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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3월 27일 사순절 제3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그래도 이 세상에 너의 최선을 주어라'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5:43-48

43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여라' 하고 말한 것을 너희는 들었다. 4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45 그래야만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 46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여러분 한 주간도 평화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온전하게 감싸고 있습니다. 우리를 감싸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를 지금 이 시간 풍성하게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예배에 참여하시길 부탁드립니다. 또 제가 전하는 말씀이 그저 제가 하는 ‘이야깃거리’가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 밭에 ‘들리는 말씀’이 되어 소중한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함께 말씀을 나누기 전에, 한 가지만 먼저 생각해 보고 가겠습니다. 지금 제가 드리는 질문을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시는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경건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답을 잘 작성해 주시기 바랍니다. 질문은 “당신은 최근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이 있으십니까?”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을 2가지만 드린 종이에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직접적으로 용서한 것, 또는 내 마음 속으로만 용서한 것 그 어떤 것도 상관없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한 경험 2가지를 적어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용서한 경험들이 새록새록 생각나십니까? 우리의 삶에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그다지 특별한 경험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내가 누군가에게 적개심을 품고, 분노하며, 그 사람을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는 것이 자연스럽듯이 용서하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솔직히 너무나 일상적이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한다는 거, 누군가에 섭섭한 마음을 갖는다는 것, 속으로 그 사람에게 분노했던 것!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그 사람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분노가 누그러지고, 섭섭했던 마음이 조금씩 사라지고 있습니다, 맞나요? 진짜 그렇게 하고 계십니까? 진짜 용서하고 있습니까? 분노가 누그러뜨려지고 있습니까? 섭섭한 마음들이 사라지고 있습니까?

 

조심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분노는 계속 쌓여만 가는데, 그 사람에 대한 적개심은 쌓여만 가는데, 용서하지 못할 때입니다. 그 감정을 어떤 방식으로든 해결하지 못할 때입니다. 참 신기합니다. 누군가를 적으로 상정하는 일은 참 일상적인데, 그 사람을 용서하는 일은 그다지 쉽지가 않습니다. 자연스럽지가 않죠. 더욱이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미워하기는 하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현실! 미워하는 마음은 계속해서 드는데, 용서하는 마음으로 그것을 해소하지 못하는 내 모습!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을 어둡게 만들고, 나를 불행하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원인일 것입니다.

 

 

저는 TV를 잘 보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TV는 좋아하지만 시간이 없어서 잘 보지 못하는 제가 최근에 정말 열심을 다해서 보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못 보면 다시보기로 보고, 한 번 본 것을 또 보고 또 보고 그럽니다. 진짜 이 프로그램만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황홀한 느낌조차 드는데요.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바로 ‘서바이벌 나는 가수다’입니다. 아마도 요즘 하도 논란이 많이 되어서 이 프로그램의 이름은 한 번씩 들어보신 적이 있으실 겁니다. 이 프로그램의 컨셉은 그렇습니다. 당대 최고의 노래 잘하는 가수 7명이 나와서 한주는 미션곡을 지정받고 그 곡을 자신의 색깔에 맞게 2주 동안 열심히 연습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주에 노래경연을 하여 꼴등을 탈락시키는 겁니다. 아무리 당대 최고의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라도, 혹시나 자신이 꼴등이 되어서 탈락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가장 재미있는 요소입니다. 물론 감동적인 음악과 노래는 이 프로그램이 덤으로 주는 선물 같은 것이죠. 그런데 이 프로그램이 지난 주에 논란에 휩싸이고 급기야 담당 PD까지 하차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지난 주 방손분에는 첫 번째 노래경연이 벌어졌고, 그 결과 첫 탈락자가 나왔는데, 다름 아니라 국민가수 김건모가 떨어진 겁니다. 충격적인 결과였죠. 이에 후배 가수들은 그 결과에 승복하지 못했고, 김건모의 재도전을 요구했습니다. 제작진은 난감한 상황에 빠지게 되었조. 왜냐면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은 ‘서바이벌’입니다. 투표에 의해 누군가를 떨어뜨리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존재의 이유였기 때문에 김건모를 떨어뜨려야만 했는데, 제작진은 결국 김건모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주고 말았습니다. 스스로 그 룰을 깨고 만 것입니다. 그러자 여론이 이 때부터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의가 실종되었다! 시청자를 우롱했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등등의 기사가 한 주간 인터넷을 가득 메웠습니다. 그 결과 담당PD는 교체되었고, 김건모는 엄청난 질타를 받으면서 결국 자진 하차했으며, 프로그램은 한 달간 잠정적으로 방송보류가 되었습니다. 나를 행복하게 했던 이 프로그램은 단 4주만에 이번 주를 끝으로 끝나게 됩니다.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장자연 성상납 사건에 침묵하고, 14명이나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는 쌍용자동차의 악마적인 모습에 관대한 이 사회가 왜 비단 그저 예능 프로그램일 뿐인데, 거기에 불끈하고, 정의를 들이대며 단죄할까?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담당 PD부터 출연 연예인들까지 사과에 사과를 거듭했는데도 불구하고, 결국 사람들은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현실을 보면서 지금의 우리의 시대는 ‘용서’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 시대가 아닌가 비탄해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능이라는 가벼운 공간에도 가혹하리만치 보여지는 이 냉대감은 사실 우리의 일상의 풍경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합니다. 용서가 상실된 시대, 서로를 보듬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단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시대가 되어버린 듯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용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다. 레위기 율법에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라고 했지만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를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여라!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신 것도 너무나 어려운 주문인데, 하나님처럼 우리보고 완전하라고 하시니 참으로 어렵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원수를 ‘용서’하는 것이야 말로 하나님과 가장 닮아있는 개념입니다. 또 용서는 모든 진정한 관계의 시작이자 끝인 것을 오늘 말씀은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의 병을 고쳐 주실 때, 주로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너의 죄가 사하여 졌다. 이 말이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너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흔히 성서를 구원의 역사라고 고백하는데, 그 구원의 실제 모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깡그리 무시하고, 하지 말라는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있습니다. 너희는 정녕 죽으리라고 했던 하나님의 경고에도 눈 하나 깜빡거리지 않는 그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이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도저히 용서 받을 수 없는 살인죄를 저지른 가인이 있습니다. 그것도 동생을 죽인 가인을 용서하는 것이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대홍수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류가 있습니다. 그 중 노아의 일가를 실제로 살려주시고 용서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우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까지 이 땅에 보내주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의 실제 모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흔히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고 이야기 합니다.

 

용서는 단지 피상적인 좋은 개념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진정으로 실제적인 것이고, 실은 우리의 일상에서 매번 매순간 반복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피상적인 관계에서 서로 용서를 주고 받을 수 있습니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요즘 대학생들 사이에 ‘조모임’ 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조 모임이라는 것은 교수가 학생들에게 과제를 조별로 내주고, 학생들은 그 과제를 하기 위한 목적으로만 서로를 만납니다. 이것이 조모임이죠. 다시 말해 조모임 관계는 지극히 피상적이고 사무적인 관계를 이야기합니다. 서로 배려해주는 것 같은데, 그 안에 사랑이 없습니다. 서로의 삶에 개입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서로에게 상처 안 받는 범위에서, 상처를 안주는 범위에서 자신의 목적만을 추구하는 것이 ‘조모임 관계’의 모습입니다. 이는 비단 대학생 뿐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의 자화상일 것입니다. 우리 좋은만남 공동체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삶을 돌아보십시오. 가장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는 바로 사랑과 용서가 주기적으로 반복되고, 또 그 실제적인 용서의 기록들이 쌓여가는 것이 그 관계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매번 싸우는데, 매번 속지만 아유 저 화상 하면서 못이기는척 용서하고 또 사랑하고 그러다 또 싸우고, 그것이 우리네 삶입니다. 우리 옆의 사람을 보십시오. 만에 하나 이 옆 사람에게 섭섭했다고 하면 그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없으면 섭섭하지도,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 섭섭함을 또 서로에 대한 불만과 분노를 용서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실제적인 ‘구원의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만 사람을 구원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부여받은 우리 역시 서로를 응원해주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서로를 용서해 줌으로써 구원의 행위에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감리교를 창시한 존 웨슬리가 이야기한 감리교의 특별한 구원관은 ‘성화와 완전’입니다. 점점 더 성화된 삶, 결국 점점 더 예수님처럼 성스럽게 살면서 완전을 지향하는 삶이 바로 구원으로 향하는 길인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하나님이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라고 하고 있지요. 우리의 삶은 실상 구원을 향하는 여정인 것입니다.

 

하지만 용서하는 것이 구원에 동참하는 행위이고 말은 참 쉬운데, 용서하는 것이 그리 쉽습니까? 우리가 잘 아는 ‘밀양’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고 그 힘겨움을 이겨내기 위해 서울에서 밀양으로 어쩔 수 없이 내려온 여 주인공이 있습니다. 그런데 밀양에 온지 얼마 안 되어 유괴범에게 자신의 아이를 잃게 됩니다. 이 여 주인공은 그 힘겹고 비통한 슬픔을 견디기 위해 교회에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를 죽인 살인범을 용서합니다. 아니 용서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죠. 그래서 이 여주인공은 더 심하게 타락하게 됩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스스로 용서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만에 가까운 말입니다. 마태복음 18장 21절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내 형제가 나에게 자꾸 죄를 지으면, 내가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하여야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십니다. "일곱 번만이 아니라, 일흔 번을 일곱 번이라도 하여야 한다.” 일흔번씩 일곱 번이면 490번을 용서하라는 말씀이십니다. 같은 문제를 가지고 500번 가까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어떤 말일까요? 죽을 때까지 무조건 용서될 때까지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한다는 말일까요?

사실은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베드로에게 “베드로야 너의 힘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마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완전하게 누군가를 용서하신일이 있으십니까? 연약한 인간의 힘으로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습니까?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용서하기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실상 나 혼자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현실을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일은 쉽지가 않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이런 현실 속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람들은 비이성적이고 논리적이지 못하며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십시오. 정직하면 쉽게 상처받데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정직하고 솔직하십시오. 세상을 위해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나눠 주고도 당신은 상처받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당신이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나눠 주십시오.”

오늘 말씀의 제목은 “그래도 이 세상에 너의 최선을 주어라”입니다. 힘든 세상이지만 여러분이 이 세상에 줄 수 있는 최선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것이 사랑과 용서라고 생각합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용서란 단지 신학적인 덕목이 아니라 삶의 실제적인 기술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는 기독교에서 고백하는 용서가 그저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아님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실제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한발짝 한발짝 걷고 계신가요? 어떤 때는 조금 조심스럽게 살며시 한 발자욱씩 내딛게 됩니다. 어떨 때는 담대하게 성큼성큼 그 걸음을 재촉 할 때가 있지요. 그런가 하면 어떤 때는 불안과 두려움으로 발이 땅에 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여정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그 발걸음 하나님께서 나와 동행해 주신다는 그 사실만 잊지 않는다면 나의 걸음이 조금 느릴지라도, 나의 걸음이 조금 불안할 지라도, 내 걸음이 가는 곳곳에 생명과 평화의 향기가 날리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기간입니다. 평상시에도 신앙인이라면 예수님처럼 느끼고,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사순절 기간은 우리가 특별히 좀 더 의식적으로 나의 한발짝 한발짝을 예수님과 함께 걷는다. 또 예수님처럼 따라 걷겠다고 다짐하는 기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이 우리의 실제적이 구체적인 상황 가운데서 일어나고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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