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소니 드 멜로 지음 / 김상준 옮김 / 분도출판사
이 시대 잊혀진 영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깨달음의 영성을 소개합니다. 깨어있는 성도도 성숙하기 위하여 연재하는 이 글을 통해 영성의 세계로 나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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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각 못한 사실 3
깨달음으로 변화가 일어나지만 그것은 체험해야 할 일입니다. 이점에서 여러분은 단지 나의 말을 듣고 있을 뿐입니다. 아마 깨닫기 위한 설계도 있겠죠. 여러분의 “에고”가 교활한 방법으로 여러분을 깨달음 속으로 밀어 넣으려 하겠죠. 주시하십시오! 저항에 부딪칠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깨달음에 늘 마음 쓰고 있는 사람에게서는 가벼운 불안을 엿볼 수 있습니다. 깨어나고 싶어 하고 정말 깨어났는지 알아내고 싶어 하죠. 그것은 수행에 속하는 것이지 깨달음은 아닙니다. 우리가 목표를 성취하도록, 어딘가에 도달하도록 훈련받은 문화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되겠지만, 실상 여러분은 이미 그곳에 있기 때문에 갈 곳이란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의 멋진 표현이 있죠. “가다가 멈추는 날 이미 당도해 있으리라.” 이런 자세라야 합니다. “나는 깨닫고 싶다.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상대하고 일어나는 그대로 두고 싶다. 내가 깨어난다면, 좋지. 잠들어 있다면, 좋지.” 목표로 삼아 얻고자 하는 순간, “에고”의 영예, “에고”의 진취를 추구하고 있는 겁니다. 이루었다는 흐뭇함을 원하는 겁니다. 정작 “이루었을” 때는 모르는 법입니다. 왼손은 오른손이 하는 일을 모르는 법입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이 일을 했습니까? 우리는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자비를 베푼다는 의식을 잃었을 때만큼 자비가 아름다운 때는 없습니다. “도와 드렸다고요? 내가 좋아서 한 일인 걸요. 그저 내 춤을 추고 있었죠. 도움을 받으셨다니 거 참 잘됐네요. 축하드려요. 내 공덕은 아녜요.”
득달할 때는, 깨달을 때는 점점 “깨어났다”니 “잠들어 있다”니 하는 딱지에는 마음 쓰지 않게 됩니다. 지금 여기서 나의 어려운 일들 가운데 하나는 여러분의 영적 탐욕이 아닌 여러분의 호기심을 자극 하는 일입니다. 깨어납시다, 참 좋을 것입니다. 얼마 후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살고 있기 때문에 깨달아 있는 겁니다. 깨닫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습니다. 그리고 삶 자체를 돌보느라 고통만 남기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