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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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4월 10일 사순절 제5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달라져 간다'

이관택

본문: 사도행전 2:37-42

37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이여,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말하였다. 38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 각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용서를 받으십시오.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39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와 또 멀리 떨어져 있는 모든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모든 사람에게 주신 것입니다." 40 베드로는 이 밖에도 많은 말로 증언하고, 비뚤어진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그들에게 권하였다. 41 그의 말을 받아들인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다. 이렇게 해서, 그 날에 신도의 수가 약 삼천 명이나 늘어났다. 42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

여러분 혹시 ‘강박증’에 대해서 들어보셨나요? 스트레스가 많은 현대사회에는 ‘강박증’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다고 합니다. 강박증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로 우리 삶에서 드러나는데요. 아주 일상적이고 소소한 부분에서 나타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트랜스포머 여자 주인공인 헐리우드 스타 메간폭스는 인터뷰를 통해 자신은 공공화장실을 절대 이용하지 못하고, 식당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전혀 사용하지 못하는 강박증을 앓고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의학적으로 보면 사람이 평생 살면서 평균적으로 강박증을 경험하는 확률은 2.5%라고 합니다. 2.5%라고 하니까 적은 숫자 같지만 한시간이면 평균 90초 동안이나 어떤 일에 강박을 경험다는 것이고, 하루로 따지면 자그마치 36분이나 강박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현대사회는 각종 스트레스가 넘쳐 나기 때문에 이 비율은 성인들 뿐이 아니라 학생, 어린이, 심지어는 영아들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하니 가히 지금 우리 사회는 강박증이 넘쳐나는 시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런 강박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영화가 있습니다. 바로 잭니콜슨이 주연한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입니다. 잭니콜슨이 연기한 이 영화의 남자 주인공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입니다. 이 사람의 강박증은 단순히 내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겉으로 표현이 됩니다. 예를 들면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을 씻습니다. 진짜 미친 듯이 손을 씻고 또 씻죠. 집에 들어 갈땐 자물쇠를 5번씩 잠갔다가 열었다가 합니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럭 선을 밟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식당에선 항상 앉았던 자리에 앉습니다. 또 자신의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다닙니다. 영화는 이런 주인공의 모습을 매우 유머러스하게 담습니다. 저 사람 왜 저러지? 이런 생각이 들게 말이죠. 또 이 주인공은 김구라 저리가라 하는 독설가입니다. 자신의 강박을 타인에게 상처주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강박증을 경험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굉장히 신경질적이라 합니다.

저는 사실 좀 둔감한 편입니다. 옆에서 누가 아무리 코를 골아도 잘자고, 식사할 때 쩝쩝 소리를 내면서 먹어도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습니다. 사무실이 더러워도 제 눈엔 그게 잘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냥 편안합니다. 특히 씻지 않는거, 밥 먹다 흘린 음식 주워 먹거나, 땅에 떨어진 과자 주워 먹는건 저의 특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예민하지 못하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최소한 강박증과는 거리가 참 멀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참 힘들게 산다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잊고 있던 제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떠올리니 지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나의 모습이 생각이 났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아침 6시에 자동으로 눈을 떳던 아이였습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예습을 하고, 그 날 배워야 내용들을 읽어야 직성이 풀렸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때는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가는데 걸어서 20분정도 소요되었는데, 나타나는 둥그런 하수구 뚜껑을 두발로 꼭 밝아야 했습니다. 혹시 하수구 뚜껑을 지나치기라도 한다면 다시 돌아가서 그 뚜껑을 꼭 두발로 밟고 지나갔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전보대의 숫자를 세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는 학교에 거의 다 갔는데 그 때까지 세던 전봇대 숫자를 잊어 버리면 다시 집까지 돌아가서 처음부터 숫자를 다시 세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영화에서 나왔던 남자 주인공은 진짜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정도 입니다. 어떻게 그런 내 모습을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신기할 정도 이지만 누구나가 저와 같은 경험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제가 ‘강박증’이야기로 말씀을 시작한 이유는 바로 이 강박증의 기저에는 ‘불안’이라는 놈이 자리잡고 있다라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 입니다. 영화 속 잭 니콜슨이 문을 다섯 번씩 잠갔던 이유도, 제가 무작정 전보대의 숫자를 세었던 이유도 잘 살펴보니 어쩔줄 몰았던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의사들도 강박증의 가장 큰 원인을 ‘불안감’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몇 년전 장동건이 내 인생의 책이라고 소개해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책이 있죠 알랭드 보통이 쓴 “불안”이라는 책입니다. 얼굴 잘 생겼지 돈 잘 벌지, 인기 많지 도저히 모자랄 것도 없고, 불안할 것도 없을 것 같은 장동건도 불안하다. 여간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지만 실제로 이 ‘불안’이라는 놈은 항상 우리의 삶을 잠식해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강박증세에 숨이 막혀오지 않는가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함께 읽은 성서 속의 우리 믿음의 선조들은 어떠합니까? 오늘의 말씀은 사도행전 2장입니다. 사도행전은 잘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고 남겨진 사람들의 신앙적인 고군분투가 그려져 있는 복음서입니다. 나와 함께 사람을 낚고, 세상을 구원하고, 세상을 바꿔보지 않으련? 하면서 따뜻하게 다가오신 예수님을 쫒아다녔던 예수님의 제자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로써 이 땅의 왕이 될줄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그만 로마 병사들에게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절망에 빠지고 다급해 집니다. 두렵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살길을 찾아 도망가게 됩니다. 그런데 몇일 후 죽은 줄만 알았던 예수님께서 다시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제자들은 한편으론 너무나 죄송하고, 한편으론 너무나 기뻤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복음전하라는 당부를 하시고 이 땅을 다시 떠나십니다. 결국 제자들은 다시 이 땅에 남겨집니다. 예수님께서 처형 당하실 때 만큼의 절망감은 아니지만,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나처럼! 예수님의 이런 명령을 받은 제자들은 막막함과 막연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처럼 우리도 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실상 나는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이미 예수님을 배신한 비겁한 사람이 아닌가! 예수님 없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초대교회가 형성되기 이전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극심한 스트레스에 쌓여 있었을 겁니다. 매우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누가 모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밤마다 함께 모여 기도했는지도 모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일어난 성령체험은 이러한 배경에서 발생합니다. 오늘 읽은 부분은 이 성령체험 사건 이 후 변화된 베드로를 보여줍니다. 그 누구보다도 무식하고, 때론 겁도 많고, 때론 비겁했던 베드로가, 그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를 시작으로 많은 제자들이 달라집니다. 이 전에 볼 수 없었던 힘들이 생겨납니다. 이 힘을 바탕으로 초대교회들이 세워지는 것입니다.

달라집니다. 미래를 모른다는 것이 그 동안 불안함으로, 두려움으로 자리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설레임으로 궁금함으로 달라집니다. 초대교회 믿음 선조들은 이 달라지는 경험을 했습니다. 똑같이 알 수 없고, 무력한 우리들인데, 어째서 달라질 수 있는가? 이것이 바로 신앙의 신비입니다. 제가 전보대를 세던 시절 어떻게 달라질 수 있었을까? 아마도 제가 신학교에 가게된 비밀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요

불안은 미래에 대해 알 수 없는 인간의 한계 때문에 발생합니다.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길, 막막한 이 길 앞에는 무엇이 있을까? 지금까지 지나온 여정에 진흙탕이 좀 많았고, 가시덤불을 헤쳐 오는데 진땀을 뺐고요, 건들거리는 녀석들이 시비를 걸어서 곤욕을 당했던 사람들에게는 지금 딱 서서 내 앞에 끝없이 펼쳐진 이 길을 볼 때, 우선 두려운 마음이 들것입니다. 또 그냥 자동차 타고, 인라인 타고 친구들과 시시덕 거리면서 룰루 랄라 살아왔던 사람에겐 자신의 앞에 놓여진 길이 그저 즐거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내 앞에 놓여진 인생의 길은 아무도 모릅니다. 너무 좋을 수도 있고 너무 좋지 않을 수도 있고, 그냥 밋밋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길이 어떤 길이냐에 따라 이 길에 때한 생각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이 길에 대한 마음가짐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여행을 가는 길입니까? 지금 일터에 가는 길입니까? 지금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입니까?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어디로 향하는 길이냐에 따라 이 길을 걷는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그냥 이 길이 좋은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가길 원합니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고, 돌부리 하나 흙먼지 하나 내 몸을 성하지 않게 하는 것이 장땡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평생 자동차 안에만 있길 원하는 사람인가 봅니다. 어디로 가든지 그저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빨리, 좀 더 편안히 가면 되는 인생이죠. 사실 이런 사람은 이 길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합니다. 알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죠. 좀 편하게 살지 모르지만, 남들의 부러운 시선을 받을지 모르지만 그저 죽음을 향해 질주하는 모습 아닙니까?

어떤 사람은 여행을 가는 길입니다. 모든 것이 즐겁습니다. 신기합니다. 흙먼지가 때론 내몸을 더럽히고, 찝찝한 땀방울이 온몸을 적셔도 괜찮습니다. 그것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여행길일 뿐입니다. 나는 이길의 주인이 아니죠, 그저 여행객을뿐, 이 길에서 나의 가장 큰 관심은 ‘나’의 즐거움입니다. 즐겁지 않으면 에잇 시간낭비했다. ‘나’에게만 집중하는 인생. 내가 걸어온 길에 쓰레기가 쌓이든 말든, 그 길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이 굶어 죽던지 말던지 여긴 내 집이 아니니까, 저 사람들은 내 이웃이 아니니까 난 그저 여행 온 거니까라는 생각으로 인생을 가볍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은 순례를 가는 길입니다. 순례길은 신앙의 성지를 돌아보는 길입니다. 나의 걸음 걸음을 살펴보고, 하늘의 구름과 일렁이는 바람과 길가의 작은 꽃들 속에서 하나님을 발견하는 신앙여정입니다. 순례길에서는 내가 빨리 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편하게 가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 길 위에서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느낄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음성을 얼마나 들을 수 있는가에 집중하는 길이 순례길입니다. 또 순례길은 하나님에게만 집중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길을 함께 걷는 많은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때론 그 길 주변에 살고 있는 이들과 몇일씩 함께 묶기도 합니다. 그 속에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소중한 삶의 의미들을 깨닫게 됩니다.

나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한번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 가던 길 잠시 서서 내 길의 방향과 목적을 계속해서 수정해가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앞에 펼쳐진 장애물들은 어떻게 할 수 없지만 그저 막연한 불안함과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대감과 설레임으로 그 길을 걸을 수만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신앙여정이 됩니다. 신앙여정은 계속되는 문 앞에 봉착하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큰문을 열고 들어갔는데, 또 다른 문이 나오고, 그 문을 따고 들어가니까 또 다른 문이 나오는 과정입니다. 아마도 그 문을 열 때마다 우리의 신앙은 또 다른 국면을 맞이하고 더 큰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두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내 생각을 얼마나 지우면서 살아가고 있는가”입니다. 내 생각에 집착하니까 두려움이 생깁니다. 불안하죠. 너무나 불완전한 내 생각을 너무 믿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 생각을 조금씩 지워가는 연습도 하셔야 합니다. 말이 안되는 것 같아도, 생각을 머춰야 할때가 옵니다. 내 욕망을 멈춰야 할 때도 옵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이 무엇일까 골똘히 생각해야 할 때가 옵니다. 그 때에 멈추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타자와의 만남에 얼마나 집중하는가”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사람을 통해 나에게 다가오실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인생 살아오면서 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 때는 반드시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있기 마련입니다. 좋은 친구나 선생님, 때론 예상치 못한 어떤 사람을 통해 우리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그 만큼 타인과의 만남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나와 비슷한 수준이 사람들이 아니라 더욱 가난하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삶을 볼때 아래로 향하는 삶, 그래서 결국 가장 낮은 곳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삶이 얼마나 행복한지, 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겟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달라져 갑니다. 하지만 어떻게 달라지느냐가 중요합니다.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의 잭니콜슨은 사랑을 시작하면서 달라졌습니다. 그의 강박증이 사람을 향한 세심한 배려심을 달라졌습니다. 동물을 학대하던 사람이 동물을 사랑하게 되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던 사람이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이, 또 초대교회 베드로와 같이 달라지는 기적들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이웃에게 집중하는 삶은 충분히 우리의 길을 두려움과 불안함이 아니라 설레임과 기대로 달라지게 할 것이라 믿습니다. 죽음 뒤에 생명이 있고 고난 뒤에 부활이 있습니다. 지금 불안하신 분들, 그 불안 뒤에는 반드시 희망의 싹이 있을 겁니다. 이번 사순절기 통해 진정으로 달라지는 우리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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