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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이야기_세 번째

 

선한 사마리아인과 본성

설교하는 세례자 요한이 진리와 일상성의 변증법을 드러낸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은 선행과 본성에 관계된 작품이다. 이 비유는 비그리스도인이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예수의 대표적인 비유이다. 으레 이 비유의 주인공을 선한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지만, ‘선한이라기보다는 일부 독일 학자들의 주장대로 동정하는이 그 사마리아인을 형용하는데 더 적합한 단어일지 모른다.

 

누가복음서에만 나오는 이 비유는(10:25-37) 예수가 한 율법교사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 율법교사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받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의 의도는 단순히 영생에 이르는 길을 구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것은 지혜 혹은 지식을 갖춘 사람끼리의 지적 겨루기이다.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누가 더 깊은 율법 이해를 얻었는지를 다투는 머리 씨름이다.

 

예수는 율법교사의 질문에 직접 답하지 않고 그에게 되묻는다. “율법서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소? 당신은 어떻게 읽었소?” 율법교사는 이미 자신만의 대답을 갖고 있었다. “네 온 마음, 네 온 목숨, 네 온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자신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는 율법교사의 대답을 긍정해주었다. “그대가 옳게 대답했군요. 이를 행하시오. 그러면 살 것이오.” ‘이를 행하시오. 그러면 살 것이오.’ 라는 대답은 율법교사를 무안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예수의 다소 퉁명스러운 답변은 율법교사가 영생을 얻게 할 행위를 하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고발하는 듯하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지려 하지 않았고, 자신을 옳게 보이려고 예수에게 재차 물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당시 보통의 유대인들에게 이웃은 동족, 곧 혈통적인 유대인을 의미했다. 그러나 그 동족 가운데서도 보통 유대인으로 대우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가령 동족의 반역자인 세리나 공동체를 해치는 창녀가 참 유대인인 이웃의 범위에 들어갈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통상적으로 그들은 유대인의 범주, 곧 이웃의 범주에 들어가지 못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그 자체로도 까다로운 것이지만 거기에는 날카로운 칼이 숨겨져 있다. 이 질문을 받기 전 누가의 예수는 이방인(4:23-30), 세리(5:27-32), 죄인인 한 여인(창녀? 7:36-50) 등 통념으로는 이웃이 아닌 이들과 어울렸고, 당시 유대 지도층은 유대인의 사회적 경계를 허무는 예수의 이러한 행동에 매우 분노했다. 보통 이방 제국에 시달리는 피식민지인이나 한 사회 내에서 박해받는 주변부 모임은 우리와 너희를 구분하는 사회적 경계를 높이 세우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게 마련인데, 예수는 바리새파나 사두개파가 높게 쌓아올린 그런 인간적 경계에 아랑곳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누가의 이야기 흐름을 감안하면 율법교사의 질문은 이렇게도 들린다. ‘오호, 당신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이거요? 그러면 대답해보시오. , 곧 유대인인 나의 이웃은 누구요? 보아하니 당신은 이방인과 세리, 죄인인 여인들과 함께 잔치를 벌이면서 죄인인 그들을 부르러 왔다고 하던데 당신의 이웃은 참 유대인이 아닌가 보오? 그건 당신이 유대인을 위한 사람이 아님을 반증하는 것 아니오? 당신의 이웃이 유대인이 아닌 걸 보아하니 당신도 참 유대인은 아닌 듯하오. , 나의 이웃, 곧 유대인으로서 내가 도와야 할 이웃이 누구요? 이 질문에 대해 예수는 이전처럼 되묻기보다는 비유로 대답한다.

 

예수는 한 사람, 어느 인종인지 밝혀지지 않은 한 여행객을 소개한다. 다만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말로 미루어 유대인일 가능성이 있다. 그런 그가 여행 도중 강도를 만났다. 강도의 행동에 관한 묘사가 재미있는데, 강도들이 그에게 값진 것을 빼앗았다는 말은 없고 다만 그들이 여행자의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게 했다고 한다. 예수의 비유를 듣는 청중들은 비유 속 여행객이 입고 있는 옷 말고는 달리 가진 게 없는, 그래서 가진 옷을 빼앗기게 될 때 온몸으로 저항해서 격렬한 폭행을 자초한 가난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을 법하다.

 

비유에 따르면 유대인 제상과 레위인은 벌거벗기고 폭행당한 이 여행객을 보고 피하여 지나갔다. ? 예수의 청중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죽은 듯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인종과 신분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옷은 벗겨졌다. 비유 속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그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다. 설혹 벗은 몸에 할례가 있다 하더라도 할례는 유대인만이 아니라 사마리아인들도 행했다.

 

유대인을 대표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벌거벗은 사람이 자신이 도와야 할 이웃인지 아닌지, 아니 더 원초적으로 그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확실한 이웃으로 파악되지 않는 한 그 피해자는 정체불명 상태에서 이웃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그런데 놀랍게 유대인이 이웃은커녕 유대인에게 지극히 불결한 존재인 사마리아인은 여행 도중 불행을 당한 여행객을 발견하고 불쌍한마음이 들었다. 동정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피해자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 사마리안인 역시 쓰러져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할례를 받았다면 쓰러진 사람은 심지어 유대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자신의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비용을 썼을 뿐 아니라 자기가 탈 짐승에 그를 태우고 주막에까지 데려가주었다.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말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 나의 이웃이 누구인가를 묻는, 곧 사회적 경계를 묻고 율법교사의 근본적 태도를 문제 삼았다. 유대인이 지키려고 애쓰는 그 자랑스러운 유대인이 됨이 도리어 인간의 원초적인 마음, 곧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제어했다는 것이다. 반면 비유에 나온 사마리아인은 사회적 경제에 매여 있지 않았다. 그래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들었을 때 그 마음이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유대인이 마땅하다고 여기던 그 세계, 그 이웃의 세계는 그 순간 해로운 믿음으로 유지되고 있음이 드러났다. 맹자가 마한 인간의 근본 심성인 측인지심이 그럴듯한 경계 세우기로 인해 발현되지 못한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구도는 매우 흥미로운데 그림을 정확하게 가로, 세로로 나누어보자. 가로로 나누면 위에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여관 사람들이 있고, 아래로는 말과 그 말과 관계된 사람이 있다. 피해자는 위로 올라가고, 제일 밑에 개가 있다. 다시 화면을 세로로 나누면 왼편에 사람이 모여 있고, 오른편에는 개와 우물가의 한 여인이 뒤쪽에 있다. 마지막으로 왼쪽 위 모서리와 오른쪽 아래 모서리를 대각선으로 그으면 여관 주인, 사마리아인, 피해자, 개가 정확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비유의 가르침에 따라, 또 화면 중앙에 놓인 피해자와 사마리아인에게 일차적으로 가닿는다. 그러나 이내 화면의 구도와 너무나 일상적인 행동 때문에 개에게 주의가 쏠리는 것을 느끼게 된다. 오른편 아래를 독점한 개는 지금 똥을 누고 있다.

 

표면적으로 사마리아인의 선한 행동과 개의 배변은 반대된다. 선한 행동은 이기의 본성을 거스른 것이고, 개의 배변은 주위를 아랑곳 않는 생리적, 본능적 행위이다. 사마리아인의 행동은 아름다운 반면 개의 배변은 추하다.

 

사마리아인이나 ’, 특별히 똥 누는 개가 유대인들에게 정결한 존재일 리 없다. 둘 모두 더러운 존재일뿐더러 둘 모두 고상한유대인의 사회적 정체성이나 경계 혹은 체면을 모른다. 유대인은 유대인의 경계와 정체성, 체면을 넘어서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유대인 됨을 대표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강도당한 이에게 인간적 동정심과 측은지심을 충분히 느끼지 못한다. 느낀다 해도 그들은 행동하지 못한다. 그들은 바보처럼 강도당한 이가 누구이지 모르고, 누인지 모르는 그에게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한다. 사마리아인은 그렇지 않다. 그는 강도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았다. 강도당한 사람은 불쌍한 사람이다. 사마리아인은 경계 안에 살지 않았기에 강도당한 이를 보고 자연스레 생기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그대로 느끼고 과감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사마리아인의 마음에는 걸림이 없었다. 마치 자기가 똥을 누고 싶으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누구의 앞이든 상관없이 이 똥을 누는 개처럼 말이다. 똥을 시원하게 누는 개와 사마리아인을 비한다면 경계 안에 사는 유대인은 변비에 걸려 끙끙대지만 자기가 아는 장소에서만 변을 보는 이상하게 생겨먹은 개와 같다. 나는 렘브란트가 시원하게 변을 보는 개와 가련한 사람에게 동정심이 일 때 상대방이 누구인지 앞뒤 아 가리고 돕는 사마리아인을 겹쳐 그렸다고 생각한다.

 

렘브란트가 그린 들릴라

삼손은 양가적 존재이다. 한편으로 그는 이스라엘의 적을 물리친 영웅이다. 그 힘은 사자와 겨루어 이기고, 나귀의 뼈를 무기 삼아 무장한 원수들을 학살하며, 마침내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릴 만하였다. 탄생 자체도 비범했던 한 시대의 영웅호걸. 다른 한편 그는 범부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볼품없는 영혼을 지녔다. 이방 여인에게 끊임없이 속았고, 배신을 설욕한답시고 더 큰 화를 불러오는 되먹지 못한 고깃덩어리였다.

 

렘브란트는 자신의 위대한 예술혼과 능력, 그러나 그에 대비되는 고귀하지 못한 신분과 성품을 곱씹다가 삼손과 자신의 공통성을 발견했는지 모른다.

 

이 그림들은 모두 같은 사사기 1619-21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들리라에게 배신 당하는 삼손>

그 이야기의 개략은 이러하다. 블레셋 여인을 향한 두 번의 사랑이 모두 실패했지만, 삼손은 여전히 이스라엘 여인들에게는 연정을 느끼지 못했다. 삼손이 세 번째 사랑에 빠진 여인 역시 블레셋 여인 들리라였다. 블레셋 지도자들은 삼손의 여인 들리라를 찾아갔다. 그리고 삼손을 꾀어 그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 어떻게 하면 삼손을 제압하고 그에게 고통을 줄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들릴라를 회유했다. 정보의 대가는 지도자마다 내는 1100세겔. 당시 블레셋은 통상 다섯 명의 지도자들이 균등한 권력을 나누어 다스리는 이른반 집단지도체제였고, 따라서 이들이 들리라에게 약속한 금액은 총 5500세겔이 된다. 당시 보통 노동자의 1년 평균 임금이 약 10세겔, 왕의 몸값이 1100세겔 정도였으니 블레셋 지도자들이 제안한 금액은 1200만 원 정도의 연봉을 받는 저임금 근로자의 것으로 계산해도 대략 66억 원 정도에 달하나. 들릴라는 그들의 제안에 어떻게 반응했을까? 드릴라는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돈을 택했다. 그리고 이후 끊임없이 삼손에게 힘의 근원을 물어다. 삼손이 답할 때까지 천하무적의 삼손이었지만 들릴라 앞에서 그는 나약한 존재였다. 한 영화 대사를 빌리자면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 아니더냐.

 

불교는 아홉 가지 결박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중 가장 지독한 결박이 애결이다. 들릴라가 돈의 유혹에 배신을 위한 망설임의 시간, 이른바 유다의 시간도 거치지 않고 선뜻 응한 것을 놓고 보면 삼손의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라기보다는 들릴라를 구속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장한 채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애욕이었을지 모른다. 들릴라를 사랑의 이름으로 구속했다지만 사실은 삼손은 제 자신도 같이 묶어버린 애결.

 

실제로 들릴라가 사랑을 배반한 것이라고 볼 수 없을 것이다. 성서는 들릴라가 삼손을 사랑했다고 한 번도 보도하지 않는다. 들릴라는 블레셋 지도자들에게 돈을 받고 삼손을 제거함으로써 들리라는 두 가지 복수를 동시에 실행할 수 있었다. 하나는 삼손에 대해, 다른 하나는 잘난 체하나 무력한 자신의 동족 남자들에 대해.

 

<결박당하는 삼손> 거칠게 깎인 머리털, 일그러진 얼굴, 피가 튀는 눈, 냄새가 날 듯한 입, 마구 자란 수염, 뭉뚝한 몸뚱어리, 고통 때문에 오므린 오른쪽 발가락 등 이 그림의 삼손에게는 영웅의 면모를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들릴라의 시선으로 구성한 삼손같다. 사랑 없이 한 남자를 받아들여야 했던 들릴라가 삼손을 그렸다면 마땅히 악취 나는 입, 더러운 몸, 징그러운 얼굴 등 렘브란트와 유사하게 그렸을 것이다. 렘브란트가 그의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들릴라에게 감정 이입을 했다고 해석한다.

 

렘브란트는 들릴라의 눈으로 그 장면을 그린다. 독자들 역시 그림 속 들릴라의 흥분과 쾌감이 혼재한 시선을 따라가다 삼손을 내려다보게 된다. 들릴라는 지금 사랑을 배반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를 한다.

들릴라는 치명적 여성으로 번역되는 팜므파탈의 한 명으로 서양의 문학과 예술로 재현되었다. 일반적으로 팜므파탈은 자신의 매력으로 남성을 저항할 수 없는 욕망에 매이도록 하여 결국 위험하고 치명적인 상황으로 이끄는 여성을 가리킨다. 이 그림의 독특함은 한 여인이 남성성을 상징하는 삼손의 힘을 거세하고, 남성들의 체제를 대표하는 불레셋 지도자들의 무력함을 폭로하는 복수 장면을 극적으로 재구성한 데에 있다. 들릴라의 시선에서 삼손을 내려다보게 유도한 화가는 렘브란트가 유일한 듯하다.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 앞에 오게 된 여인의 이야기는 요한복음서에만 나온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원래 요한복음서의 일부가 아니었다. 가장 오래된 고대 사본에는 이 이야기가 없고, 이 이야기를 담은 후대의 사본도 지금의 위치가 아니라 7:36 다음이나 21:21 이후에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이 이야기는 네 복음서 기자가 모두 알지 못한 예수 이야기로 어느 복음서 안에도 정착되지 못하다가 후대 요한복음서에 삽입된 것이다.

 

대적자들은 예수를 모세와 강하게 대조하여 질문한다. 성서는 이 물음이 예수를 시험하여, 그를 고발할 구실을 얻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무엇을 시험한다는 것일까? 반대자들은 예수가 누구에게 충성하고 있는지를 백성들 앞에서 드러내고자 한다. 모세의 율법을 따르라고 하면 그 여인을 돌로 쳐야 하는데 이는 로마가 팔레스타인 땅에서 소유한 사형 판결권과 집행권에 대한 도전이 된다. 반면 돌로 치지 말라고 하면 모세의 율법을 거스른, 곧 로마가 두려워 하나님의 율법을 저버린 가짜 선생이 되고 만다. 모세를 따른다고 하면 로마의 칼이, 로마에 굴복한다고 하면 민중의 분노가 기다리고 있다.

 

예수는 말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몸을 굽혀서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썼다. 고대 사본 중 일부가 예수가 그들 각자의 죄목을 썼다고 기록하지만 중요 사본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같이 간음한 남자는 어디에?”가 그 글의 내용이라고 하는 만담가도 있지만 예수의 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히 갈린다. 어떤 이들은 흥분한 적대자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해 예수가 그저 시간을 벌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라비아 문헌들은 정신이 혼란할 때 낙서를 하는 셈족의 관습을 보고한 적도 있다.

 

우리처럼 예수의 행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대자들은 예수를 다그쳤고, 마침내 예수가 입을 열었다. 너희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스도, 그리고 간음하다 잡혀온 여성> 이 주제를 그린 다른 화가들의 그림과는 다른 매우 두드러진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간음한 여인이 주인공처럼 등장한다. 렘브란트는 그 특유의 빛 속에 여인을 있게 한다. 둘째, 이 그림은 위와 아래의 이층 구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통상적으로 화가들이 이 주제를 그릴 때 예수를 가운데 놓고 좌우에 고발자와 간음한 여인을 두거나 혹은 간음한 여인을 가운데 두고 예수와 고발자들을 배열하는 수평적 구도와는 사뭇 다르다. 두 특징 가운데 먼저 후자의 것에 집중해보자.

 

우선 예수는 제사장에 대응한다. 예수와 제사장 모두 왼손을 각자의 가슴에 올려놓고 있다. 에수의 외편과 제사장 왼편의 검은색 옷을 입은 이들은 고발자들이다. 그들은 여인과 일단의 무리를 고발하고 있다. 여인이 무릎 꿇은 계단과 이웃의 제단이 서로 대응한다. 그러나 대조되는 부분도 있다. 위층 제단에 놓인 제물은 확실하게 보이지 않지만 아래층 제단인 제단에는 여인. 곧 제단에 놓였으니 제물이라 부를 수 있는 한 여인이 죄를 고발당한 상태로 있다. 위층 제단 앞에 무릎 꿇은 남자 뒤에 일단의 사람들이 용서를 구하는 자세를 취한 반면, 여인 두에 있는 이들은 고발자와 당당히 서 있다.

 

이제 이러한 구도를 설정한 렘브란트의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 여인은 제단을 암시하는 계단에 놓인 희생제물이다. 희생제의를 드리고자 하는 이들은 희생제물로 쓰이는 동물에게 자신의 죄를 전가하고, 그것을 죽이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따라서 희생제물을 드리는 이들은 자신의 죄를 대신하는 제물을 드리면서 겸손하고 참회해야 한다. 그래서 위층의 이들은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들은 은총과 긍휼을 구하러 나왔다. 그러나 아래층의 형편은 어떤가? 거기에는 무릎을 꿇어야 할 이들이 도리어 고발자로 행세한다.

 

예수는 간음하는 여인에게 죄가 없다하지 않는다. 당시 사형에 해당하는 간음죄를 저질렀다면 그 여인은 남편이 있는 여인이나 정혼한 여인이었을 것이다. 여인은 남성들이 사악한 목적을 위해 자신을 희생제물로 활용하는 것을 방어하지 못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세상 사람들의 질타와 비난, 그리고 죽음의 위협에 놓인 한 여인을 빛 속에 둔다. 그 빛은 용납과 정화의 빛이다. 여인은 예수의 뒤에서 내려오는 빛, 곧 예수를 통해 비치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 들어와 있다.

 

개인사를 배경으로 하면 이 그림은 렘브란트가 자신과 디르크스에게 쏟아지는 비난에 대한 대꾸로 이해할 수 있다. 렘브란트는 자신이나 디르크스의 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비판하는 이들의 위선이 탐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타인에 대한, 더군다나 혐오를 받을 만하다고 여겨지는 타인에 대한 연민과 동정, 그리고 배려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다른 이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함이 호은 이해하려는 노력이, 아니 다른 이들에게서 내 자신의 연약한 모습을 발견함이 봄바람의 근원이 아닐까? 성서는 연약한 우리를 따뜻하게 대하는 대제사장 예수를 소개한다. 렘브란트가 이해한 복음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마저도 용납과 정화의 빛 속에서 붙잡아줄 사랑의 복음이었다.

(히브리서 4:15, 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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