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알이냐, 하나님이냐?
성경 : 열왕기상 18:20-22
20 아합은 모든 이스라엘 자손을 부르고, 예언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았다. 21 그러자 엘리야가 그 모든 백성 앞에 나서서,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은 언제까지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머뭇거리고 있을 것입니까? 주님이 하나님이면 주님을 따르고, 바알이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십시오." 그러나 백성들은 한 마디도 그에게 대답하지 못하였다. 22 그래서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다시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의 예언자라고는 나만 홀로 남았습니다. 그런데 바알의 예언자는 사백쉰 명이나 됩니다.
들어가며 :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사로 잡혀 말씀을 이루고 감동을 따라 사는 성도들에게 큰 은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성어버이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네비게이션이 보편화되었습니다. 요즘은 아무리 작고 후진 차라도 네비게이션 하나씩은 다 달려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은 가끔은 좀 돌아가고 황당한 곳으로 인도하기는 하지만 결국은 목적지에 다다르게 합니다. 저도 먼 길을 갈 때면 꼭 사용하는데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어떻게 길 찾아갔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하기 전에 충청도 어느 곳을 찾아가는데 길을 잘못 들어 깜깜한 밤이 될 때까지 헤맸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헤맨 것은 어느 한 갈림길에서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즘은 신앙을 인도하는 네비게이션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신앙을 하다보면 수없이 많은 갈래 길을 만나게 됩니다. 그 갈래 길에서 방향을 잘못 들면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가서 하나님과 정 반대편에 서게 되는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한마디로 선택입니다. 수많은 갈래 길에서 어느 길을 선택할 것인가 하는 기준을 제시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저는 단언합니다.
들어가서 ; 요즘의 경우에는 더욱 첨예한 갈래 길 앞에 서게 됩니다. 요즘 종종 만나는 갈래 길은 바알의 길이냐, 하나님의 길이냐를 선택하는 두 갈 래 길입니다. 이런 선택의 기로는 비단 오늘날만의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엘리야가 살던 시절에도 이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 비추어보면 신앙은 결국 선택인 것입니다.
바알은 풍요를 상징하는 우상입니다. 가나안 땅에서 바알은 구름과 비를 관장하는 신으로 통합니다. 비옥한 땅을 자랑하던 가나안은 농사를 지으면서 살던 곳입니다. 그래서 비가 제때 적당히 와주는 것이야말로 그해 농사를 성공하냐, 실패하냐의 관건인 것입니다. 그러니 바알신앙이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바알은 다산의 신으로 여겨졌습니다. 농사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력입니다. 그러나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야말로 또 하나의 중요한 변수입니다. 평균수명이 길지 않고 유아사망률이 높던 시절이니 자식을 많이 낳는 것이 부자가 되는 길입니다. 바알신앙은 종교행사 과정 중에 섹스의 순서가 있습니다. 바알 예배당에는 남창과 창녀가 상시 거주하면서 제사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공식적으로 퇴폐적인 간통을 인정한 것입니다.
페니키아의 바알숭배는 전적인 사유재산 소유를 인정하고 장려하는 방식으로 발달했습니다. 페니키아는 상업도시로 상업적 이윤의 극대화가 바알신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제한적인 개인소유가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니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은 신의 이름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재물을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바알이라는 신이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 탐욕을 바알신이라는 허상을 만들고 거기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반면 하나님 신앙은 개인적 소유보다는 공동체적 나눔을 중요한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땅을 나눌 때 그 땅은 가문, 지파에게 나누어준 땅이니 사고 팔 수 없다고 규정하였고 팔았다 하더라도 희년이 되면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부자는 동족, 친척이 진 부채를 물러주고 갚아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보아스가 룻 집안의 빚을 갚고 나오미를 아내로 맞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배경입니다. 또 고아와 과부, 이방인과 나그네를 돕고 그들을 돌보라는 것도 하나님 신앙의 매우 중요한 지점입니다. 하나님은 심지어 축제 때에 바친 거룩한 제물을 가난한 이웃과 나그네를 초대하여 함께 나누어 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 신앙은 기본적으로 공동체적 나눔과 공유를 전제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물질을 제대로 사용하는 법이고 모두가 풍요로워지는 길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탐욕에 찌든 인간은 바알신앙을 마치 하나님의 신앙인 양 하나님 신앙 안으로 끌어들여 하나님 신앙을 변질시키고 무한적 탐욕을 축복으로 포장하고 미화시키고 싶었습니다. 하나님과 바알의 중간에서 양다리를 걸치면서 하나님의 복과 바알의 복을 다 받고 싶어 하였던 것입니다.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왕이면 나누는 것이 아니라 혼자 소유하고 싶어하는 마음, 이게 바로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 시대입니다. 자본주의 시대, 국가에 살면서 초기 기독교공동체처럼 모든 것을 다 팔아 서로 나누어 갖자는 얘기는 어쩌면 너무나도 과격한 공산주의 사상처럼 들릴 지도 모릅니다. 물론 열심히 일하는 사람과 게으른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평등도 고려해야 한다는 불만도 있을 것입니다. 가장 적절한 선택은 개인적인 소유를 인정하되 제한적으로 인정하고 공공적 재산에 대해서는 그 어느 누구도 사적인 소유, 사유화를 하지 못하도록 제한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면 공공적 자산은 무엇이겠습니까? 의료, 교육, 언론, 교통 등의 서비스가 아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같은 공공적 자산을 사유화하고 그것을 통해 돈벌이 욕심, 무한자본증식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고 기독교 공동체 신앙에 대한 테러인 것입니다.
미디어 언론은 국민의 귀와 눈입니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눈과 귀를 대기업, 보수언론, 수도권 거주자에게 다 넘겨주자면 그 눈과 귀를 사용하는 이들은 모두 보수적인 사람이 될 것이고 대기업의 무한소비자가 될 것이며 지역적 우월감을 갖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특정인, 특정기업, 특정 세력에게 통째로 넘겨주겠다는 발상은 철저한 바알신앙이고 우상숭배입니다. 모두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사유화함으로 제 배를 채우겠다는 못된 심보인 것입니다.
대학 등록금이 난리입니다. 텔레비전에서 볼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등록금 때문에 대학생들이 고기잡이 어선을 탑니다. 술집에 나갑니다. 교육은 공공의 자산입니다. 그런데도 대학들은 국가적 미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고 돈벌이로 이용하는 일에 급급합니다. 병원은 또 어떻습니까?
쌍용차를 봅시다. 그것이 쌍용차 사주의 개인재산입니까? 어려울 때마다 국민의 세금을 공적자금으로 받아 위기를 넘기지 않았습니까? 노동자들의 피땀 없이 기업이 존재합니까? 사람들은 대기업이 마치 대기업 사주의 것이라고 착각하지만 실제로 대기업 사주도 주식지분은 3-5% 밖에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성실하게 노동하는 이 없고 똑똑한 사장만 있다고 어떻게 국제적인 기업이 되고 그 엄청난 수출실적을 달성하겠습니까? 결국 기업도 일정부분은 국민의 것이고 마땅히 국민들의 노고에 공로가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는 부자들을 함부로 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들은 소득의 40%까지 때로는 그 이상 세금으로 납부한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이 부자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고 합니다. 말 그래도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한소유가 아니라 공동체적 소유를 인정하는 미국의 국가적 신앙심의 발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름 시즌이 되니 여기저기서 연락이 옵니다. 승합차를 빌려달라는 것입니다. 승합차가 없는 교회와 단체에서 미안해하면서 요청을 합니다. 사실 좀 그렇습니다. 빌려주면 여기저기 긁어오고 사고 염려도 있고. 그러나 차야 사고 날 수도 있는 것이고 사고 나면 보험처리 하면 되는 것이지요. 어차피 세워놓을 차라면 나누어 쓰는 것이 맞는 일일 겁니다. 더군다나 교회라면 말입니다. 모두가 다 차를 사는 것이야말로 교회가 지양해야 할 일입니다.
소유는 필연적으로 공공재산을 침해하게 됩니다. 자동차를 타면 그만큼 이산화탄소가 나오고 환경이 오염되고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주는 것이지요. 차타고 비행기타고 놀러가고 싶은 곳에 마음껏 다니는 것이 돈만 많으면 하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온 인류가 함께 소유한 지구환경을 소유한 이들끼리 다 사용하고 훼손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소유를 최대한 공유로 바꿔야만 공정해질 것입니다. 이것이 공정한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요!
나가며 : 소유에 대한 헛된 망상이 오늘날 우리를 무한소유, 무한소비로 내몰고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무한소유의 탐욕이 아니라 공동체적 나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한 미디어언론이나 은행을 사유화하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기독교신앙에 도전하는 행위입니다. 기업이 개인적인 소유라고 착각하고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모는 것이야말로 반신앙의 극치입니다. 고유의 공공적인 이해가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눔을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 앞에 선명하게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바알이냐, 하나님이냐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신중하게 우리 삶을 반성하고 바른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성도들과 그 삶에 무한한 지혜와 용기를 주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