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이야기 2
1) 에녹 : 봉헌된 자, 바침
고대 그리스인들은 존재의 범주를 신(들), 다이몬, 반신반인, 인간의 순으로 분류했다. 다이몬이 신과 인간을 매개하는 천사와 같은 존재라면, 반신반인은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불멸의 존재를 일컫는다. 예를 들면 주신 디오니소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그리고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등이 그러한 불사의 영웅적 존재들이다. 이렇듯 신과 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한 그리스 신화와 달리, 그 경계를 명확히 긋고 있는 구약성서에도 이러한 불사의 존재가 있으니 에녹과 엘리야다. 이 둘은 그리스 신화의 영웅들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 태어난 반신반인적 존재가 아닌, 그저 인간일 뿐이다. 비극적 삶을 살다가 사후 신으로 등극해 불사의 존재가 된 그리스 신화 속 반신반인적 영웅들과 달리, 에녹은 지상에서 한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을 누리다 지상에서 홀연히 종적을 감춘 인물이다. 그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7대손이기도 하다.
창세기 5:24, 열왕기하 2:11
인간으로 태어나면 언젠가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다. 그러나 에녹은 그런 과정에서 벗어난 존재다.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은 채 하늘로 올려졌다. 선지자 엘리야도 죽음을 맛보지 않고서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려졌다. 성서는 에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가해하고 신비한 승천 장면을 우리의 지적 호기심과 기대를 저버린 채 간결하게 묘사할 뿐이다. 하나님은 에녹을 하늘로 올리신 이유를 창세기에 밝히지 않고 있다. 다만 에녹이 아들 므두셀라를 낳은 후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밝힌다. ‘동행’이란 같은 쪽을 바라보고 함께 가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 뜻이 다르면 동행은 불가능하다.
구약성서에서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상의 복으로 무병장수, 토지(땅)의 소유, 그리고 자손의 번성을 꼽는다. 이것은 아브라함을 비롯해 이후의 족장들과 이스라엘 민족 전체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에서 자주 언급되는 복이다. 그러나 그러한 복이 진정한 복이 될 수 있는 이치로 따로 있다. 그 이치란 지상의 삶에서 ‘하나님과의 즐거운 동행’이다. 최상의 복이란 하나님과의 즐거운 동행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분의 계명을 삶의 중심에 세우지 않고, 그러한 복으로만 채우려 든다면 복은 우상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빠져 버린 복은 그 자체로 인간의 영혼을 탐욕의 늪에 빠트리는 독이다.
관계의 영성이란 책에서 기독교의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맺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음에도 그동안 기독교는 ‘관계의 종교’가 아닌 ‘신념과 명제의 종교’로 축소됐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기독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도록 돕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라는 부름은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에 존재하는관계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청이다.
관계의 영성은 믿음을 관계로 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믿는 사람들과의 관계,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 피조 세계와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그리고 영적 세계와의 관계로 확대된다.
2) 네피림 : 큰 사람, 용사
메소포타미아 서사시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주인공 길가메시는, 신적 혈통으로 놀라운 힘을 부여 받아 인류를 구원한 영웅으로 소개되는데 약 5미터의 거인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무수한 신들과 거인족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대지의 신 가이아와 하늘의 신 우라노스가 결혼하여 열두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아들이 타이탄이다. 이 타이탄이란 단어는 거인을 뜻하는 대명사로 사용되었고, 타이태닉이라는 단어도 여기서 파생되었다. 이들 가운데 대표적인 거인으로는 키클롭스와 가이아의 자식들을 뜻하는 기간테스가 있다. 키클롭스족은 호메로스의 두 서사시 가운데 하나인 오디세이아에 등장하는데, 둥근 눈을 뜻하는 키클롭스는 이름 그대로 이마 중앙에 눈이 하나밖에 없으며 몸집이 큰 거인이다.
구약성서에는 노아 홍수 이전 거인들인 네피림과 노아 홍수 이후의 거인들인 아나킴과 블레셋 가드 등이 등장한다. 홍수 이후의 거인족에 속하는 최후의 그바임 족속인 바산 왕 옥은 신장이 약 5미터나 된다고 전한다. 암몬 족속은 이들 르바임 족속을 ‘삼숨밈’으로, 모압 족속은 그들은 에밈으로 불렀다.
민수기 13:33
창세기는 이들을 소개한 후 세상에 만연한 사람들의 죄악으로 인해 홍수로 지면을 쓸어버리시겠다는 하나님의 의중을 전한다. 네피림은 어원적으로 타락한 자들, 폭군, 장부라는 뜻을 지닌다. 아마도 신체가 아주 큰 호전적인 난봉꾼으로서 다른 연약한 사람들을 괴롭히던 망나니와 같은 이들을 일컫는 말이겠다. 그들의 존재와 행태는 당시의 무분별한 성적 결합과 심각한 타락상의 한 단면을 제시한다.
일부 신학자들은 네피림이 ‘유명한 권세 있는 통치자’를 가리킨다고 본다. 데이브드 롤이라는 고고학자는 대홍수 이전에 ‘영웅들의 시대’가 있었다고 한다. 주전 7세기경 활동한 그리스의 역사가 헤시오도스는 인류 역사를 황금, 은, 청동시대, 영웅시대, 철기시대로 구분하였다.
3) 함 : 검다, 뜨겁다
기독교는 성서를 오용해 복음의 순수성에 오점을 남긴 얼룩진 역사를 갖고 있다. 청교도들이 미국 원주민인 인디언을 약 6000만 명이나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그들에게서 땅을 빼앗을 때도, 스페인 제국주의자들이 남미 사람들 2300만명을 살해하며 정복할 때도 성서에 근거해 자신들의 집단 범죄를 정당화하려 했다. 아프리카에서 노예선을 탄 흑인들은 500-600만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노예 수입이 금지된 1807년까지 미국에 도착한 노예는 150만명이었다. 무려 400-500만 명의 노예가 생포되고 이송되는 도중에 죽어 간 것이다.
미국 남부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창세기의 ‘함의 저주 사건’을 들먹이며 노예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변했다. 미국의 20세기 흑인 소설가 알렉스 헤일리가 그의 조사 쿤타 킨테에서부터 자신에 이르기까지 7세대의 걸친 흑인 노예가 가족사를 다룬 소설 뿌리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창세기 함의 저주 사건을 잘못 해석한 결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로 끌려와서 인권이 짓밟히고 목숨까지 잃는 저주가 시작되었다.
저주받은 가나안에서 유래한 가나안 가족 족속은 후에 셈계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종이 되기도 하고 여러 번의 전쟁을 통해 정복당하기도 했으니, 함에 대한 저주는 일단락되었다. 따라서 노아의 가나안 저주 사건을 그로부터 4500년이 지난 후 아프리카 흑인들과 연계하여 그들이 저주받아 노예가 된 것을 필연적 귀결이라 하는 것은 억측이 아닐 수 없다.
에베소서 2:14-16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었음을 선포했다. 십자가 사건은 거기서 머물지 않고, 이 시대의 모든 편견과 차별을 거두어 내고 화해와 평화로 나아가는 길이 된다. 너와 나 사이의 담장을 거두어 내면, 그늘진 곳이 없어지고 소통이 이루어진다. 즉 너와 나 사이의 다름을 넘어 하나가 된다.
신약
1)야고보 : 발꿈치를 잡다
마태복음 16:19
중세 가톨릭교회는 마태복음 16:19에 근거하여 일곱 성사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면죄부를 발행했다. 이에 반하여 루터는 1512년 비켄베르크 성 탑 꼭대기 골방에서 회심을 체험하는 ‘탑의 체험’을 하게 된다. 그때 그는 로마서 1장 17절을 새롭게 깨닫게 된다.
이신칭의는 종교개혁의 주요 슬로건이 되었다. 이러한 이신칭의는 의로움을 얻는 데는 믿음과 더불어 행위가 필요하다는 당시 로마 카톨릭 교회의 가르침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다. 개신교의 토대가 되는 이신칭의 교리는 이후 잘못 해석되거나 불완전하게 이해되어 믿음과 행함이 이원화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실종을 초래한 주범을 ‘오직 믿음’에서 찾기도 한다.
이방인들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케 되는 복음과 함께 ‘이신칭의’를 가르친 바울의 신학 사상은 율법 종교에 매여 있는 이들에게는 불온하기 짝이 없는 이단 사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강조한 믿음은 살아있는 믿음이다. 믿음의 진정성과 성숙성은 삶 속에서 그 열매인 행함으로 빚어져야 함을 바울 또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야고보서 2:22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질타하면서 행함으로 온전케 되는 믿음을 가르친 사도 있다. 그는 야고보인데, 온전한 믿음이란 행함으로 증거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 우리는 1세기 격동기를 헤치고 갓 부화한 예루살렘교회를 이끈 야고보에 대해 보자.
신약성서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는 예수님 말고도 아들이 네 명 더 있었다. 예수님 바로 밑의 동생 야고보는 예수님의 살아생전에는 그분을 메시아로 믿지 않았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 후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변화된 그는 예루살렘교회의 수장이 되었고, 교회의 분쟁과 혼란을 조정했다.
야고보가 이끈 교회는 유대교의 중심이자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에 있었기에 율법의 날 선 유대교와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외친 바울 사이에서 외줄타기를 하는 현실에 놓여 이었다. 1세기 격동기에 유대교의 모태에서 서서히 새 시대의 종교로 태어나 부상한 기독교의 한 축을 이끈 야고보는 바울과 달리 그리스도 복음의 선포와 함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가르쳤다.
야고보서 2:17
야고보는 율법종교의 중심이었던 예루살렘에서 강직한 성품과 올곧은 믿음의 행보로 격동기의 예루살렘교회를 이끈 거출한 지도자였다. 야고보는 1세기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야고보가 주후 62년 유대교 이단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다고 기록했다. 혹은 헤게시푸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 성전 탑에서 야고보를 밀고 돌과 몽둥이로 때려 그가 순교 당했다고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