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을 먼저 봐야 합니다.
성서 : 요나서 4:10-11
10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네가 수고하지도 않았고, 네가 키운 것도 아니며, 그저 하룻밤 사이에 자라났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식물을 네가 그처럼 아까워하는데, 11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이 큰 성읍 니느웨를, 어찌 내가 아끼지 않겠느냐?"
들어가며 :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가 오늘 이 거룩한 곳에 모여 거룩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사랑하는 다윗교회 성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은 남한과 북한의 교회에서 합의하여 남북평화통일공동기도주일로 정하여 예배하는 날입니다. 남쪽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쪽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이라는 단체가 마음을 모은 것으로 1988년부터 계속해오고 있습니다. 이런 뜻 깊은 날 다윗교회 성도님들을 만날 수 있어서 매우 감사하고 또 감격스럽습니다. 오늘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의 만남, 그리고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모든 인간적 편견과 오해, 무지의 벽을 넘어 하나님 주신 생명에 집중하게 하는 귀한 역사가 우리 마음 가운데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들어가서 : 저는 좋은만남교회에서 10여년 간 목회를 하다가 작년부터 기관파송을 받아 세상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 북한의 영유아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진 함께나누는세상이라는 NGO 단체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또 좋은만남교회를 후배 교역자와 공동으로 목회하고 있습니다. 임성호 목사님은 제가 존경하는 감신대 동문이십니다. 학교 다닐 때 얼마나 자애롭게 해주셨는지... 임 목사님도 저를 참 아끼는 후배 목회자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제가 후배 같죠? ㅋㅋㅋ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지 다윗교회가 은평동지방에 설립되면서 다시 귀한 관계를 갖게 되어 개인적으로도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기관목회를 한다고 요즘은 설교를 부탁하는 교회도 없는데... 그래서 이렇게 설교초청까지 해주시고 말입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의 설교를 듣게 되는 것이 매우 행운이라고 생각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가 지난 3-6일에 평양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오늘 여러분께 전해드릴 이야기는 아주 따끈따끈한 이야기입니다. 그동안 남북관계가 심하게 경색되어 작년 중반 이후로 평양에 들어갔다 나온 사람들이 매우 소수였습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조금씩 관계가 풀리기 시작했고 지난 달 말부터 북한 사리원시 주민을 위한 밀가루 지원이 이루어졌는데 그때 우리 단체도 밀가루 100톤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밀가루가 어떻게 분배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모니터링하기 위해 평양과 사리원에 다녀오게 된 것입니다. 개성은 몇 차례 들어가 봤었지만 평양은 처음 가보는 곳이라 개인적으로도 매우 설레고 두려운 경험이었습니다.
평양에 다녀왔다고 하면 사람들이 다 놀라고 부러워합니다. 세상 다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지만 북한은 여전히 갈 수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하십니다. 북한은 어떤 곳일까,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정말 억압받고 통제 받는 사회일까, 수해는 많이 났는가, 뭘 먹고 사는가... 아마 여러분들도 이런 종류의 궁금증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궁금증을 다 풀어드리고 싶지만 저도 처음 가 본 곳이기 때문에 함부로 판단해서 말씀드리기도 어렵고 또 제대로 봤는지도 자신이 없습니다. 게다가 국가보안법이라고 하는 무서운 법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고 어설프게 이야기했다가는 제7조 금품수수, 잠입·탈출, 찬양·고무등, 회합·통신등에 걸릴 소지도 있으니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면 오늘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겠느냐 궁금하실 것 같습니다. 제가 3박4일 동안 평양과 사리원에서 분명하게 봤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람이었습니다. 북한이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는 남쪽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가난하고 배고프고 헐벗은 사람들이 피곤한 얼굴을 하면서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모습을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저 역시도 마지못해 북쪽의 독재 3대세습체제에 억눌려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불쌍한 사람들, 아니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주의 로봇들이 사는 땅이라고 생각하고 갔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런 감정도 없이 사회주의, 주체사상에 맹종하는 로봇들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었더란 말입니다.
물론 남쪽에 사는 사람들보다는 조금 입성도 초라하고 생기가 활발하게 돌거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동차들이 줄지어 다니거나 사람들이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바쁘게 종종걸음을 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나름대로의 삶을 잘 살아나가는 모습은 분명하였습니다. 더운 날씨에 와이셔츠 앞을 풀어헤치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 남자들, 군모를 벗어서 손에 들고 가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군기 빠진) 젊은 군인들, 하얀 원피스에 양산까지 받쳐들고 걸어가는 젊은 아가씨, 큰 봇짐을 등에 지고 가는 아주머니, 새까맣게 탄 얼굴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우리가 탄 버스를 바라보던 어린이들. 군인들이 총을 들고 주민들을 감시하거나 마지 못해서 억지로 일을 하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아,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었구나, 북한에도 사람이 살고 있었구나’하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닫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 신기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어린 시절에 북한 김일성이 붉은 돼지 괴수로 나오는 똘이장군이라는 반공영화를 보면서 자라왔다고는 하지만 왜 거기도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진 우리 민족, 우리 반쪽, 사람이 살고 있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였을까 말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느샌가 하나님의 정성이 담긴 사람이라는 피조물이 아니라 정치, 이념, 주의, 국가적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북한을 떠올리면 그들의 사회주의, 주체사상, 잔인무도한 공산주의자, 무장공비, 천안함, 도끼만행사건... 뭐 이런 단어가 먼저 떠오를 것입니다. 그리고는 기가 질려 버려 우리와 똑같은 우리의 반쪽인 동포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오늘 성서 본문 말씀은 여러분이 너무 잘 아시는 요나서 이야기 중의 마지막 두 절입니다. 요나서 하면 제일 먼저 요나를 삼킨 큰 물고기가 떠오르겠지요. 저도 어린 시절에 교회학교에서 배우면서 물고기의 뱃속이 마치 무슨 방처럼 돼 있어서 거기에서 요나가 무릎 꿇고 회개기도하는 장면을 떠올렸지요. 그 앞에 어디서 구했는지 촛불까지 켜놓고 말입니다. 지금 보니 물고기 뱃속에는 그런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위에 들어가는 순간 질식해 죽고 소화액으로 범벅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더군요. 아무튼 이 요나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됩니다.
요나는 니느웨 성에 심판을 예언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회개하고 자복하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명령입니다. 이 명령은 심판의 명령이기도 하지만 구원의 기회에 대한 선포이기도 합니다. 요나는 이 명령을 받는 순간 니느웨라는 꼴도 보기 싫은 나라가 떠올랐습니다. 니느웨는 앗시리아를 대표하는 이름이고 도시입니다. 앗시리아는 주전 8세기경 이스라엘을 괴롭혀오던 지겨운 원수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 놈들은 그냥 심판을 해야 할 것이지 무슨 회개의 기회를 준다거나 하는 것은 가당치도 가능하지도 않은 존재들인 것입니다. 맞습니다. 요나도 니느웨를 정치, 이념, 주의, 국가적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바라본 것입니다. 그 관점으로 볼 때 니느웨는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이 나쁜 놈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던 것입니다. 행여라도 그들이 회개할지 모르는 일이니 결코 거기에 가서 회개를 촉구할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것을 보셨습니다. 바로 생명을 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물며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십이만 명도 더 되고 짐승들도 수없이 많은’ 니느웨를 보십니다.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 12만이면 전체인구는 얼마나 될까요? 좌우를 가리지 못한다는 표현은 성서에서 주로 두 살 미만의 영유아들에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고고학적 발굴에 따르면 최소 60만 이상이었다고도 합니다. 거기에다 짐승까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만 하나님은 그 생명 하나하나를 함부로 대하시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아주 작은 차이로 이념, 사상, 주의, 이익 등등을 따지면서 서로 구분하고 구별하고 갈라서고 선악으로 나누고 정의와 불의로 나누지만 하나님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다 우습고 허탄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보십니다. 죽어갈 생명, 고통 받게 될 생명, 아파하게 될 생명... 그리고 그 생명을 살리시는 일을 하시고자 합니다. 그 일을 위해 요나를 부르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그런 하나님의 관점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가며 : 저도 역시 사람들의 후원금을 걷어서 북한의 영유아에게 우유와 분유, 기타 기아를 극복할 수 있는 물품을 보내주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마다 좋은 일에 주머니를 여시라고, 통일이 이 민족에게 시급한 일이며 북한의 어린이들이 매우 힘겨워하고 있다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저는 솔직히 우리 남쪽 사람들이, 특히 기독교인들이 주머니를 안 열어도 좋겠습니다. 주머니를 안 열어도 북한의 동포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기만 한다면 좋겠습니다. 불행하게도 기독교인들이 가장 격렬하게 북한을 증오하고 반대하는 그룹 중 하나입니다. 교회를 반대하는 공산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하나님이라도 된 듯이 입에 거품을 뭅니다. 그러나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생명을 먼저 보십니다.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증오의 요나가 아니라 구원의 요나로 부름 받았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사상, 이념, 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편만한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생명을 먼저 봐야 합니다. 이 말씀을 기쁘게 받고 북쪽 동포들을 위해 마음을 열고 기도를 바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하게 축원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