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9주일입니다. 성령의 감동과 이끄심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삶의 기쁨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사랑방에 비치된 하반기 공동식사 및 정리봉사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3. 감독 및 감독회장 선거인단 선출을 위한 임시서울연회가 26일(목) 오후 7시부터 왕십리 꽃재교회에서 열립니다. 서울연회원(목회자 4인, 임정희 집사)은 참석해주시기 바랍니다. 오후 5시부터꽃재교회에서 저녁식사를 제공하고 등록비(1만원)는 교회에서 일괄납부하겠습니다.
4. 이번 토요일인 28(토) 오후 12시부터 주일 오후까지 "온 마음을 하나님께"라는 주제로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가 열립니다. 좋은 올림픽, 만남센터, 달란트시장, 성경공부와 수영장 물놀이 등의 프로그램이 1박2일로 예배당에서 하룻밤 자며 진행되는데 많은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5. 학생부 여름행사를 위해 일정 및 프로그램 논의를 하겠습니다. 교육부장님과 학생들은 공동식사 후에 잠시 모여주세요.
"인제에 농촌생태활동을 다녀오긴 했는데...”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강원도 인제의 방인웅 장로님과 김영순 권사님이 계시는 농장에 농촌생태활동을 하러 다녀왔습니다. 오전 11시즈음 도착하여 먼저 일을 좀 하고 한창 볕이 뜨거운 정오에는 주일예배를 드린 후 점심식사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날이 너무 무덥고 장로님의 소극적인 준비로 겨우 일하는 흉내만 내고 바람만 쐬다 왔습니다. 남자들은 고추대 정리를 하였고 여자들은 포도송이 싸기, 감자캐기, 채소 따기를 하였습니다. 아빠 엄마를 따라온 현수와 희수만 아주 신나는 하루를 보낸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시원한 계곡물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했습니다. 할 일도 없다고 하시기에 오후에는 산을 넘어 동해안 아야진 해변에 가서 바다를 구경하였습니다. 여기에서도 현수와 희수는 바다물에 첨벙 뛰어들어 신나게 놀았습니다.
저녁식사를 위해 몇 군데 식당을 헤매다가 유명한 봉포 머구리물회 식당에 가서 만있게 식사를 하였습니다만 종업원들은 별로 친절하지 않아서 기분이 별로였습니다. 식사를 마치고 서울로 향해 열심히 달렸지만 11시가 넘어서야 도착하였습니다. 이렇게 늦게 서울에 돌아온 것이 처음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몇 주 동안 너무 활동이 없어서 농활 프로그램을 계획하였는데 날도 너무 덥고 방 장로님도 그냥 오랜만에 만나는 것에 더 무게를 두시는 바람에 행사가 좀 매끄럽지 못했던 것 같아 아쉽습니다. 앞으로 한 여름의 농활은 안 하는 걸로 해야겠습니다. 그래도 먼길 기꺼이 함께 하시고 즐거운 마음으로 참여해주신 교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09년 7월 26일 "조선합병의 당위성을 연설하는 국시유세단 활동 시작"
국시유세단(國是遊說團)은 대한제국 말기에 일본이 대한제국을 통치해야 할 당위성과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정치적 여론몰이 단체로 국시단 혹은 유세단이라고 불렸다. 이들은 조선이 일본의 보호를 벗어나면 홀로 서야 하는데 그럴만한 능력이 없으며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라도 보호 통치가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이날 일진회 회원인 고희준의 주도로 원각사에서 첫 모임을 갖고 단원 28명을 선정, 이튿날에 발기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하였고 이완용이 거금을 대는 등 밀접하게 관여했다. 당시 드물던 유성기를 사용하여 활발하게 선동을 하였지만 이들에 대한 비난은 더욱 거세졌다. 그러자 각 신문에 '유세단의 취지도 모르면서 공연히 비방한다', '독립이 실현되면 조선민족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반박문과 논설을 싣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국을 도는 활동에 재정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고 정부는 각 도에 훈련을 보내 유세단원을 후하게 대접하라고 지시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과 일본이 병합한 후인 1910년 9월까지 지속되었고 13일에 정식으로 해체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번영과 발전이라는 미명 아래 겨레의 얼과 역사를 팔아먹는 이들이 적지 않다.
출처 : 위키백과사전(https://ko.wikipedia.org/wiki)
어느 날 두 사람의 남자가 상담을 하러 찾아왔다.
한 사람은 그 마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부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돈이 많은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몇 분 먼저 왔기 때문에
차례가 되어 먼저 방에 안내되었다.
상담시간은 대단히 오래 걸려서 한 시간 이상이나 지체한 다음
가난한 사람의 차례가 되어 방에 안내되었다.
그런데 그 상담은 불과 15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가난한 사람은 내심 분개하였다.
‘아무리 돈이 없는 사람이라고 이렇게 차별대우를 할 수 있는가?
돈이 많은 부자에게는 성의를 다해서 한 시간 동안이나 상담에 응해 주고
나는 가난뱅이라고 적당히 하는 것이 아닌가?’
이 눈치를 챈 상담자가 미소를 띄며 말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그만큼 마음이 가난하니
그 가난한 마음을 채워주기 위해서는 시간이 더 걸리는 법입니다.”
돈을 천시하거나 경원시하지도 않지만 돈만을 추구할 때에 사람의 마음은 빈약해질 가능성이 많습니다. 무엇이 삶의 기준인가가 중요합니다. 비록 가난한 사람이라할지라도 돈이 기준이 되지 않는다면 돈에 대해서 그는 부유한 사람입니다 . 마찬가지로 돈이 많다 하여도 지혜가 없다면 돈에 대해서는 부유할지 모르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덕정감리교회 문병하 목사님의 페이스북 中]
제8장
성경I (2)
4.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도리와 신앙생활의 충분한 표준이 됨을 믿습니다.
1.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2)
우리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이... 믿습니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고, 회의를 통하여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성경을 기록한 사람을 움직이고 감동을 주신 분은 성령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합니다.”(디모데후서 3:16) 여기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성경은 최종적으로 인간의 손에 의하여 기록되었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기록하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1)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 4조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라는 고백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로 읽어가야 한다. 하나님은 초월적이고 절대적이신 분으로 무한자이지만, 인간은 피조물로서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유한한 존재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다.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당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 것뿐이다. 이것을 ‘계시’(啓示, revelation)라고 한다. ‘계시’라는 말의 문자적인 의미는 은밀하게 베일에 가려져 있던 것이 벗겨지거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하나님이고, 자연, 인간, 역사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계시하신다.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기 이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같은 족장들과 사사들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계시하셨고, 출애굽과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하여서도 계시하셨고, 노아의 홍수 이후에 무지개와 같은 자연을 통하여서도 계시하셨다. 그러나 다양한 하나님의 계시들 중에서 하나님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는 결정적인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계시하셨다. 히브리서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하나님께서 옛날에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여러 번에 걸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으나, 이 마지막 날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히브리서 1:1-2상)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시었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이다.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요한복음 1:14)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성부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이다.
하나님의 계시에서 중심적인 요소는 말씀이다. 호렙 산 떨기나무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은 바로에게로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애굽을 탈출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에게도 말씀을 주신다. 에스겔서에는 “주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한다.(6:1, 11:14, 13:1, 14:2, 15:1) 예언자들은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주께서 말씀하시기를”과 같은 표현을 자주 사용하면서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달하는 자임을 드러낸다. 이러한 측면에서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代言者)들이다. 결국 하나님의 계시에 있어서 말씀은 중요한 매체가 된다.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전달된다. 말씀은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계시를 위한 적합한 매체이다.(계속)
(4) 매일 아침 열리는 자신만의 세계
1. 수업의 시작
흰색 아니 노란색으로 결정한다. 칠판에 또각또각 글씨로 내린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을 받아야만 할까?’
수업시간 아이들과 함께 나눌 주제다. 학습 목표를 말한다, 하려고 했다.
“우리는 이 주제를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인정이 우리에게….”
규운이의 팔은 이미 귀에 붙었고 엉덩이가 들썩인다.
“그래, 규운.”
“세상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저는 저이기 때문입니다.”
“음, 조금 설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다른 사람?”
안경을 살짝 들어 올린 규민의 오른손이 조용히 오른다.
“그래, 규민이.”
“세상의 인정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운전면허 같은 자격증들도 세상의 인정을 받은 거 아닌가요?”
“저요.”
이제 규운이는 손을 들지 않고도 일어선다.
“그 인정을 누가 하는 건데? 사회? 학교?”
“자. 손들고 자기 차례에 이야기하자.”
“그래, 건우.”
“인정받으면 기분이 좋아요.”
건우는 자주 이렇고 또 수업은 시작된다.
2. 존재하는 것이 가치 있는 이유
고타마 싯다르타(Siddhartha Gautama, 기원전 624?~544?)는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먼저 고타마 싯다르타는 카필라 왕국의 왕자였던 그의 이름입니다. 그리고 싯다르타는 35세,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고 나서 붓다(Buddha, 佛陀, 부처)가 됩니다. 붓다는 ‘깨달은 자’ 또는 ‘눈을 뜬 자’라는 뜻입니다. 싯다르타의 또 다른 이름이 있는데 석가모니(Śākyamuni)입니다. 석가모니는 석가족(釋迦族, Śākya)의 성자(聖子, muni)라는 뜻입니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싯다르타가 어머니 마야 부인에게서 태어났을 때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단순히 ‘내가 최고다.’라는 뜻으로 오해합니다. 그러나 그 본뜻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 모두에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싯다르타 자신에 대한 선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을 향한 선언입니다. 무엇에도 기대지 않고 존재한다는 이유로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창조 이야기에도 존재의 가치에 대한 선언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의 천지를 창조하셨다.”(창세기 1:1), “하나님이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참 좋았다.”(창세기 1:31). 이 창조 구절에 대해 많은 논쟁이 있습니다. 이 구절의 내용을 ‘사실’의 언어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고백’의 언어로 볼 것인가 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했다는 이야기가 ‘사실’일까? ‘고백’일까? 그런데 창세기의 기록 목적을 생각해 본다면 ‘사실’의 전파가 아니라 ‘가치’의 전파가 적절해 보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선하며, 이 ‘선’은 다른 것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존재에 대한 가치 부여이기 때문입니다.
문득 싯다르타가 자신을 석가모니라 부르는 것을 좋아했을까? 아닐 것 같습니다. 싯다르타로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자(聖者)라는 사람들의 평가는 싯다르타에게 또는 우리에게 불필요해 보입니다. 그리스도교 또한 하나님이 창조했기 때문에 충분해 보입니다. 존재의 가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3. 가섭과 도마의 자유
어느 날 영취산에서 석가모니의 제자들은 가르침을 청합니다. 석가모니는 아무 말 없이 연꽃을 들어 제자들에게 보여 줍니다. 어리둥절한 제자들 가운데 가섭(迦葉, kāśyapa)은 그 참뜻을 알고 미소를 짓습니다. ‘염화미소(拈華微笑)’. 일반적으로 염화미소는 말이 아니라 마음으로 깨달음을 전한다는 뜻로 이심전심(以心傳心)과 함께 이해합니다. 여기서 다른 깨달음을 찾을 수도 있습니다. 왜 제자들 사이 가섭만이 미소 지을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입니다. 연꽃을 들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니?” 묻는 석가모니 앞에서 제자들은 스스로의 생각이 아니라 “왜 스승은 연꽃을 들었을까? 정답이 무엇일까?” 스승의 생각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섭만이 스승 없이 스스로에게 먼저 다가온 연꽃의 아름다움에 취한 것은 아닐까?
그리스도교의 요한복음에는 도마라는 예수의 제자가 나옵니다. 갈릴리 출신, 게네사렛 호수의 어부였던 도마는 예수의 부름을 받고 제가가 됩니다. 그리고 예수의 십자가 처형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보았소” 하고 말하였으나, 도마는 그들에게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하고 말하였다. [요한복음 20:25]
이 이야기를 담고 있는 단락에는 ‘도마의 불신앙’이라는 소제목이 달려 있습니다. 예수의 제자들이 ‘다시 일으켜진’ 예수를 보았다고 하자 도마는 자신이 직접 경험하기 전에는 그것을 믿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예수는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도마가 다시 ‘일으켜진’ 예수를 믿지 않으니 ‘도마의 불신앙’이 맞습니다. 하지만 도마의 확실성은 먼저 보았다는 다른 사람의 권위에 기대지 않습니다. 그의 확실성은 그 권위 이전에 자신의 경험에 두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조차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 그의 별명은 ‘의심 많은 도마’입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는 도마’가 더 좋아 보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이렇게 생긴 그의 경험과 확실성은 인도에서 순교에 이르기까지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삶으로 변화시키게 됩니다.
4. 모두에게 특별한 경험, ‘움벨트(umwelt)’
야곱 폰 웩스퀼(Jakob von Uexküll, 1864~1944)은 1957년 『동물과 인간 세계로의 산책』[A Foray Into the Worlds of Animals and Humans: With a Theory of Meaning]에서 ‘벨트(welt)’와 ‘움벨트(umwelt)’를 말합니다. ‘벨트’가 객관적인 세계라면 ‘움벨트’는 각각의 동물들이 주관적으로 경험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예를 들어 ‘벌’이 보는 꽃과 ‘인간’이 보는 꽃은 다르며 벌과 인간은 다른 ‘움벨트’를 산
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보는 세계의 정당성을 다른 사람의 지지에 맡기려 합니다. 그 다른 사람이 높은 사람이면 더더욱 정당성이 높아진다고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보는 세계에 집중하기보다 다른 권위 있는 사람들이 본 것에 더 집중하곤 합니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물음은 우리 모두가 어떤 것을 똑같이 볼 수 있을까 그리고 내가 본 것은 틀린 것이고 누군가 본 것이 옳은 것이라 말할 수 있을까 입니다. 안경을 쓴 사람이 본 세계가 옳고 안경을 쓰지 않은 사람이 본 세계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안경을 쓴 사람에게 맞추어 내가 본 세계를 설명할 이유도 없습니다. 자신이 보는 세계의 정당성을 다른 사람의 인정을 통해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각자에게 보이는 세계는 저마다 옳은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인정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저 충분합니다.
5.
비오는 어느 날 친구는 창에 네모로 앉은 대숲을 보며 말한다.
“댓잎에 빗방울이 푸르게 맺혀 푸르게 구른다.”
난 말한다.
“댓잎에 부서져 나르는 아픈 빗방울 소리는 두드득 아프다.”
“와. 페북에 올려야지. 쌤, 개쩔어.”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내년 최저임금이 10.9% 인상된 8.350원으로 결정이 되었습니다만 사용자측과 편의점 업주들이 보이콧을 선언하였고 노동자측도 충분하지 않다며 역시 반발하고 있습니다. 치솟는 상가임대료가 문제인데 저임금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들이 투쟁하는 양상입니다. 서로 양보하여 넉넉하게 생존권이 보장되는 사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