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8월 12일 성령강림절후 제11주일 좋은만남교회 낮 예배 설교
렛 미 인
이관택
본문: 누가복음 19:1-10
1 예수께서 여리고에 들어가 지나가고 계셨다. 2 삭개오라고 하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 그는 세관장이고, 부자였다. 3 삭개오는 예수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려고 애썼으나, 무리에게 가려서, 예수를 볼 수 없었다. 그가 키가 작기 때문이었다. 4 그래서 그는 예수를 보려고 앞서 달려가서,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께서 거기를 지나가실 것이기 때문이었다. 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러서 쳐다보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삭개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 6 그러자 삭개오는 얼른 내려와서, 기뻐하면서 예수를 모셔 들였다. 7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서, 모두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그가 죄인의 집에 묵으려고 들어갔다." 8 삭개오가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보십시오.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습니다. 또 내가 누구에게서 강제로 빼앗은 것이 있으면, 네 배로 하여 갚아 주겠습니다." 9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0 인자는 잃은 것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새하얀 뱀파이어 영화 - 렛미인
여름 더위가 한창 기승입니다. 지난 주에는 교회사무실에서 새벽에 혼자 글을 쓰는데, 보일러 온도계를 보니까 글쎄 온도가 36도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이 무슨 적도기니도 아니고, 새벽에 36도라.. 덕분에 지난 2주간 의도치 않게 게을러 진 것도 사실입니다. 뭘 하고 싶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날씨. 열정은 없는데, 짜증은 열정적으로 나고, 마음은 뭔가를 갈망하는데, 몸은 안 움직여졌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이 더위가 오늘부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풀 꺾인다고 하니까 마음이 조금 놓입니다.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최근에 발표한 노래 중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곡이 있는데, 덥다고 호들갑 떨던 우리의 여름도 이렇게 지나갑니다.
여러분은 이 더운 여름, 무엇을 하면서 더위를 식히셨습니까? 저는 딴 것 없습니다. 시원한 수박 한 덩이와 무서운 공포영화 한편이면 충분합니다. 사실 무서운 거 잘 못 보지만 여름밤엔 가끔 시도해 보는데요. 오늘은 공포영화 한 편을 여러분께 소개하면서 말씀을 시작하려 합니다. 바로 뱀파이어를 소재로 다룬 스웨덴 영화 <렛미인>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새하얗게 눈으로 덮인 북유럽의 한 작은 마을, 그 마을에서 뱀파이어가 사람들을 습격합니다. 한 명 두 명 희생당한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을은 혼란에 빠지죠. 특히 새 하얀 눈 위로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왠지 오싹하지 않습니까?
물론 <렛미인>이라는 영화는 여타의 피가 낭자하고, 잔인하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뱀파이어 영화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뱀파이어 영화와는 어울리지 않게 영화는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표방합니다. 뱀파이어인 주인공이 12살의 소녀라는 점, 그리고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그 뱀파이어 소녀와 인간 소년의 아기자기한 사랑이야기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도저히 이어질 수 없는 이들의 만남은 모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가르쳐주듯이 안쓰럽고 안타깝습니다. 또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저는 무엇보다 이 영화의 제목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렛미인! 바로 “네 안에 들어가게 해줘”라는 뜻입니다. 당신 속에 들어가고 싶다라는 말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뱀파이어의 특징이 있는데, 어떤 영화에서는 뱀파이어가 마늘을 싫어하거나, 십자가를 싫어하잖아요? 근데 이 영화의 뱀파이어는 누군가의 초대를 받지 않으면 그 타인의 공간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초대를 받지 않고 그 공간에 들어간 뱀파이어는 고통을 당하게 되지요. 그러니까 뱀파이어들은 미친듯이 사람들의 초대를 받기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때론 유혹하고, 때론 협박합니다. 대부분의 뱀파이어들은 피를 얻기 위해 사람에게 접근합니다. 하지만 12살의 소녀 뱀파이어는 목적이 다른데 있습니다. 바로 이 소년의 마음입니다. 외로운 이 소녀 뱀파이어는 소년의 마음을 원합니다. 결국 렛미인 - “네 속에 들어가게 해줘”라고 이야기 하는 소녀는 말을 바꿔서 “나를 네 마음 속에 담아줘”러고 말합니다. 렛미인이라는 말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네 속에 들어가게 해줘” 또 다른 하나는 “나를 네 마음 속에 담아줘”
옆 사람 보시면서 인사해 보겠습니다. “내가 당신 마음 속에 들어가게 해주세요 - 렛미인”
불행한 부자 삭개오
오늘 본문은 늘 고독이 따라다니는 우수에 찬 사람, 다른 말로 이야기하면 당시 이스라엘의 왕따의 표상! 삭개오의 이야기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논란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는 부자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당시에 세관장이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살았고, 영향력도 있었습니다. 오히려 주변의 선량한 사람들을 착취하면서 살았던 악독한 인물이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에 충성하던 민족의 반역자이기까지 했습니다. 어째서 이런 사람을 예수님께서 만나주셨을까요? 가난하고, 힘없고, 병든 사람들을 만나기에도 벅찼을 텐데 말입니다.
성서는 이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역으로 이야기 합니다. 행복과 불행은 삶의 환경과 조건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삭개오! 그의 삶이 행복해 보이십니까? 불행해보이십니까? 사람들의 판단으로 삭개오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더러운 돈이면 어떻습니까?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쓰면 되지! 남들에게 손가락질 좀 받으면 어떻습니까? 잘살면 그만이지! 라고 생각하는 우리에게 성서는 그런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사는 우리도 곰곰이 살펴보면 “삭개오 정도만 살면 좋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토록 행복의 전제조건이라고 생각하는 물질적인 축복, 경제적인 여유, 약간의 권력... 그것을 갖는다면 행복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것이 없다면 불행할까요?
삭개오의 삶이 말하고 있습니다. 상관없다! 진정한 행복은 무엇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만나느냐를 통해서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삭개오는 죽으려는 심정으로 예수님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키가 작았다라고 본문에서 표현하고 있지만, 그것은 물리적인 키가 아니라 삭개오의 자존감입니다. 삭개오는 자기 자신이 남들 앞에서 얼마나 작아보였는지 모릅니다. 외로움과 절망에 파묻혀 도무지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삭개오를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 아무것도 아닌 사람, 꼬일대로 꼬인 인생이라며 한탄하는 그 삭개오! 어쩌면 죽음을 몇 번이나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실제로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시도를 몇 번이고 시행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만나고자 그 높은 뽕나무에까지 단숨에 올라간 것 아닙니까? 자기를 그렇게도 싫어하고 증오했던 사람들 사이를 뚫고 뽕나무에 올라갔다는 것은 예수님 만나는데 거의 목숨을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절실했다는 것이고, 그 만큼 그의 삶이 절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제가 당신의 삶 가운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런 삭개오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내려오너라 오늘 내가 네 집에 묵어야겠다.” 이 말이 성서니까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석되는 것이지 실제 예수님이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겠습니까? 조금 더 정중하게 이야기 하셨을 것입니다. “제가 당신 집에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이 말은 단순히 하룻밤 신세를 진다는 의미를 뛰어넘습니다. 실제로 당시 이스라엘에서 밥을 함께 먹는다는 행위, 함께 잠을 잔다는 행위는 종교적인 의미까지 포함된 거룩한 영역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가자마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죄인의 집에 갔다고 손가락질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물어보신 말은 단순히 “오늘밤 당신 집에 머물러도 될까요?”가 아닙니다. 바로 “제가 당신의 삶 가운데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또는 “당신 속으로 들어가게 해주세요”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지금 렛미인하고 계신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과정을 통해 절망 밖에 없었던 삭개오의 삶을 뚫고 들어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삭개오에게 말씀하시죠. “나를 네 마음 속에 담아줘” 예수님을 마음속에 품은 삭개오는 어떻게 됩니까? 자기가 가진 재산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 자신이 착취했던 이들에게 나눠주고도 행복한 삶을 살아갑니다. 진정한 행복을 찾게 된 것이고. 그 행복은 삶을 제대로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만난 인생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구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전히 렛미인.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2000년 전 예수님을 통해서 삭개오에게 ‘렛미인’ 했듯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렛미인’ 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너의 삶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들어가도 되겠니?” “들어가게 해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음 문을 여실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우리 삶 가운데 끊임없이 렛미인 하시는 예수님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담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까? 삭개오처럼 하루 아침에 극단적으로 변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여러분의 삶이 아주 조금씩이나마, 천천히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시길 소원합니다.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응원했습니다.
요즘 올림픽 기간이라 매일 TV에 나오는 광고 문구하나가 참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응원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그들이 우리를 응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뭔가를 대단하게 한다고 착각하는데, 실상 넓은 틀로 보면 그렇지 않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다보면 예수 믿으면 천국간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내가 예수 믿어서 천국가는 줄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먼저 믿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이 부족한 우리의 삶 가운데 들어오고 싶다고, 나를 먼저 믿어 주신 것입니다. 삭개오가 그것을 깨달은 거예요. 실은 삭개오가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믿어 주셨다는 그 사실을 말입니다. 렛미인, 너의 삶에 들어가게 해줘!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 앞에 여러분은 어떤 삶으로 응답하시겠습니까?,
더운 여름은 결코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요즘 우리 주변의 고난 받는 이웃들이 유독 더욱 살기 어려운 처지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무자비한 회사의 횡포에 맞서 파업 중인 노동자들은 용역깡패들에게 침탈 당하고, 제주도와 두물머리에서는 국가로 부터 엄창난 폭력을 당하고 있습니다. 무더운 여름은 이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합니다. 길거리에서 노숙하시는 분들은 더위 때문에 온몸에 피부트러블과 화성일 입을 지경입니다. 누구에게나 더욱 올 여름 특히난 고난의 현장에 있는 이들에게는 더욱 가혹합니다. “이또한 지나가리라”이야기 하지만 실상 이들의 아픔은 가을이 되어도 겨울이 되어도 그냥 지나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삭개오에게 렛미인 했던 겇처럼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렛미인 했던 것처럼 우리로 하여금 또 다른 렛미인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이 가혹한 야만의 여름은 그냥 지나가지 않습니다. 삭개오와 같이 자신의 많은 것들을 나워주고, 새로워지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잠언 20장 27절을 보면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바로 여호와의 등불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사람 한사람이 하나님의 등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또한 매순간 우리에게 자신을 맡기시는 하나님을 마음을 활짝 열고, 두발을 벌려 행복한 마음으로 환영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