 문제에 내가 진심으로 동참하는 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조금 더 맛있어지고, 조금 더 밝아질 것입니다. 

 ‘문제를 지닌 나의 존재’ 그리고 이 문제를 나누고 바꿔가려는 ‘우리의 존재’가 이 세상의 구체적인 ‘소금과 빛’임을 잊지 마시길.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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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교회와 공동체목회"

최혁기 목사, 새로운교회


요즘에는 다양한 목회의 방법론이 주목을 받고 있다. 카페교회도 그중에 하나이다. 전통교회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지역과 사회를 향한 색다른 접촉점으로서의 시도가 활발하다.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활발하다는 것은 도리어 기존의 전통적인 방법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을 역시나 너무 느리게 쫓아가는 교회라서 그런것인가?


대형교회들과 기독교단체들을 통해 작은교회들을 돕기 위한 교육과 지원, 수많은 세미나가 넘쳐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만한 샘플이 되는 교회가 거의 없다.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방법론이 부족해서 그런거 같지는 않다. 신학교육이 중요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목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문제이거나 개인의 문제로 좁혀진다. 그중에서 그나마 우리가 바꿀수 있는 것은 목회자 개인의 문제가 조금 더 쉬워 보인다.


목회자 개인의 역량과 경험의 차이가 결국 교회공동체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열심과 최선의 문제, 성실과 겸손, 목회적 경험과 실천, 상담과 설교의 부분, 지역봉사와 선교까지 생각과 스케일이 다르게 나타난다. 목회자는 거의 평생 공부하면서 목회를 해야 한다. 예전처럼 교회만 세우고 예배의 자리만 지킨다고 해서 저절로 교회가 부흥되는 시대는 아니다.


그건 카페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카페만 준비되었다고 해서 사람들이 몰려들고 갑자기 부흥하는 새로운 목회가 될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교회보다 카페쪽이 비즈니스적인 부분이기 때문에 더 치열하다. 사실 목회자는 비즈니스 관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경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우리는 커피를 잘 내리는것부터 시작해서 카페 예배를 드리는것까지 모두 다 준비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목회적인 부분도 잘해야 하지만 동시에 카페운영에 대한 부분도 역시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를 잘하는것도 쉽지 않은데 두개를 다 잘해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런 부분들을 개척 초기에 혼자서 다 감당하려고 하면 답이 안나온다. 그래서 이미 카페목회를 하고 계신 다른 목회자들과 만나서 많이 배워야 하고 실제로 참여해보고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혼자 하기 보단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공동체가 함께 한다면 상가에서 교회를 시작하든 카페에서 시작하든 한결 쉬워진다. 그리고 초반에 재정적인 감당이 되지 않는다면 무리해서 보증금과 월세를 낼 필요는 없다. 1-2년을 건물 없이 대관만 해서 예배를 드리며 공동체를 구성하는것도 지혜로운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이 아니라 지금 시작하는 교회 공동체이다. 잠깐 목회 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할거라면 완급 조절을 해야 한다. 목회는 100미터 달리기 경주가 아니다. 도리어 마라톤과 비슷하다. 혼자 뛰면 빨리 가겠지만 공동체가 함께 뛰는 것이 느려도 멀리 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공동체를 어떻게 세우고 유지하며 함께 갈것인지가 중요한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방법적으로는 다양한 형태의 목회가 있다해도 본질적으로는 공동체 목회라고 볼 수 있다. 공동체의 멤버십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 어떤 교육과 방향으로 인도할 것인지? 신앙과 영성은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 공동체에 맞는 예배와 프로그램은 어떤게 있는지? 두세명만 모여도 사실 공동체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를 어떻게 목회할 것인지가 가장 중요한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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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감리회신문인  '기독교타임즈'에 실린 기사입니다.

* 이 사진은 최혁기 목사의 페이스북에서 퍼왔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내년 최저임금이 10.9% 인상된 8.350원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만 사용자측과 편의점 업주들이 보이콧을 선언하였고 노동자측도 충분하지 않다며 역시 반발하고 있습니다. 치솟는 상가임대료가 문제인데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들이 투쟁하는 양상입니다. 서로 양보하여 최소한의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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