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령충만하십시오(4)
성경 : 요한복음 14:25-27
25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이 말을 너희에게 말하였다. 26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실 것이며,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 27 나는 평화를 너희에게 남겨 준다. 나는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아라.
들어가며 : 지난 18일에 용산에서 용산철거민 참사사태 150일 기념 문화제 겸 기도회를 진행하였습니다. 실제로는 문화제였지만 행사 제목에는 기도회라는 말이 들어갔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일반 집회와 시위, 시민행사는 경찰이 절대적으로 불허합니다. 종교집회는 허가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에 요즘 시민사회단체가 종교에 요청하여 집회의 자리를 마련하고자 합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현실입니다. 지난 5-6월 동안에 경찰의 집회불허율이 100%라고 합니다. 세상이 거꾸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편 그처럼 시대의 흐름을 따르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이 정부처럼 거꾸로 돌아가는 교회가 사실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이라면 앞으로 10-20년 뒤에 교회에 남을 사람은 얼마나 될까 하는 두려운 마음을 느낍니다. 감리교회운동 창시자인 존 웨슬리는 ‘감리교회가 사라지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감리교회 정신이 사라지는 것은 두렵다’고 하였습니다. 이 시대에 우리는 교회가 없어지는 것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예수운동의 정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 것입니다. 참된 교회를 이 땅에 세우기 위해 기도하고 삶에서 작은 실천들을 만들어가는 성도들에게 크신 은혜와 능력이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들어가서 ; 성령강림절후 절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성령은 뜨거운 불길로 이미지화 됩니다. 그 불길은 그 어떤 것으로 끌 수 없습니다. 그처럼 성령의 능력은 우리 삶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입니다. 속에 불덩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삶은 분명 다를 것입니다. 불덩어리를 품고 사는 사람은 그 불덩어리의 뜨거움 때문에 불덩어리의 이끌림대로 살아갑니다. 열정적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유혹과 도전 앞에서도 분명한 선택을 합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신앙은 선택입니다. 매 순간마다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것이 인생인데 그때마다 믿음의 선택을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아야 하고 충만히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성령은 보혜사라고 합니다. 보혜사란 변호인, 카운슬러, 혹은 도움을 주는 이, 위로하는 이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에 보면 counselor, helper, comforter로 나와 있습니다. 즉 우리 인생에 도움을 주고 카운슬링을 해주고 때로는 위안을 주는 역할을 통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떤 도움을 주고 어떤 카운슬링을 해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가르치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생각나게 하는 역할을 해주십니다.
구약성서에 보면 쉐마 혹은 스키마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신명기 6장 4절을 찾는데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말입니다. ‘들으라 이스라엘아’로 시작되는 본문은 모든 영적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고 실천하여야 할 바를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암송하라며 몇 가지 방법을 제시합니다. 신명기 6:6-9은 [6 내가 오늘 당신들에게 명하는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7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나 길을 갈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일어나 있을 때나, 언제든지 가르치십시오. 8 또 당신들은 그것을 손에 매어 표로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으십시오. 9 집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서 붙이십시오.]라고 권면합니다.
이마에 써붙이고 손목에 매고 집 문설주와 대문에 써서 붙이라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제가 젊었는데도 건망증이 심해서 무슨 약속을 해도 잘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요즘은 작은 수첩을 가지고 다니거나 PDA를 소지하고 다니는데 그 전에는 중요한 일은 볼펜으로 손바닥에 진하게 써서 다녔었습니다. 그것도 세수하면 지워질까봐 물이 잘 안 닿는 부분에 쓰기도 하였지요. 약속이 많은 날은 제 손과 팔뚝 여기저기 검고 굵은 글씨들이 잔뜩 적혀 있기도 했습니다.
원불교에서는 유념손목시계라는 것을 만들어 차기도 한다고 한 교무님이 말씀하시더군요. 시계에 특수 장치를 합니다. 일종의 카운터 같은 역할을 하는 장치인데 하루를 살다가 유념, 말 그대로 깨어서 의식적으로 살았다고 느껴질 때 스위치를 플러스 쪽으로 하나 올립니다. 반대로 아무 생각없이 무의식적으로 무념하게 어떤 행동을 하거나 말을 했다고 느껴지면 스위치를 마이너스 방향으로 하나 돌립니다. 그렇게 하루를 살고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하루를 평가하며 반성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망각이 잦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눈을 들어 보이는 곳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써놓고 잠시도 잊지 말라는 뜻이겠지요. 그러므로 매순간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기억하고 잠시라도 잊지 않고 마음에 품고 삶에서 반영하는 것은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전통은 매 호흡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기도하라는 영성훈련을 강조하였습니다. 예수기도 같은 기도훈련이 그와 같습니다.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퀴리에(나의 주님)’ 하고 내쉬면서 ‘일레이손(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합니다. 그 기도를 계속하면 매 호흡마다 키리에 일레이손을 기도하게 되고 무엇을 하든 그 기도를 머리와 입으로 암송하면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식적으로 기도하는데 어느 누가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요즘 교리설교를 잘 안하려고 합니다. 교리에 대해서 모르시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웬만한 건 대충이라도 다 아시지 않습니까? 문제는 우리가 교리를 모르는 것이 아니라 교리에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교리설교가 아니라 교리를 어떻게 삶에서 적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저에게는 더 큰 화두이고 주제인 것입니다. 신앙적 원리에 따라 사는 것을 위해서는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즉 매 순간마다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는 삶의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충만하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은 27절에서 ‘평화’라는 주제로 귀결됩니다. 즉 평화를 이루는 일을 위해 의식적으로 깨어 매 순간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실천하고 헌신하고 묵상하고 기억하는 삶이 바로 성령충만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어야 할이지 누구를 만나야 할지 어떤 일에 찬성하고 어떤 일에 반대해야 할지는 압니다만 막상 그 순간이 닥치면 하나님의 뜻대로가 아니라 개인적 인간적 욕심과 탐욕, 이기적인 동기로 움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쉐마를 늘 암송하고 기억하고 눈에 보이는 곳에 써붙이는 삶, 즉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삶을 살지 않으면 매번 우리는 평화보다는 폭력을, 나눔보다는 독점을, 사랑보다는 질투와 미움을, 생명보다는 파괴를 선택하는 경험을 적지 않게 해왔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힘들어지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이 20% 이상이나 되는데도 지구상의 그 어떤 나라보다도 살기에 퍽퍽한 것입니다.
우리가 큰 착각을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것이, 성령의 힘이라는 것이 우리에게 불가항력적인 어떤 외부적인 힘으로 다가와서 우리가 알지 못하고 원하지 않아도 우리 삶을 막 어떤 방향으로 이끌고 가는 힘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이 어찌 성령의 능력입니까? 로봇이지요? 성령이 갑자기 외부에서 우리에게 닥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모시는 것입니다. 성령충만한 삶을 살면 그것이 성령을 모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충만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이 우리의 의사와 의지와 상관이 없다면 그것은 성령의 폭군성만을 강조할 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분 성령 충만하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성령충만하십시오!
나가며 : 이 시대는 성령이 함께 하셔야 구원을 얻습니다. 이 시대 이 민족, 이 나라의 성도들은 반드시 성령충만을 받아야 합니다. 의식 없이 유행이 이끄는 대로, 풍조가 이끄는 대로, 감정이 이끄는 대로, 육체의 본능과 욕망이 이끄는 대로 산다면 그것은 성령이 없는 삶입니다. 불덩어리가 없는 삶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하는 분명한 의지로 하루하루 일분일초를 산다면 그것이야말로 불덩어리를 품고 사는 삶, 성령이 충만한 삶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삶의 변화를 결단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