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2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5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오후로 예정됐던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는 다음주일로 연기하겠습니다.
3. 가을학기 수요성서대학은 9월 12일에 개강하겠습니다. 강의 내용은 지난 학기에 하던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4.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이 이번 폭우로 수해를 입으셨습니다. 속히 복구될 수 있도록 관심과 기도를 부탁합니다.
5. 이번주 목요일(6일) 오후 7시, 대한문 앞에서 '쌍용차 해고자 복직을 촉구하는 목요 촛불기도회'가 열리며 방현섭 목사가 설교합니다. 노동자들을 위하여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세상에 이런 일이! 우리 교우가 수재민이 되었습니다”
저는 지난주일 오후부터 화요일까지 2박3일 동안 아내와 둘이 여름휴가를 다녀왔습니다. 소멸될 비행기 마일리지가 아까워 큰맘 먹고 제주도에 갔습니다. 떠나기 전 일기예보를 보니 휴가기간 내내 비가 온다고 해서 아쉬운 마음으로 갔는데 막상 가보니 날씨가 너무 좋아서 아주 행복한 휴가를 보내고 왔습니다. 그런데 화요일 밤에 김포공항에 도착해보니 비가 많이 내리더군요. 제주도에서 뉴스를 보지는 못하였지만 간간이 들리는 소식이 육지에는 며칠 동안 엄청난 비가 내렸다고 하길래 '그런가보다' 했더니 비 피해가 막심했었나 봅니다.
와서 보니 비 피해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가정도 수재민이 되셨습니다. 화요일 밤에 내린 비로 하수도가 역류하여 집 안으로 들이쳤다고 합니다. 그 지역 인구밀도가 높은데 비해 하수도 용량이 따라가지 못해서 생긴 참사랍니다. 그런데 수요일에 더 많은 비가 내렸고 정화조까지 넘쳤답니다. 당장 입을 옷가지만 조금 챙겨서 일단 언니 집으로 피신을 했다가 비가 그친 후에 가본 집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라고 합니다. 정화조 넘친 냄새에 장판이 뜨고 고였던 물 때문에 벽지는 엉망이 되었겠지요. 가구며 가재도구도 다 망가졌을 테고요. 참으로 걱정입니다.
살다 보니 이런 일도 생기네요. 우리는 걱정이지만 당사자들이 겪을 불편과 절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마친 후 시간 되시는 교우들은 이재원 성도님 댁 정리하고 복구하는 일에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십시일반 마음도 좀 모으면 좋겠고요. 기도와 노력으로 성도님 부부에게 위로와 격려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75년 9월 2일 "대한민국, 전국 중앙 학도 호국단 창설"
10월 유신으로 15년째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75년 5월 20일 학도호국단(學徒護國團) 설치령을 발표하고 9월 2일에는 여의도 5·16 광장에서 중앙 학도호국단 발단식을 가졌다. 원래 학도호국단은 1949년 이승만 정권이 중학교부터 고등학교, 대학교 학생 전원을 대상으로 학도 층의 사상 통일과 유사시 향토방위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조직한 학생단체였다. 이때부터 미군 철수반대 궐기대회, 반공방일 궐기대회 등 동원관변단체로 이용되다가 4.19혁명 이후 해체되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재설치하였다. 박정희는 학원의 총화단결과 자주국방태세 확립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남녀학생 및 교원을 포함하여 150만 명 정도로 조직, 군사훈련 편제로 편성하고, 평시에는 교련을 비롯하여 각종 단체 활동, 새마을 운동 등에 참여케 하고, 전시에는 후방 질서유지와 지역 방위 임무 등을 시켰다. 박정희가 암살된 후 학도호국단을 해체하라는 요구가 높았으나 쿠데타로 정권을 탈취한 전두환 일당은 오히려 강화하였다. 그러나 해체의 요구가 더욱 거세지자 1985년 대학 호국단이, 1986년에는 고교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회 활동이 부활하였다. 국민을 호율적으로 통제하기 위한 학도호국단 같은 군대 문화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악영향을 끼치며 사회적 폐단을 낳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공지영의 소설 봉순이 언니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어떤 마을에, 아마도 유럽인지 미국인지에 드넓은 초원이 있고, 거기에는 진한 갈색의 멋진 종마가 풀을 뜯고 있다. 그 곁에는 그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살고 있고, 그 종마를 사랑하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멀리 출타하면서 소년에게 말을 부탁한다. 소년은 자신이 얼마나 그 멋진 종마를 사랑하고, 또 그 말이 자신을 얼마나 믿고 있는지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종마와 단둘이 보낼 시간이 주어진 것이 뛸 듯이 기쁘다. 그런데 그 종마가 병이 난다. 밤새 진땀을 흘리며 괴로워하는 종마에게 소년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시원한 물을 먹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년의 눈물겨운 간호도 보람 없이 종마는 더 심하게 앓았고, 말을 돌보는 할아버지가 돌아왔을 때는 다리를 절게 되어버린다.
놀란 할아버지는 소년을 나무랐다. “말이 아플 때 찬물을 먹이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줄 몰랐단 말이냐?” 소년은 대답했다. “나는 정말 몰랐어요. 내가 얼마나 그 말을 사랑하고 그 말을 자랑스러워했는지 아시잖아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잠시 침묵한 후 말한다. “얘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아는 것이란다.”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합니다. 이혼하는 부부 중에는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방법이 다르기 때문에 갈라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익숙하다 보니 안다고 생각하는 데 사실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습니다.
때로 낯 익은 것을 낯 설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신선함이 느껴집니다. 서론을 말하는 데 과정은 듣지도 않고 결론을 미리 유추한다면 감동을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꺼내자 말자 “또 그 얘기야”고 말문을 막아 버리면 대화는 더 이상 이어지지 않습니다. 수 십 번을 들어도 처음 듣는 것 같이 경청하면 좋으련만 그러기는 쉽지 않습니다.
서로 말문을 닫고 TV를 향해 분과 귀를 열어주고 사는 부부는 상대방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이 가진 사랑의 기술이 있는 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은 사랑하기 보다는 사랑의 기술을 연마할 때입니다.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제10장
하나님의 은혜 I (2)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믿습니다.
이 신앙고백에 따른다면, 우리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정은 이미 하나님께서 예정하셨다. 이 예정은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전격적으로 결정하셨으며, 인간의 믿음과 선한 행위 등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선택/예정에 조건이나 원인이 될 수 없다. 즉, 인간의 믿음이나 선행은 하나님의 예정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예정론에서 인간의 구원은 하나님의 예정,즉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인간의 믿음과의 관련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
웨슬리는 예정론을 비판하면서* 만인구원론을 주장한다. 웨슬리에 따르면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고 전적으로 그 사람에게 있다. 그러나 예정론에서는 하나님이 구원을 결정하시기 때문에 그 책임은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예정론은 인간의 결단과 책임이 배제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악마보다 더 나쁘고, 더 거짓되고, 더 잔혹하고, 더 불의한 분으로 그려진다고 웨슬리는 비판한다. 예정론과 웨슬리의 만인구원론의 결정적인 차이는 인간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결정하시는가, 아니면 인간과 더불어 결정하시는가의 차이이다. 전자(예정론)에서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인간의 의지와 결단, 책임은 설 자리가 빈약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강력하게 강조된다. 그러나 후자(만인구원론)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더불어 인간의 선택과 결단과 책임이 강조된다.
감리교의 구원론은 예정론이 아니고 만인구원론이며, 구원은 미리 결정된 것이 아니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모든 사람에게 가능하다. 인간을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인간의 결단이 만나 죄의 용서가 일어나고 구원이 시작된다. 만인구원론에 적용되는 논리는 either/or의 논리가 아니고 both/and의 논리로 설명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선순위의 논리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 인간의 결단으로 이루어지는 믿음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은총)가 먼저 있다. 하나님의 은혜가 주도적으로 먼저 역사하시고 인간들의 믿음은 선행하는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응답이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은총으로 믿음을 통하여”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먼저 고백하고 인간의 믿음을 다음에 고백함으로, 하나님의 선행적 은총과 인간의 믿음을 아우른다. 여기에서 선해하는 것과 주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며,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인간의 믿음을 우회하지 않고 믿음을 통하여 죄의 용서가 일어난다. 웨슬리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은총이 없어서 범죄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은총을 활용하지 않는 까닭에 범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행은총은 모든 사람에게 내려지는 보편적인 은총이다. 이 보편적인 은총을 받아들이는가, 거부하는가는 인간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하나님의 은혜(은총)는 무엇인가? 서방교회 신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은혜를 신적인 사유와 용서로 규정하는 법정적인 개념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동방신학자들은 은혜를 우리 본성을 새롭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해석한다. 서방신학자들의 은혜는 외적인(형식적인) 측면에 집중한다면, 동방신학자들의 은혜는 인간의 내면적인 측면에 집중한다고 볼 수 있다. 웨슬리(감리교)는 이 두 가지 전통을 모두 흡수하면서, 은혜란 가장 근본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은혜로 정의하고, 이 은혜를 받아들이고 고백하게 되면 죄의 용서가 이루어지고 인간이 새롭게 변화되는 것이 가능해진다고 본다.(계속)
* 런연은 예정론에 대한 웨슬리의 비판을 6가지로 정리한다. 1) 모든 설교가 헛된 것이 되게 한다. 2) 하나님의 모든 볍령의 마침이 되는 ‘거룩성’이 파괴되어 버릴 경향이 있다. 3) 기독교의 행복과 종교의 위로를 파괴한다. 4) 선한 일을 위한 열심을 파괴하여 버린다. 5) 기독교의 모든 계시를 던져 버릴 경향을 드러낸다. 6) 하나님을 위선자요 백성을 속이는 분으로 나타낸다.(런연, 김고광 옮김,「새로운 창조」, 52~55)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이론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말했다. “물질세계의 쏜살같이 지나가버리는 현상을 기록하고 포착하고 증명함으로써 그것이 일상사 가운데 잊혀지고, 사라지고, 무심히 침묵 당하지 않도록 구해내는 것이 영화의 능력이다.”
필자는 크라카우어가 언급한 영화의 능력을 가장 잘 구현하고 있는 동시대 감독 중 한 사람으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을 꼽고자 한다. 그의 영화는 따뜻한 감수성으로 수놓아져 있으면서도 냉혹하고 어두우며 때론 복잡하게 얽혀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초기에 연출한 여러 작품들이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다큐멘터리였다는 이력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현실의 문제에 갇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직접 기록하며 쉽게 해결 할 수 없는 복잡다단하고 지난한 실존의 한계와 사회구조적인 모순을 몸소 절절하게 경험했기 때문일까. 그의 영화들은 다소 동화적일 정도로 아름답지만, 그 중심에는 구체적인 현실을 향한 냉소적인 시선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특별히 히로카즈 감독은 그 동안 <환상의 빛>,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등 여러 작품을 통하여 "가족"을 주된 소재로 삼아왔고, 그와 더불어
"빈곤의 현상"에도 주목해 왔다. 얼마 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그의 최신작 <어느 가족>은 그 동안 천착했던 이 주제에 관한 히로카즈 감독의 고민이 얼마나 깊어졌는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다. 두 시간 동안의 러닝타임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시퀀스와 씬 하나하나에는 '가족'이라는 환상 속에 뭉뜬 그려진 서글픈 우리네 자화상이 펼쳐진다. 나아가 영화는 폭력적인 시선과 전형적인 차별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려는 모순투성이의 사회를 적나라하게 규탄하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로 보이는 두 사람이 함께 마트에서 눈짓으로 사인을 주고받고 있다. 진열되어 있는 생활용품 몇 개를 자신의 가방에 넣는 아들, 그 순간에 맞춰 정확하게 점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는 아버지. 잠시 후 두둑한 가방을 들고 마트 밖으로 나오는 두 사람은 환한 얼굴로 손뼉을 마주치며 함께 집으로 향한다.
예사롭지 않은 도둑질 장면으로 오프닝 시퀀스가 시작되는 영화 <어느 가족>은 곧 이어 온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도둑질 해온 물건들을 천진하게 나눠 갖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마치 <오션스일레븐>이나 <도둑들> 등의 캐이퍼 무비(범죄오락물)를 보는 것 같이, 디테일 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그려지는 오프닝에서 우리는 영화의 전체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인물들을 향한 강한 호기심을 갖게 된다. 과연 이 가족의 정체는 무엇일까?
할머니 ‘하츠에’, 아버지 ‘오사무’, 어머니 ‘노부요’, 이모 ‘아키’, 아들 ‘쇼타’ 등 기존의 가족 구성원에 새롭게 딸 ‘유리’가 합류하는 시점부터 영화는 시작하는데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이들은 혈연관계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가족이 아니다.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자신의 가족으로 부터, 또 사회로부터 버려지고, 쫓겨났으며,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다. 감독은 가족 영화의 결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 가족의 정체에 관한 단서를 조금씩 풀어놓는 방식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다. 흐릿하지만 마치 퍼즐처럼 펼쳐놓은 가족의 정체를 조금씩 끼워 맞추게 될수록, 우리는 그들이 가진 아픔의 구체적인 실체와 점점 마주하게 된다. 혼자서는 단 하루도 쉽사리 살아갈 수 없는 동시대의 그늘진 이들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아가 그 퍼즐이 거의 완성 될 무렵에는 그들이 생존하고 싶어서, 또 숨 쉬고 싶어서 함께 손을 맞잡고 이룬 공동체마저 이 사회가 어떻게 망가뜨리는지를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와 마찬가지고 숨죽이며 그 모든 과정을 지켜봐야만 한다.
영화 <어느 가족>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평소 생존을 위해서 최소한의 법과 기본적인 윤리성조차 안중에 없던 이들 가족이 생면부지인 '유리'를 위하여 유괴범으로 몰릴 수도 있는 위험을 적극적으로 선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진짜 가족은 ‘혈연’이 아니라 '동질감'으로 구성된다. 이 사회에서 버려졌다는 동질감 그리고 서로가 없으면 결코 생존 할 수 없다는 동질감은 그 어떤 위험도 감수하게 하는 '사랑'의 다른 말이며, 이들을 가족으로 묶는 소중한 울타리가 된다. 세상의 법은 이들의 숨통을 조여 오지만, 동질감으로 묶여있는 가족은 영화 속에서 그 어느 가족보다도 안정감 있고 낭만적이며 따뜻한 공동체(가족)를 이루어 간다.
하지만 후반부 안타깝게도 가족이 위기를 겪을수록 동시에 ‘동질감’도 흐려진다. 가족의 존재가 세상에 발각되면서 유괴범, 절도범, 심지어 시신유기범이라는 이름으로 희대의 괴물취급을 받게 되는데, 그러한 외부사회의 개입은 또 다시 이들을 혼자로 만들어 버린다. 한번 버려지고, 배신당한 기억을 트라우마로 갖고 있어서인지 가족 구성원들은 이 과정에서 저마다 자기방어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고, 서로를 의심하고, 서로를 떠나며, 유일한 끈이었던 ‘동질감’마저 그렇게 사라진다. 결국 버려진 채 홀로 남겨졌기에 가족이 될 수 있었던 이들은 이 사회로부터 괴물취급을 받고 또 다시 혼자가 되어 버린다.
하지만 모두가 다 그렇게 떠나버린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파국에서 어머니 ‘노부요’만은 흔들리지 않고 모든 책임을 홀로 뒤집어 쓴 채 자신을 취조하는 경찰에게 이런 이야기를 남긴다.
“우린 훔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버린 것을 주웠을 뿐이다.”
가족을 괴물 취급하며 호들갑을 떠는 그들에게 노부요는 지금 되려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왜 너희들이 그렇게 정상적이라고 얘기하는 가족은 사람을 함부로 버리느냐고. 그리고 왜 이 사회는 버려진 사람을 보듬지 않느냐고. 우리는 훔친 게 아니라 누군가가 버린 것을 주었을 뿐이라고. 버려진 사람들을, 버려진 물건을 주웠을 뿐이라고.
영화 <어느 가족>의 영어제목은 <Shoplifters>이다. 이는 '훔치는 사람들",
'슬쩍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가벼운 표현이지만 이 제목에는 일종의 ‘시선’이 들어가 있다. 영화에서 이 가족을 괴물취급하며 냉혹하게 바라보았던 그 시선, 이 사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 시선 말이다. 과연 진짜 괴물은 누구이고, 진짜 사람들의 삶을 강탈해가는 존재는 누구인가?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
박찬욱 감독, 110분, 한국, 2000.
영화 <어느 가족>은 비록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려졌지만 그들이 함께 모여, 세상 그 어떤 가족보다 따뜻한 시간을 보낸 ‘어느 가족’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정상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에 익숙한 세상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 가족의 모습은 정상적이지 않을 뿐 아니라, 끔찍한 범죄자 집단에 불과하다. 알고 보면 사회의 모순과 시스템의 부재 때문에 생겨난 피해자를 마치 가해자인 것처럼 둔갑시키는 영화 속 현실에 속이 타고 애가 타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어느 가족>과 소재와 장르는 다르지만 그 구성 면에서 많이 비슷한 것이 바로 한국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이다. 이 영화는 2000년에 개봉하여 많은 화제를 모았었는데, 아마도 그 해 남북정상회담이 진행되지 않았으면 개봉하지 못했을 만큼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다. 남과 북의 경계인 휴전선 부근에서 총기 사고가 발생하여 북한 병사 한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것을 유엔사에서 파견한 조사관이 조사하는 과정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이 과정에서 밝혀지는 내용이 핵심인데 남측 병사 두 명과 북측 병사 두 명이 우연한 계기에 친밀해지고 밤마다 함께 어울려 지내다가 결국 총기사고를 낸 것이었다. 70년 가깝게 한반도를 지배한 냉전 이데올로기를 이렇게 잘 표현한 영화를 찾아보는 것은 쉽지 않다. 이웃집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젊은이들을 적으로 갈라놓고 상대방을 괴물로 여기게 하는 그야말로 이 괴물 같은 체제를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두 영화 모두 구성원 내부에서 함께 밥을 먹고, 노래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정말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천국이 있다면 과연 이럴까? 라고 생각 할 만큼 따스했던 가족들, 그리고 남과 북의 젊은이들이 아닌가. 그런데 밖에서 이들을 바라보면 영락없는 괴물들이다. 결국 이념과 체제, 모순된 세상의 정서가 사람들을 편향되게 만들고, 때론 피해자를 가해자로 둔갑시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두 영화 모두 서글픈 결말을 맞이하는 건 필연적일 수 있겠지만 안타까운 점은 그 과정에서 체제에 희생된 주인공들의 목소리가 전부 삭제된다는 점이다. <어느 가족>에서 아들 쇼타가 아버지 오사무와 헤어지면서 결국 직접적으로 ‘아버지’라고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 입만 벙긋거리는 장면,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서로의 비밀을 간직한 채 결국 마지막 사진 컷으로 마무리하는 장면은 말하고 싶지만 말하지 못하는 주인공의 현실을 보여주고 미처 하지 못한 말의 여운을 영화적 기법으로 대신 표현해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제쯤일까.
뒤집어진 세상은 바로 잡히는 그 날. 목소리 잃은 이들에게 다시 말 할 수 있는 그 날.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갑자기 쏟아진 폭우로 300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고 주택 1,400여곳이 침수된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자연재해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에게 더 가혹하고 힘겨운 상처를 남깁니다. 자연재해가 발생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으나 국가와 사회가 부동산 투기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서민들의 안전한 주거를 보장하는데 더욱 진력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