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02.23 18:08

2019년 2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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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제7주일 및 졸업입학 축하주일입니다. 학업성취를 위해 공부하며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학생들과 청년들에게 하나님의 인도가 함께하시기를 응원해주십시오. 다음주일은 여성주일로 지킵니다.

졸업 및 입학 : 남규현 어린이, 방정빈 청년, 박이하연 청년

입학 : 채보란 청년

2. 다음주일은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3.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부부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셨는데 보험 관계로 내일 퇴원하시고 통원치료를 받으신답니다. 아직 완쾌 되지 못하셨으니 계속 기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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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준비하는 장례요청서?! 

 

예수목회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제가 이 세미나의 온갖 잡다한 실무를 담당하고 있어서인지 이 시즌이 되면 좀 피로해집니다. 그나마 다행히 요즘은 같이 일하는 젊은 동지들이 많아져 좀 수월해졌습니다만 자꾸 마음이 멀어집니다. 그런데 마지못해 참석한 세미나지만 매년 이 세미나를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와 에너지를 얻고 온다는 것입니다. 사람 마음이 참!

매년 목회 분야를 정해 워크숍을 하는데 올해에는 장례에 대해 하였습니다. 연세의료원 원목실장을 하셨던 한인철 교수님이 자신의 장례식 경험을 이야기해주셨는데 장례 이틀째 저녁에 가족 친지를 다 모아 '고별예배'를 드린답니다. 이 예배를 위하여 고인을 잘 아는 사람들 예닐곱 명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 이야기를 중심으로 고인을 추모하는 설교문을 작성한다고 합니다. 또 손주 세대에는 고인의 모습이 담긴 가족사진을 50장정도 추려서 영상을 만들어 오라고 하고 고별예배에서 함께 본답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봐왔던 수많은 장례식, 안 할 수 없으니 형식적으로 해치우는 장례식이 아니라 고인에 초점을 맞추고 유족들에게도 위로가 되는 예식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딱 한 번 청년 교우의 할머니 장례식을 집례한 경험 밖에 없습니다. 

때맞춰 장례를 준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는 순서는 있어도 가는 순서는 없다고들 합니다. 시간이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일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미리 '장례요청서' 같은 것을 작성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자기 장례식에서 불러주길 바라는 찬송, 고별사를 해줄 지인 목록, 꼭 남기고 싶은 유언, 집례해줄 목사 선정, 꼭 부르고 싶은 지인들 등등을 적어 놓는다면 어떨까요? 뭔가 좀 섬뜩한 느낌도 있겠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을 준비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다 더 성실하게 진심 담아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요? 누가 집례하더라도 좀 더 성의 있게 해드릴 수도 있겠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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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목회세미나에서 우리 교회를 소개하였습니다”

 

한국기독교연구소가 주최하는 열네 번째 예수목회세미나가 합정동 마리스타교육수사회 교육관에서 '한반도 평화와 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지나 18일(월)부터 2박3일 일정으로 열렸습니다. 정세현 한겨레통일문화재단 이사장(전 통일부장관)이 주제강연을 하고 하종강 성공회대 교수가 현 시대의 실업문제와 노동문제에 대해, 극우 기독교 문제에 대해 김진호 연구실장(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이 강연하였습니다. 또 목회적 측면에서 장례식을 어떻게 해야 할지 토론하고 워크샵을 하였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는 우리 교회와 목회를 소개하는 시간도 40분 정도 있었습니다. 뜻깊은 목회세미나에 잘 다녀왔습니다.

 

“슬아와 한울이의 첫 돌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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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토)이 복덩이 쌍둥이 송슬아, 송한울의 첫 돌이었습니다. 23일에 플래너 서울역점에서 열린 돌잔치에 우리 교우들이 많이 참석하여 두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축복하였습니다. 제가 가족의 감사예배 인도를 부탁 받아 설교 말씀을 전하며 열왕기상 7장에 나오는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처럼 아름답고 든든한, 능력의 하나님이 세우신 기둥 같은 삶이 되기를 바라며 축복하였습니다. 작년에 출산 심방을 하고 오랜만에 본 슬아와 한울이는 일 년 동안 몰라보게 자랐지만 여전히 부모 힘들게 하지 않는 순한 모습은 여전하네요. 행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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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이상 노동자들의 사망 소식이 들리지 않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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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 씨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어벨트에 끼어 처참하게 사망한 것이 불과 두 달여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현대제철 당진공장에서 50대 노동자가 컨베어벨트로 인해 사망하였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공장에서는 2007년 이후 35명의 노동자가 작업 중 목숨을 잃었고 그중 29명이 하청 노동자, 비정규직이라고 합니다. 얼마 전에는 방위산업체인 한화 대전공장에서 실험 중 폭발사고가 나 세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25세의 노동자는 졸업과 정규직 채용을 앞둔 인턴이었다고 합니다. 지난 2일에는 포스코에서도 한 명의 노동자가 사망하였으나 회사가 사고를 축소 은폐하려 한다는 의혹을 받고 있으며, 지난달 26일에는 일주일 동안 70시간 이상 노동에 시달리던 30대 그래픽 제작 노동자가 사망하였습니다. 25일에도 대우조선해양 옥포조선소에서 하청 노동자가 사망한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런 억울한 죽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노동자들이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어야 하며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가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하고 노동을 강요당하는 일이 없어져야 하겠습니다. 노동자가 국가를 지탱하는 기둥임에도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이런 시스템을 고칠지, 안타깝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노동자를 돈 버는 기계 부속품처럼 여기면서 하청과 비정규직 채용으로 원가절감에만 몰두하는 이 나라의 잘못된 제도와 기업정신이 우리 이웃을 계속되는 죽음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현실을 깨닫고 정당한 대우,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보장 받는 사회를 만들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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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고나면 제목처럼 몸과 마음이 따뜻해지는 영화 <웜 바디스>. 제목만 보면 잘 만든 로맨틱 코메디를 떠올리기 쉽지만 재밌는 것은 <웜바디스>가 좀비영화라는 사실이다. 

 바이러스 때문인지 무엇때문인지 원인을 뚜렷이 알 수 없지만 이미 종말을 맞이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 인적없이 황폐한 폐허더미 위를 그저 으르렁 거리며 배회하는 좀비들. 영화는 전형적인 좀비영화의 클리셰를 한 가득 늘어놓으며 시작한다.

 하지만 이거 왠지 뭔가 다른데? 라고 느낄 수 있는 것은 그 좀비 무리들에 주인공 R이 끼어 있어서 그럴것이다. R은 좀비지만 꽃미남의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좀비가 좀비 자신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애쓰고, 자신의 존재에 실망하고 동료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설정을 통하여 영화는 우리에게 많은 메세지를 불편하지 않게 잔달해준다. 결국 R의 변화는 동료 좀비들을 점차 변화시킨다. 

 기존에 익숙한 좀비영화의 편견과 정형성을 하나씩 하나씩 반전시키는 <웜바디스>는 그 동안 두근거리기를 포기했던 좀비들의 심장이 점차 쿵쾅거리기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보는 우리로 하여금 설레임을 전이시킨다. 

 

 피도, 눈물도, 이성도 없는 좀비가 다시 심장이 뛰고, 체온을 느끼며 인간으로 회복된다는 발상. 지옥같이 황폐한 세상에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하던 좀비와 인간들이 점점 서로에게 동화되어가며, 결국 막힌 담을 헐고, 서로의 손을 맞잡는 장면은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넘어 기적 같은 놀라움을 선사한다.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비 오는 날 우산을 펴지 못해 끙끙거리던 

(인간으로 회복되어가는) 좀비남성에게 한 인간여성이 다가가서 도움을 주는 장면이다. 그 때 도움이 필요하냐며 다가가는 인간여성에게 좀비남성은 “아직도 손이 좀비 상태라서요.”라고 너스레를 떨며 우산을 내민다. 인간여성은 기꺼운 마음으로 우산을 펴준 후 비를 맞으며 가던 길을 가려고 하는데, 좀비남성은 비를 맞고 있는 인간여성에게 우산을 함께 쓰길 제안한다. 이 때, 우산을 함께 쓰고 빗속을 걸어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서로를 괴물로 여기며 증오하던 존재들이 변하여 서로의 꿈과 삶을 응원하기 시작할 때 우리는 어떤 기적을 맛볼 수 있을까? 영화

<웜 바디스>는 우리의 사랑과 서로를 향한 진심어린 응원으로 마른 뼈들이 생기 있게 부활할 수 있다는 성서의 말씀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하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넣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에스겔 37:5-6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것은 진정으로 마른 뼈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단순히 좀비가 인간으로 회복되는 일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존재의 변화만큼이나 관계가 변화되는 것. 바로 인간과 좀비가 함께 비를 맞으며 내일을 향해 걸어가는 그 뒷모습이 진정한 다시 삶(부활)의 체현 아닐까. 그렇기 때문인지 성서는 '너희'라는 표현에 집중하고 있다. 

 

'너희에게, 너희 속에, 너희가 살아나리라'

 

<웜바디스>는 필자가 근래에 보았던 가장 로맨틱했던 영화이다. 비록 선혈과 살점이 낭자하긴 하지만 그 속에 구원과 회복, 사랑과 연대의 감성을 느끼고 싶은 분들에게 강추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도 선혈과 살점이 낭자하긴 마찬가지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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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출신의 심리학자이며 가톨릭 신부인 헨리 나우웬(Henri Nouwen, 1932-1996)의 책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중세기 어느 수도원에서 좀 건방지고 교만한 구석이 있는 젊은 수도사가 있었다. 그 수도원에 아주 노련하고 존경받는 수도사가 이 젊은 수도사를 가르쳤다. 그는 아주 딱딱하고 견고한 흙을 만지면서 젊은 수도사에게 말했다.“여보게, 여기 물 좀 붓지.” 젊은 수도사는 물을 부었으나 물은 흙 속으로 스며들지 않고 그냥 옆으로 흘러내렸다. “이런 딱딱한 흙덩어리는 물을 받지 못하지.” 

노련한 수도사는 망치를 집어 들더니 흙덩이를 잘게 부수기 시작했다. 흙이 잘게 부서지자 다시 물을 붓도록 했다. 이번에는 물이 잘 스미어 들었고 흙은 축축이 적시기 시작했다. 노련한 수도사는 웃으며 말했다. “여기다 씨를 뿌리면 틀림없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겠지? 이것을 우리 수도하는 사람들은 ‘깨어짐의 영성 법칙’이라고 말하지.”

 

‘깨어짐의 법칙’이란 나의 교만과 완악함이 깨어지고 부서질 때에 하나님의 은혜는 그 위에 내리게 되고, 그리고 아름다운 꽃과 열매를 맺게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만하고 완고한 상태에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도 베풀어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깨뜨리신 후에 다시 회복하여 역사해 주시는 과정을 걷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깨어져야 씨앗을 품을 수 있습니다.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잠언17:3)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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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장 

에큐메니즘 II (3)

7.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형제됨을 믿습니다.

 

2.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

우리는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 평화의 세계를 이루는... 믿습니다.

 

감리교의 복음적 에큐메니즘이 추구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와 사랑이 함께 공명하며 공존하는 공동체이다. 정의와 사랑은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정의의 하나님과 사랑의 하나님을 말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이 말하면 사랑의 하나님이 침묵하고, 사랑의 하나님이 말하면 정의의 하나님이 침묵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정의와 사랑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진정한 정의는 사랑을 함축하고 있고,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내포해야만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진정한 정의와 진정한 사랑이 입을 맞추고 포옹하는 공동체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정의를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진정한 정의는 사랑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과 인간들을 사랑하시기 대문에 정의를 세우시며, 이 세계에 정의를 세워 가시면서 사람들을 사랑하신다.

십자가 사건을 표면적으로 보면, 불의한 세력(로마제국과 유대교)에 의하여 의로운 예수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사건이므로 사랑의 사건이 될 수는 있어도 정의롭지 못한 사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시밪가 사건의 심층을 읽어간다면,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로마제국을 심판하고, 유대교의 불의를 심판함으로 정의를 세워가는 사건이며 사랑의 사건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집을 나간 탕자를 조건 없이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사랑의 사건일 수는 있지만, 탕자의 형의 입장에서는 정의롭지 못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탕자를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정의를 세워가고 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힐책하신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회칠한 무덤과 같기 때문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의롭게 보이지만, 속에는 위선과 불법이 가득하다."(마태복음 23:27-28)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정의감은 찾아볼 수 있지만, 예수의 사랑은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한 사랑이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으로 읽어가야 한다. 만약에 사랄이 없다면 예수님은 그저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하셨을 것이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을 나누고’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은 함께 가야 함을 고백하고 있다. 사랑이 없는 정의는 분노가 될 위험성이 있으며 정의가 없는 사랑은 편애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기쁜 식인 복음을 전파하면서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도 함께 전파하고 나누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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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0장 26-27절]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덮어 둔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긴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듣는 것을, 지붕 위에서 외쳐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해서 다닐 때 어떤 선배를 보았습니다. 가끔 나타나서 무슨 전단지 같은 것을 들고 바쁘게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저 분은 어떤 분이신가 궁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행색이 좀 더 누추하였고 뭔가 깔끔한 느낌이 들지 않았지만 진성성이 느껴지는 그런 분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1988년 전경 복무 당시 기독교회관에서 양심선언을 하시고 2년여 수배생활, 1년여 옥중생활을 하신 분이신데, 그때 그분을 지키시려고 모임이 만들어졌고 그 모임이 우리 교우들도 잘 아시는, 양심수를 후원하는 '고난 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고난함께)'의 모태였다고 합니다.

이 말씀을 읽는 중에 그 선배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사실 그 선배뿐이겠습니까! 우리 역사에는 억압과 폭력, 부정과 불의에 대한 수많은 양심선언, 고발, 폭로, 분신의 역사가 있었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그분들의 희생과 선언, 선포 덕분일 것입니다. 양심선언을 하신 분들이 다 이 성서구절을 마음에 품은 것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것은 영원히 덮여 있는 것은 없고 영원히 숨겨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일의 배후세력은 역시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밝은 데서,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침이 있어야 알려지고 드러나 고치게 되고 바뀌게 됩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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