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3일 성령강림절 제3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내 일상의 좁은문'
이관택
본문: 마태복음 7:13-21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14.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15.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 16.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어떻게 포도를 따며, 엉겅퀴에서 어떻게 무화과를 딸 수 있겠느냐?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19.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찍어서 불 속에 던진다. 20. 그러므로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21. 나더러 주님 주님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아버지의 역주행
한 아이가 TV를 보고 있습니다. TV에서는 뉴스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뉴스에서는 아나운서가 나와서 긴급 속보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현재 서해안 고속도로에 어떤 미친 운전자가 20분째 역주행으로 운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순간 아이는 겁에 질렸어요. 서해안으로 출장을 간다던 아버지 생각이 번쩍하고 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아빠! 지금 서해안 고속도로에 어떤 미친놈이 역주행으로 운전하고 있데요. 괜찮으세요?” 그러자 아빠는 대답합니다. 아들아! 안그래도 지금 20분째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차들이 미친 것 같구나!
여러분 이 이야기를 잘 살펴보면 지금 역주행을 누가 하고 있습니까? TV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역주행을 하는 미친 사람이 누굽니까?
강정마을 이야기
저는 지지난 주간에 제주도 강정마을이라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그동안 별로 좋지 않은 학교들을 나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초등학교나 중학교 때 누구나 한번쯤은 가본다던 그 제주도를 이번에 처음 다녀왔습니다. 좋은만남 성도님들께서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참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구름의 모양, 바람의 움직임, 심지어 풀 냄새조차 육지와는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주도에 간 첫 날부터 상황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았습니다. 강정마을이라 곳은 벌써 4년 전부터 해군기지 건설이 예정된 장소였습니다. 그 시작부터 워낙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갈등이 참 많았기 때문에 마을에 들어가기에 앞서 궁금하기도 하고, 약간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저희가 그 마을에 도착했을 때 큰 사고가 났습니다. 몇 달전부터 이 마을에 상주하면서 주민들과 함께 해군기지반대 싸움을 하고 있는 송강호 선생님이란 분이 있습니다. 이분이 해상시위도중 해군들과 건설사인 삼성의 인부들에게 폭행을 당해 병원에 실려가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 동안 마을 주민들의 반대가 거세서 육지 해안 쪽은 공사하기가 어려우니까 해군은 엄청나게 큰 바지선을 가지고 바다 한 가운데서부터 공사를 진행해 오고 있었는데요, 그것을 마을주민들이 통통배를 타고 가서 해상 한 가운데서 막다가 일어난 사건입니다. 이 일로 송강호 박사님은 자칫 생명까지 잃을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마을주민들의 분노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희는 기독교 생명평화순례단이라는 이름으로 그곳에 방문했었는데, 가자마자 이런 사건이 일어나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해군사업소에 가서 항의하고, 그곳에서 기도회를 진행했습니다. 그 날 자정이 다될 때까지 촛불을 들고 우리는 그곳에서 농성을 하였는데, 그러면서 그 동안의 마을 주민들의 사정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강정마을에서의 2가지
저는 강정마을에 있었던 3일 동안 딱 두 가지가 생각납니다. 첫 번째는 마을 주민들의 절실함이었습니다. 누가 뭐라해도, 마을을 지키겠다는 절실함. 말도 안 되는 공권력의 거대한 힘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모습, 조금 투박한 말씀이셨지만 세계평화에 이바지하겠다며 해맑게 웃으셨던 그 미소! 그냥 평범한 분들이지만 누가 뭐라해도 이 분들이 품고 있는 그 마음, 그리고 그 절심함은 진짜다!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두 번째는 강정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환경이었습니다. 왜 이 곳에 해군기지가 들어와서는 안되는지에 대해 그 어떤 수려한 말보다 그 존재자체로 더욱 진솔하게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수만개의 구멍이 뚫여있는 현무암으로 된 바위들이 해안가를 수놓고 있습니다. 그곳을 구럼비라고 부르는데, 이 바위들이 없어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아 해군기지는 안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뮬론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 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나 여기 살아있다고 버젓이 이야기 하는 마을 주민들, 또 작은 생명들의 목소리’를 직접 듣게 된다면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의 논리도 귀에 안 들리게 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주도에 직접 방문에서 얻은 가장 큰 성과는 바로 이 작은 목소리들의 큰 울림이었습니다.
역주행하는 강정마을?
아까 처음에 역주행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TV 아니운서까지 이 아버지를 역주행하고 있는 미친 사람 취급을 합니다. 하지만 과연 이 아버지가 진짜 역주행을 하고 있다고 단정지을 수 있을까요? 아니면 혹시 다른 사람들이 역주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결과는 그 길의 끝에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누가 제대로 된 목적지로 가는지 말입니다. 강정마을 주민들이 외치는 이야기 또한 역주행하는 아버지와 같은 처지일지 모릅니다.
현재가 미래를 결정한다.
오늘 성서 말씀에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산상수훈을 듣고 있는 수많은 무리들에게 하고 계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그 중에서 그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결국 이 말씀의 핵심은 우리의 현재가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 내가 어떤 방향으로 길을 가고 있는 지에 따라, 지금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느냐?에 따라 당신을 둘러싼 잠시 후의 세계가 달라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 하나님께서 명한 곳으로 떠납니다. 그 발걸음이 결국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를 따라가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만큼 예수와 가까워져 있겠지요. 지금 돈 버는 일을 골똘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그 만큼 그 돈과 가까워 질 것입니다. 어느쪽이든 지금 내가 관심을 두는 만큼 달라집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부분에 관심을 집중하면서 살아가고 계십니까? 지금 더불어 사는 쪽에 관심을 두신다면 어떻게든 누군가와 더불어 살고 있겠구요. 경쟁 체제에서 살아남는데에 관심을 둔다면 그 경쟁체제의 결과에 따라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신 만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소외된 이들과 함께 하신 것만큼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삶은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 요소가 한데 엉켜 있지요. 삶의 순간순간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것이 그리 쉽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향점은 정할 수 있어요.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 삶의 원칙 같은 것 말입니다.
2011년 대한민국은 미치지 않았는가!
어제 밤 늦게 아버지가 퇴근을 하시고 TV를 보시더군요. 가만보니 우리나라 아이돌 가수들이 프랑스에 건너가서 공연을 하는 장면이 나왔습니다. 진짜 우리나라 가수들의 공연에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춤을 추고 눈물을 흘리고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을 보시면서 아버지도 국위선양하는 소녀시대가 흐믓하신지 노래가 생각보다 좋다는 둥 다른 나라 얘들보다는 우리나라 얘들이 몸매도 이쁘고 얼굴도 이쁘다는 둥 연신 칭찬을 하십니다. 저는 그 말에 화들짝 놀랐습니다. 아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그 만큼 이쁘구나, 그 만큼 몸매도 좋구나 그래서 그 만큼 많이 죽는구나!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더라구요. 아 우리나라 자살하는 사람이 가장 많은 이유와 우리나라 사람들의 몸매가 좋은 이유가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내 주변을 보면 젊은 여성 10명중 9명은 다이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살빼야지 살빼야지 노래 부르지 않는 사람은 제 주변에 양진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거 정말 문제가 있는 나라 아닙니까?
우리나라가 경제성장도 되고, 1인당 교육 수준도 높아지고, 해외 유학가는 사람도 많아지고, 박사도 많아지고, 골프치는 사람도 많아지고, 명품도 많아지고, 고급 아이스크림 먹는 사람도 많아지고 그런데, 그 만큼 우울증도 많아지고, 그 만큼 스트레스도 많아집니다. 그 만큼 자살하는 사람도 많아집니다.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의 현재, 행복한가요? 잘살고 있습니까? 지금의 우리가 잠시 후의 미래를 결정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가 달려가고 있는 방향이 우리의 잠시 후를 결정하게 되는데, 10년 후 대한민국 미래가 있습니까? 지금 현직 중학교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구요 제가 “요즘 학교 어떠세요? 아이들 가리키시는거 좋으세요?” 하고 묻자 그 선생님께서 “예 아이들만 없으면 다 좋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더라구요” 우리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는 삶일까요?
부탄의 국민총행복지수
여러분 부탄이라는 나라를 아십니까? 어린 나이에 왕이 된 부탄국왕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국민총행복지수”를 제창했습니다. 보통은 GNP 국민총생산을 이야기하잖아요? 우리나라의 경제성장률, 뭐 삶의 등급 같은 것은 이 국민총생산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얼마나 많이 생산했는가?로 우리 삶의 질을 판단하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예도 있습니다. 비행기 한 대가 추락해서 150명이 죽으면 국민총생산이 2억달라가 올라간다고 합니다. 보험회사, 사고 복구 비용등이 모두 생산량에 포함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실은 국민총생산량의 수치가 올라간다고 개인이 잘 사는 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건 질문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 ‘그 집 얼마나 잘사니?’가 그 집 재산이 얼마나 있어? 그 집 아프트에 살어? 반지하에 살어? 하지만 부탄에서 제정한 국민총행복지수는 국민의 ‘행복’이 기준이 됩니다. 결국 우리의 물질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로 나의 일상 가운데서 행복을 찾아내는 것이 ‘부탄’이라는 나라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삶의 방향성입니다.
순록의 끈
스위스 마을에 순록들이 있습니다. 이 순록들은 처음에는 광활한 목초지에서 자유롭게 살았다고 합니다. 목동들도 그것이 좋았지요. 그런데 관광객들이 들이 닥치기 시작하자 목동들은 그 관광객들의 짐을 순록들에게 나르게 하였습니다. 결국 순록들은 짐을 나르는 짐승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들은 짐을 나르기 용이하기 위해 자신의 뿔과 다리 사이에 끈으로 연결시켜 고개를 들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하늘을 조미 못하는 순록 고래를 숙이고 어딘지도 모르고 땅만쳐다보며 걷고 있는 순록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실상 하늘을 보는 존재들이건만 무언지 모르는 끈이 우리로 하여금 하늘을 보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끈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돌이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왜냐면 이렇게 사는 것이 별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하게 살길 원하시는데, 모두가 역주행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상스럽게 하나님과 멀어지는 길을 택합니다. 그런데 별로 행복하지도 않습니다. 어떤 시인은 혁명은 바로 내 삶에서의 수많은 이별들로 인해 가능하다고 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패턴과 이별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 이제 내가 좀 다르게 살아야겠구나! 라고 마음먹은 순간에도 우리는 현실에서 너무나 무력하다는 사실입니다. 미친사람 취급당하기 일쑤고 비난 받기 일쑤지요. 오죽하면 예수님도 그러한 비난을 별명삼고 살았습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오늘 성서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좁은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생명으로 이끄는 문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어떻다고 합니까? 그 가는 길도 너무나도 좁디좁다! 또 그 문도 좁다. 결국 사람도 많이 안 간다!
하지만 저는 이 좁은 문이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문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굉장히 행복한 비밀 통로와 같습니다. 하지만 좀처럼 발견하기 힘든 작은 문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좁은 문에 대해 그 수많은 사람들에게 설교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중의 몇몇 소수만 나와 같이 이 좁은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분명히 가지고 있는 좁은 문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문은 무엇일까요? 또 그 문은 어디에 있을까요? 사실 그 문을 찾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저는 그 문이 하나님의 뜻과 통하는 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일상 가운데, 어떤 선택,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바로 그 문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결국 나의 일상을 찬찬히 잘 살펴보는 것이 이 문을 찾는 가장 빠른 길입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초라한 옷차림과 엉터리 가구들을 부끄럽게 여기지만 그보다는 초라한 생각과 엉터리 철학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나의 일상에 숨어있는 좁은 길을 찾는 길은 나의 외적인 풍모나 보열줄 꺼리 아니라 내면의 작은 공간입니다.
릴케 “너의 일상이 초라해 보인다고 탓하지 마라 풍요를 불러낼만한 힘이 없는 너 자신을 탓하라” 우리에게는 모두가 각 자의 좁은문이 있습니다. 그 문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수 있게하는 힘이 되며, 발견하지 못하는 일상의 신비한 기적들을 닭살돋게 느끼게 하는 에너지원 같은 곳이겠지요. 결국 하나님을 내 안에 모신다는 것, 이웃의 아픔을 나의 아픔과 같이 공감할 수 있는 길은 내 안에 좁은 문을 두드리고 찾는 길과 연결됩니다.
과연 내 일상의 좁은 문은 어디에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