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7월 10일 성령강림절 제4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엘리야의 절망
이관택
본문: 열왕기상 19:1-10
1 아합은, 엘리야가 한 모든 일과, 그가 칼로 모든 예언자들을 죽인 일을, 낱낱이 이세벨에게 알려 주었다. 2 그러자 이세벨은 엘리야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였다. "네가 예언자들을 죽였으니, 나도 너를 죽이겠다. 내가 내일 이맘때까지 너를 죽이지 못하면, 신들에게서 천벌을 달게 받겠다. 아니, 그보다 더한 재앙이라도 그대로 받겠다." 3 엘리야는 두려워서 급히 일어나,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하여, 유다의 브엘세바로 갔다. 그 곳에 자기 시종을 남겨 두고, 4 자신은 홀로 광야로 들어가서, 하룻길을 더 걸어 어떤 로뎀 나무 아래로 가서, 거기에 앉아서, 죽기를 간청하며 기도하였다. "주님, 이제는 더 바랄 것이 없습니다. 나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나는 내 조상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습니다." 5 그런 다음에, 그는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서 잠이 들었는데, 그 때에 한 천사가, 일어나서 먹으라고 하면서, 그를 깨웠다. 6 엘리야가 깨어 보니, 그의 머리맡에는 뜨겁게 달군 돌에다가 구워 낸 과자와 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먹고 마신 뒤에, 다시 잠이 들었다. 7 주님의 천사가 두 번째 와서, 그를 깨우면서 말하였다. "일어나서 먹어라. 갈 길이 아직도 많이 남았다." 8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서, 밤낮 사십 일 동안을 걸어, 하나님의 산인 호렙 산에 도착하였다. 9 엘리야는 거기에 있는 동굴에 이르러, 거기에서 밤을 지냈다. 그 때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엘리야야,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체리향기가 날 살리네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1997년에 만든 ‘체리향기’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주인공 바디는 자동차를 몰고 황량한 벌판을 달려갑니다. 그는 지나치는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자신의 차에 동승할 사람을 애타게 찾습니다.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은 다름이 아니라 수면제를 먹고 누운 자신에게 흙을 덮어 줄 사람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도와 줄 사람! 하지만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는 그의 간절한 부탁에도 사람들은 고개를 젓습니다. 애띤 얼굴의 군인도, 온화한 미소의 신학도도 죽음이란 단어 앞에선 단호하게 외면할 뿐입니다. 드디어 한 노인이 그의 제안을 수락합니다. 그 노인은 박물관에서 새의 박제를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노인은 절망에 빠져 자신의 목숨을 끊으려 하는 바디에게 죽지 말라고 강요하거나 설교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하나씩 하나씩 들려줍니다. 영화의 제목 ‘체리향기’는 이 노인이 바디에게 해주는 이야기 속의 소재입니다.
노인이 바디에게 이야기합니다. “결혼한 직후 내게는 온갖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네. 난 너무 지쳐 끝장을 보기로 마음을 먹었지. 어느 날 아침 새벽 동이 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실었어. 난 자살하기로 굳게 마음을 먹었지. 뽕나무 농장에 도착했는데, 아직까진 해가 뜨지 않았어. 나무에 밧줄을 몇 번이고 던졌지만 계속 걸리지 않는거야! 짜증나게도 말이지. 그래서 난 나무 위로 직접 올라가서 밧줄을 단단히 동여맸어. 그 때 내 손에 뭔가 부드러운게 만져졌어. 바로 체리였네. 아주 탐스럽게 익은 체리였어. 난 그걸 하나 먹었어. 과즙이 가득하더군. 그리곤 두 개, 세 개를 계속해서 먹었네. 그 때 마침 산등성이에 태양이 떠오르더군. 정말 장관이었지. 세상에 그 아름다운 일출을 처음 본 거야 그것도 죽으려고 올라갔던 나무 위에서 말이지~ 갑자기 학교에 가는 아이들의 소리가 들렸어. 그 얘들이 날 보며 나무를 흔들어 달라고 했어 내가 나무를 흔들자 체리들이 바닥에 떨어져 아이들이 그것을 주워 먹었지. 그 모습을 보니 행복하더군. 난 그길로 체리를 주워서 집으로 돌아왔네. 아내는 그 때까지도 자고 있더군. 일어나서 그 체리를 아주 맛잇게 먹었어. 결국 그 체리가 내 생명을 구했네.
이 ‘체리향기’라는 영화는 현재 죽고 싶어하는 한 사람이 과거에 죽고 싶어했던 사람을 만나면서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노인은 죽음을 시도하다가 체리향기를 만나면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고 싶어하는 버디의 곁을 지켜줄 수 있었습니다. 버디에게 있어서는 이 노인이 마치 체리향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결국 ‘체리’라는 것은 우리 일상에 너무나 흔한 것이죠. 하지만 그 진가를 잊고 살 때가 많습니다. 참 특별한 것도 아니죠. 달콤하고, 소소한 즐거움을 느끼게 하는 작은 과일일 뿐입니다. 그러고 보니 즐거운 인생과 행복한 인생은 좋은 사람과 함께하는 한 끼 식사, 또 커피한잔 나누면서 하는 이야기 속에 들어 있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돌아보며 정말 행복했다라고 회상하는 순간들은 실상 엄청난 사건들, 뭔가를 크게 성취한 일들은 아니지 않나 싶습니다. 아주 흔하고, 일상적이지만 그 안에서 발견하는 기쁨의 순간들이 너무나 소중하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의 뜻대로 산다는 것은 바로 살아가면서 이 체리향기를 만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만난 체리향기를 절망에 빠져 있는 누군가에게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강요할 필요가 없습니다. 설교할 필요도 없습니다. 단지 내가 맡은 체리향기, 내가 똑똑히 느꼈던 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전해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이야기 해주는 것입니다. 특별하지 않더라도, 삶을 풍성하게 채워주는 작은 체리향기처럼 말이죠. 여러분은 하나님을 통해 그러한 경험을 하신 적이 있으십니까?
현재의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쫒아 살다가 엄청나게 좌절하고, 자신을 비난하면서 살지 않는가 돌아봐야겠습니다. 해병대 총기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난 한 주간, 여러분의 일상 가운데도 큰 파도와 같은 여러 사건들이 우리들의 마음을 넘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매일같이 떠오르는 태양이 있듯이, 체리향기 보다도 더욱 달콤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있듯이, 나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의 일상 속에서 크고 작은 기쁨들을 공급해 주시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내 인생은 공기와 같이, 물과 같이 가장 소중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 참 이상하지~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제가 힘이 들 때, 많이 읽는 구절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엘리야는 이세벨에게 위협을 느껴 정처 없이 떠도는 도망자 신세 입니다. 얼마나 두려웠냐면 이세벨의 경고의 메시지를 듣자마자 엘리야는 급히 일어나서 목숨을 살리려고, 도망쳤다고 합니다. 그는 브엘세바로 가서 자신의 종을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갑니다. 왜 광야로 들어갔을까? 남겨진 종은 엘리야의 그런 모습을 처음 봤을 겁니다. 그렇게 위풍당당했던 자신의 선생님이 초라하게 겁에 질려서 도망다니는 것도 처음 봤는데, 뭔가 대단한 결심을 한 듯 자신을 혼자 남겨두고, 홀로 광야로 떠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열왕기상 19장은 그 바로 앞에 위치한 18장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열왕기상 18장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은 아합왕이 통치하고 있습니다. 아합왕은 이방 여인 이세벨과 결혼을 하였는데, 이 여인은 바알과 아세라 즉 우상신을 섬기는 여인이었습니다. 물론 이 전부터도 풍요의 신이었던 바알을 알게 모르게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이 있었지만, 아합왕 시대에는 아예 대놓고 바알과 아세라를 섬길 것을 장려하였습니다. 이에 반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들은 발을 붙이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이세벨은 하나님의 예언자들을 학살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엄혹한 시대에 하나님의 정의를 세상에 드러낸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그런 엘리야가 지금 안타까운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뒷모습엔 절망이 가득합니다.
엘리야는 홀로 하룻길을 더 걸어서 로뎀나무 그늘 아래 주저앉았습니다. 로뎀나무가 뭐 특별한 나무는 아니고, 그 당시 광야에서 지나다니는 사람의 그늘이 되어주었던 흔한 나무였습니다. 엘리야는 이 나무 그늘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청했다고 합니다. 자살시도까지는 아니지만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삶을 포기하겠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내려놓겠다는 뜻입니다. 과연 무엇이 그를 이렇게 절망의 끝까지 몰고 간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이 너무나 아이러니 합니다. 왜냐면 엘리야가 이런 절망을 맛보기 바로 전,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바로 앞 내용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과의 대결에서 승리하는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은 성서 66권을 통 털어 가장 선명하게 하나님의 힘을 나타내고, 아무리 세상 권세가 강하고, 불의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정의는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면서 그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아합왕의 협박에도 겁내지 않고 그 장면을 만들어낸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정말 대단합니다. 그런데~ 그 승리 직후 자살까지 결심하는 엘리야의 이 극단적인 절망감은 어디서 왔을까 하는 것이 바로 저의 궁금점입니다.
인생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세상을 호령할 것 같은 사람도 어느새 움추려 드는 것, 왜 그럴까? 하지만 저의 이런 궁금점은 이 본문을 읽으면서 힘이 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가 힘들 때 이 본문을 보는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나약함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 있는 부분이고 두 번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절망감은 여러 이유들 때문에 생겨납니다. 엘리야의 절망감의 이유를 딱히 하나로 분석할 수 없습니다. 뭔가를 해냈다는 교만함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이세벨의 협박을 받고 느끼는 두려움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서 일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뛰어난 성취를 했다고 해도, 절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나님께 크게 쓰임을 받은 믿음의 선조라 해도 때론 나약해 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에 공식이 없다는 것입니다.
딱 거기까지가 좋았는데~
제가 6개월에 드라마를 1편 정도씩 봅니다. 이번 학기에는 특별히 ‘최고의 사랑’이라는 드라마를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이름도 멋지죠! “최고의 사랑”이라~ 전 처음에 그 이름을 듣고 이것이 로맨틱 코메디라고 생각해지 못했습니다. 뭔가 더욱 숭고한 주제를 다룰 것 같은 이름이었습니다. 하여간 방현섭 목사님마저 ‘나 독고진이야~’ 외치게 한 정말 최고의 드라마인데요. 결국 주인공 남녀가 결혼해서 아기까지 낳아 잘 먹고 잘사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아직 결혼을 안 한 저 같은 사람이야 남녀가 사랑하고 그 끝이 결혼하는 것으로 끝나는 스토리에 만족할 수 있다지만, 결혼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왜 결혼하는 것을 해피엔딩으로 생각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왜냐면 제 경우에 짝사랑하던 어떤 주인공이 우여곡절 끝에 그가 사랑하는 사람과 연애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나는 드라마를 본다면 전혀 행복해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 사귀어 봐라~ 하면서 한숨이 나오지 와 행복하겠다! 설레겠다! 라는 상상이 별로 되지 않습니다. 실제 우리 인생이 그런 것 아닙니까? 딱 거기까지는 엄청 좋았는데, 거기서 멈추는 게 아니잖아요. 연애하고, 결혼하고, 애 낳고, 등등 멈춰지지 않는 것이 인생 아닙니까? 그래서 최고의 사랑 시즌 2가 나온다면 첫 장면은 ‘최고의 커플’이 얼마나 힘들게 일상을 살아내는가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것입니다.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은 딱 드라마에나 나오는 거다! 딱 거기까지가 좋다!
성공 이후가 궁금하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성공이나 목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서울대에 들어가고자 초등학교 때부터 목표를 잡은 아이가 있지요. 그런데 서울대를 들어간다고 그 아이의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성공 ‘이후’가 존재합니다. 사실 그것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성공 이후를 상상할 수 없는 것이 연약한 인간의 한계가 아닌가 생각하지만, 신앙은 죽음 이후까지도 상상하고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기적인 성공과 목표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원히 사는 원대한 꿈을 갖는 것입니다.
신앙은 소설이 아닌 현실
우리는 흔히 뭔가를 이루면 이야기가 끝이 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공해도 그 뒤의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저는 엘리야의 이야기를 보면서 신앙은 기승전결이 있는 소설이 아니구나! 신앙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리얼 스토리다. 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론 흔들리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한다. 성공했어도 바로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 나락 속에서 나를 건져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말씀의 중반부를 보시면 절망 속에서 모든 것을 포기한 엘리야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로뎀나무 그늘 아래서 이제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자포자기한 엘리야에게 다가가시는 하나님! 결국 그를 회복시켜 다시 위대한 선지자로 들어 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엘리야에게 주시는 회복의 방법이 몇 가지 나눠집니다. 초반부는 일단 먹여주시고 재워주십니다. 먹는 것과 자는 것! 즉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리듬을 되찾는 일로부터 회복은 시작됩니다. 굉장히 현실적입니다. 먹고 자고 일상을 살아가는 힘이 바로 신앙을 회복하는 첫 번째 단계가 됩니다.
우리가 힘겨운 삶 가운데서도 그나마 먹을 수 있고, 두 다리 쫙 펴고 잘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이 일상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여지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지 못한다면, 또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 다시 일어설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먹는 밥 한 그릇이 어떻게 나의 식탁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수 없습니다. 내 삶의 곳곳에 존재하는 ‘체리향기’를 맡을 수 없습니다.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고 힘을 내어 호렙산까지 40일간을 밤낮으로 걸어갑니다. 그 곳은 하나님과의 특별한 만남이 예고된 곳입니다. 엘리야는 아직 두려움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절망감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하나님을 믿고 호렙산까지 강행군을 합니다. 이 주체적인 결단, 이 믿음의 실천은 비록 그가 절망감에 쌓여있더라도, 그를 점점 변화시켜냅니다. 그가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은 일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맡기고 마땅히 가야 할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발이 얼마나 무겁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걷는 동안 그 전에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을 다시 보게 되었을 것입니다. 새로운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호렙산에 도착해서도 엘리야는 완전히 회복되지 못합니다. 그는 여전히 두려움에 떨고 있습니다.(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
이 이후에 엘리야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 미래의 일을 알게 됩니다. 또 엘리야를 통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하나님의 계획을 듣게 됩니다. 이 놀라운 사명을 다시금 알게 된 엘리야는 결국 이전처럼 회복되어 하나님께서 시키신 그 일들을 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마음에 불안함이 완전히 사라졌을까요? 전 사실 그 부분에 퀘스천 마크를 던집니다. ‘절망감’과 ‘불안함’은 어찌보면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이 가지고 있는 ‘살아있다’의 다른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신앙은 이러한 불완전한 우리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뤄나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면서 우리의 기분전환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고 엄습해 올지 모를 불안함들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마땅히 이겨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믿고 있어도 우리의 믿음이 흔들린다던가, 내 삶에 절망이 존재한다던가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음을 믿으셔야 합니다. 절망은 우리 삶을 어쩌질 못합니다. 우리 삶은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도입부에 언급된 ‘체리향기’같은 것이 여러분의 일상에 있습니까? 엘리야의 절망은 곧 수많은 신앙인들에게 힘이 되었습니다. 그의 절망이 들어나지 않았다면 하나님은 그저 풍요의 신 바알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절망을 이겨내는 신앙의 힘은 특별한 곳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현실에서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 그의 나라를 소망하는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성소의 아름다움은그 대리석 포석이나 장식물에 달린것이 아니라 성소 주변에 집 없는 가족이 단 한 가족도 없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아베 피에르- (단순한 기쁨)
성령을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흔히 얘기 하는 말들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성령을 받았다’라는 말은 짠한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춥고 배고픈 이들과 집이 없어 거리를 헤매는 이들을 위해 같이 아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걸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하는 거지. -김기석-
하나님의 나라는 실제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집니다. 함RP 기도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