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이야기 4
여자들도 양을 쳤다?
성서 시대 목자들의 1년 라이프 사이클
성경에는 분명히 여자들이 양을 치는 장면이 나온다. 라헬은 양을 치다가 야곱을 만났고 모세의 아내인 십보라도 양을 치다 모세를 만났다. 이삭의 배우자를 찾으러 떠난 아브라함의 종도 우물가에서 양들에게 물을 먹이는 리브가를 만났다.
남녀 모두가 참여했던 목축
성서 시대에 많은 일들이 남성과 여성의 일로 엄격히 구별되었지만 목축은 남녀가 모두 참여했던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남자와 여자가 목축에 참여하는 주기가 달랐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성서시대 목자들의 삶의 패턴을 엿볼 수 있고 이와 관련된 본문을 읽을 때 훨씬 생동감 있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
남자가 먼저 스타트를 끊는다.
비가 오지 않는 6개월의 건기 동안 유대 광야는 모든 것이 타들어간다. 그러나 10월경 초막절에 이른 비가 내리면 회색빛으로 타들어가던 광야에 초록색 풀들이 조금씩 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목자들이 1년 주기가 시작되는데, 그 스타트를 남자가 끊었다. 그 이유는 이른 비로 인해 풀이 나기 시작하면 집에서 머리 있는 곳부터 시작해서 점차 집 가까운 쪽으로 풀을 뜯겼기 때문이다.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형들의 안부를 물으러 갔을 때 형들은 도단 근천에서 양들을 치고 있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남쪽의 헤브론에서 살았던 것을 볼 때 집에서 거의 150km나 떨어진 북쪽까지 풀을 뜯기러 간 것이다. 이를 볼 때 요셉이 팔려 간 때는 우기 초엽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강력하기 암시해 주는 구절이 ‘빈 웅덩이’이다. 우기 초엽에는 웅덩이가 아직 빗물로 가치 않아서 비어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37:23-24
먼저 스타트를 끊는 남자들은 가급적 집에서 멀리 떠난다. 즉 광야에서 며칠 밤을 보내야 하는데 온갖 위험이 도사린 광야에서 양들을 데리고 밤을 지새우는 일은 아무래도 여자보다는 남자에게 적합했던 것이다. 목자들은 광야에서 밤을 보낼 때 양들을 임시로 만든 우리에 넣는다. 그리고 그 입구인 문에 앉아서 잠을 자지 않고 밤새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을 지킨다. 밤에 자지 않고 맹수의 위협이 가득한 광야 한복판에서 양들을 지키는 목자의 이미지는 ‘졸지 않는 여호와’에 대한 이미지로 발전되었다.
시편 121:4
집 근처에서 양들을 치는 여자 목자들
집에서 먼 곳부터 풀을 뜯기는 이스라엘 목축문화는 목축과 농사가 동시에 가능한 이스라엘 지형적 특성에 기인한다. 우기 초에 먼 곳부터 풀을 뜯기고 점차 집 가까운 쪽으로 오게 되면 우기가 끝나고 건기에 들어간다. 이쯤 되면 풀들은 집 근처에만 남게 되고 목축의 바통을 여자 목자들이 받는다. 그리고 남자들은 모두 들판으로 가서 보리 추수를 하게 된다. 이즈음이 4월경 건긴 초에 있는 유월절 절기로서 이대는 보리를 추수하는 시즌이다.
여자 목자들은 양들을 칠 때 절대로 밖에서 밤을 지새울 수 없고 반드시 하루 만에 돌아올 수 있는 집 근처에서 양들을 쳐야 한다. 성경에 여자 목자들이 양들을 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런 본문들은 항상 우물가를 스토리의 배경으로 한다. 우물가는 동네 가까운 곳에 있기 땜ㄴ에 여자 목자들이 집 근처에서 양들을 쳤음을 알 수 있다.
우물가, 스캔들이 일어나는 장소
모세와 십보라의 러브 스토리, 그리고 야곱과 라헬의 연애가 공통적으로 우물가를 배경으로 싹트는 것을 보면 성서 시대에 우물가는 ‘사랑이 꽃피는 장소’로 종종 인식되었다.
창세기 29:9-10, 출애굽기 2:15-16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왜 하나님을 천한 신분이었던 목자에 비유하였을까?
요한복음 10:11, 마가복음 9:36, 누가복음 15:6
다윗이 활동하던 시대는 열두 지파를 중심으로 한 ‘지파 체제’에서 벗어나 사울 왕을 중심으로 한 ‘왕정 체제’가 점차 자리를 잡아 가던 시기였다. 아울러 당시는 양과 염소를 치던 ‘목축문화’와 농사를 짓는 ‘농경문화’가 혼합된 시대였다. 유랑 생활에서 벗어나 이스라엘은 점차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한 정착 생활로 넘어가는 사회적 격변기를 지나고 있었다. 농경문화의 주된 신인 바알과 목축문화의 주된 신인 여호와! 이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두 개의 흐름이었다. 다윗은 농경문화에 동화되어 저마다 바알 신에게 빠져 가는 시대적 분위기에 맞서서 과감하게 여호와 하나님을 목자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목자와 농부, 누가 더 대접받았을까?
농경문화는 목축문화를 가증히 여김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두 개의 문화적 축은 농경문화와 목축 문화였다. 성지 이스라엘을 주 무대로 펼쳐지는 두 개의 문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세련되고 문화적이며 럭셔리한 생활양식이었을까? 당연히 농경문화다. 농경문화에서는 목축문화를 변방의 오랑캐쯤으로 생각하고 가증히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주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 주변에서 농사를 짓던 애굽은 성경에 등장하는 대표적인 농경민족이다. 애굽 민족은 나일 강을 중심으로 인류의 4대 문명 가운데 하나를 탄생시킬 정도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앞선 민족이었다. 이들의 눈에 이스라엘은, 과거 세계의 중심임을 자처하던 중국이 우리나라를 변방의 오랑캐쯤으로 여기던 것처럼 별 볼일 없는 후진 민족이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의 도움으로 가나안 땅을 떠나 애굽에 정착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 왕 바로를 알현했다. 이때 애굽 문화를 잘 알고 있던 요셉은 형들이 바로 왕을 알현하기 전에 사전 교육을 시켰는데, 그 말씀에서 우리는 당시의 농경문화와 목축문화의 관계를 엿볼 수 있다.
창세기 46:34
광야의 민족 이스라엘이 목축문화를 가증히 여김
40년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이스라엘의 삶의 패턴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가나안 민족의 앞선 문명인 농경문화에 동화되면서 목축이 점차 가증한 것으로 경시된 것이다. 농사를 짓고 정착생활을 하면서 목자는 그때까지도 안정적으로 집에 거하지 못하고 광야를 떠도는 부랑자 정도로 인식되었다. 성서 시대 목자의 개념은 오늘날 서울역 근처를 배회하는 노숙인 정도로 생각하면 가장 비슷할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나오는 목자에 대해 낭만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지만, 사실 성서 시대 목자들은 사회의 최하층민에 속하는 극빈자들이었다.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농경지가 부족해지자 목자들은 마을과 농경지에서 먼 유대 광야로 점점 밀려났다. 그러나 풀이 없는 유대 광야에서 목자들은 몰래 남의 포도원과 과수원에 들어가 양들을 먹이곤 했는데, 헬라 시대(주전 3세기)에는 목자들이 양을 데리고 농경지를 지날 때는 양들의 입에 재갈을 물리도록 법을 규정하기까지 했다.
누가복음 2:8-10
헤롯이 통치하던 예수님 시대 당시에는 인구가 급격히 증가해 수많은 목초지들이 농경지로 바뀌었다. 중앙산지의 많은 곳이 계단식 경작지로 바뀌었고 목자들은 척박한 광야로 더 멀리 밀려나야 했다. 이처럼 당시의 목자들은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고 이리 뜯기고 저리 뜯기고 사회적 약자들의 대명사였다.
예수님 당시에 목자들은 법정에 증인으로 설 수도 없는 존재였고 남의 경작지에서 몰래 양들을 치는 ‘강도’쯤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목자에서 다른 직업으로 바뀌었다는 말은 그 사람이 회개했음을 의미하는 은어적 표현이었다. 목자에 대해 이미지가 극도로 좋지 않았던 당시에 예수님은 자신을 ‘선한’ 목자로 선포한 것이다.
요한복음 10:11
목자, 이상적인 지도자상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후 솔로몬 성전이 무너질 때까지(주전 586년) 목축이 여전히 중요하고 명예로운 직업으로 인식된 것은 목자에 대한 당시의 사회적 인식을 통해 볼 때 약간은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이는 광야의 환경 때문인데, 위험하고 척박한 광야의 환경에서 끝까지 양 무리를 돌보는 목자의 이미지, 특별히 맹수와 싸우는 목자의 이미지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종교와 정치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이상적인 리더십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아모스 3:12; 이사야 31:4
선지자들의 유목민적 삶에 대한 이상향
이스라엘 사회가 빠르게 농경문화를 중심으로 재편되자 광야에서 목축을 하면서 섬기던 ‘여호와’보다 농경문화를 일군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바알’의 주가가 더 올라갔다. 척박한 광야에서는 여호와를 섬겼지만 새로운 문화에서는 그 문화에 맞는 새로운 신을 섬겨야 한다고 나름대로 지혜로운 결정을 내린 것이다.
사사기는 농경문화와 목축문화가 혼합된 대표적인 혼란기로서, 여호와 신안과 바알 숭배의 조화가 불가능함을 잘 보여 주는 책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도시인 아나돗 출신으로, 이곳은 광야와 농경지의 경계에 위치했다. 목축을 경험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예레미야는 그의 책에서 광야에서 양들을 치던 유목민적인 삶을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노래하였다.
예레미야 2:2; 33:12
예레미야의 유목민적 삶에 대한 동경을 잘 엿볼 수 있는 본문은 바로 35장에 나오는 레갑 족속에 대한 이야기다. 유다의 멸망이 가까운 여호야김 때 하나님은 그때까지도 광야에 거하면서 목축을 하던 레갑 족속을 성전에 불러들여 포도주를 마시게 했다. 그러나 레갑 족속은 이 명령을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들의 조상인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준 명령을 굳게 따랐다.
포도주는 정착생활의 대표적 산물이다. 유다 말기 모든 사람들이 집을 짓고 농사를 짓던 시대에 여전히 광야에서 목축을 하던 레갑 족속에게는 가장 금해 할 식물이다. 레갑 족속은 그들의 조상인 요나답의 명령에 철저하게 순종했는데, 이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듭하여 거역하고 불순중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좋은 대조를 보인다.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풍요는 어디서 오는가?
농경문화에서 부족함이 없는 ‘풍요’를 가져다주는 신은 바알이었다. 바알에게 잘 보이면 많은 비와 함께 풍년이 보장되지만 바알에게 밉보이면 흉년의 재앙이 찾아온다고 믿었다. 바알은 농경 문화를 일군 가나안 원주민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주신으로서 대표적인 풍산의 신이었다.
1년 농사의 모든 수고와 땀이 모이는 곳이 타작마당인데, 추수한 곡식을 탈곡하는 가나안 민족의 타작마당에는 반드시 바알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바알 신전이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바알 신전에서는 성창으로 불리는 종교적 창녀들의 음행이 이어졌다.
호세아 9:1
따라서 타작마당은 바알 신을 섬기는 가나안 원주민들에게는 자신들의 신앙이 집결된 종교의 메카와 같은 곳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농경문화 속에 바알 신이 판치는 이스라엘에서 오직 목자이신 여호와를 섬길 때에만 부족함이 없는 풍요가 찾아온다고 선포하고 있다. 유대 광야에서 여호와를 노래한 다윗은 이후에 이스라엘 왕이 되어 여부스를 점령한 후 타작마당 자리에 여호와의 집인 성전을 짓고자 은 50세겔을 주고 매입했다. 이것은 가나안 땅의 주신의 자리가 바알에서 여호와로 바뀌는 놀라운 사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