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제가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모임'(고난함께)의 평화캠프 스탭세미나에서 행한 강연 중 한국현대사 부분입니다.
박세길 씨의 [다시 보는 한국 현대사]를 요약한 내용입니다.
해방부터 한국전쟁 휴전까지의 역사 요약
1945년 8월 8일, 소련이 참전함으로 일본의 전세는 완전히 기울게 된다. 결국 8월 15일, 일본은 한반도에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일본은 여운형을 책임자로 하여 행정권을 인수하였다. 여운형은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위)를 조직하여 담화문을 발표하고 각종 권한과 기관을 조선총독부로부터 이양 받았다. 8월말에는 전국에 145개의 건준위 지부가 설립되었고 이는 곧 인민위원회(이하 인민위)로 전환되었다. 인민위는 실질적인 통치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승전국 미국의 생각을 달랐다. 소련의 진출범위를 최소화하기 위해 견제하였고 일본을 대신하여 아시아 지역에서 지배권을 확립하고자 하였다. 중국의 홍군(모택동 부대)와 전쟁을 시작하였고 필리핀에서는 식민지 부활을 위한 계획이 추진되었다. 이런 계획은 소련의 반발을 불렀다. 소련은 71만이나 되는 일본군과 2주간 격렬하게 전투를 벌여 8천 명의 인명손실을 입었지만 미국을 적시에 도울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국은 단 며칠 동안 전쟁에 참가한 나라인 소련에게 전리품을 나누어 주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후 독단적으로 지위를 확보하여 영국과 소련 등의 반대를 받았지만 막을 수는 없었다. 미국은 차후 한반도 내에서 지위를 보장 받기 위해 분한점령을 소련에게 요청하였고 한반도에는 38선이 그어지게 되었다.
38선 분할에 대한 미국의 요청을 소련은 별다른 반대 없이 받아들여 서울에서 38선 이북으로 철수하였다. 38선은 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위해 설정되었으나 실상은 이미 여운형 등에 의해 무장이 해제되어 있었다. 그리고 맥아더를 위시한 미국은 9월 8일이 되어서야 한반도에 진입하였다. 여운형을 중심으로 이미 치안이 확보되어 있었으나 미군은 선발대를 보내 미군이 진주하기까지 모든 체제를 변경하지 말고 일본통치기구를 미군에게 인계하라고 통보하였다. 즉 미군은 해방군으로 이 땅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일본을 대신한 새로운 주둔군으로 들어온 것이다.
맥아더는 9월 7일에 포고문을 통해 모든 기관과 직원은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종래의 기능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인이 구성한 건준위를 부정하고 다시 일본인의 지위를 인정한 것이다. 미국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게 우호적으로 대했고 전쟁당사자로 패전한 일본은 오히려 미군의 주둔을 열렬히 환영하기까지 하였다. 조선총독부의 관리들은 재임용되었고 인민공화국은 부정되었다.
9월 8일 미군이 한반도에 입성하는 날에는 일본 경찰을 동원 한국인들의 외출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미군을 환영하고자 나온 인파는 일본경찰의 총격을 받아 상당수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이에 대해 한국인들이 항의하자 미군은 오히려 정당한 공무집행이었다며 일본을 두둔하였다. 여기에서 정복자로 입성한 미군의 정체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1945년 12월말 미국, 소련, 영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를 통해 한반도에 대한 5년간 4개국에 의한 신탁통치를 한 후 조선의 통일정부 수립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한반도의 운명은 강대국의 주도에 의해 결정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어 조선은 이를 충실히 이행하여 속히 자주독립국가를 세울 수 있도록 협조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냉전주의자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삼상회의에 대표자격으로 참여한 미 국무장관은 불순분자로 몰리고 소식은 회의가 소련의 주장에 의해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는 심각한 은폐와 왜곡으로 얼룩졌다. 여기에 친일지주들의 모임인 한국민주당은 소련이 신탁통치를 강요하였고 미국은 즉각적인 독립을 옹호하였다는 거짓과 흑색선전을 날조하였다. 여기에 이승만과 김성수 등 친일파 일당이 가세한 것이다.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민중은 이승만 일파의 주장에 휩쓸렸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것이 반탁운동이다. 반탁운동은 자연스럽게 반소련운동과 결합되었다.
물론 소련이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하다. 기자회견을 통해 삼상회의의 전말을 소상하게 알려내자 반탁운동과 이승만 일파의 운동은 타격을 입었다. 이 와중에 열린 미소공동위원회는 파행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었다. 소련은 반탁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을 배제할 것을 요구하였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에 반한다며 반박하였다. 이런 결과에는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양자가 모두 책임을 져야 하지만 특히 미국의 책임이 크다. 미국은 식민지배 당사자인 일본제국주의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근본적 장애를 조성한 것이다. 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착수하였다. 이 과정에서 남한은 일본제국주의의 잔재를 청산하지 못하고 일본경찰제, 조선총독부 공직자, 반봉건적 지주세력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었고 민중의 삶은 참담하였다. 남한의 사정은 북쪽에서 부일하였던 이들이나 지주들에게는 해방구로 인식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소련은 인민위의 존재를 확인하고 일본인들을 추방, 인민위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일본인 재산을 국유화하고 자치권을 인정하였다. 실질적 주도권은 인민위에게 있었던 것이다. 1946년에는 중앙기구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족되었고 인제잔재 청산, 기업의 국유화 및 새인 상공업의 장려, 지주의 토지 몰수, 8시간 노동제 등의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다. 무엇보다도 우선 토지개혁을 단행하여 전체 토지의 60%를 차지하고 있었던 지주들(인구의 4%)의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외에도 8시간 노동제, 사회보장보험, 남녀평등 등의 노동법령, 주요 산업 국유화령 등을 공포, 시행하였다.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이라 불리는 미국의 대소 봉쇄정책으로 냉전시대가 시작되었다. 한반도에서의 미소관계는 불편해졌고 조선독립을 위한 협상의 장도 협소해졌다. 2차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고 미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방침을 굳혔다. 남한 전역에서 임시정부수립 촉진 인민대회가 열렸으나 경찰이 해산하였다. 미국은 유엔이라는 꼭두각시를 내세워 한국의 문제를 정치위원회에서 다루고자 하였다. 소련은 외부의 개입 없이 한국이 독자적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하자고 하였으나 미국은 내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소련의 제안은 거부되었고 정치위원회는 미국의 손을 들어 한국임시위원단의 설립을 결정하였으며 유엔의 감시 하에 남북총선거를 신시하기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인의 주권을 침해하는 결정이었고 임시위원단은 전부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동맹국들이 선임되었다.
유엔임시위원회가 입국하자 노동자들은 파업을 단행하고 입국을 거부하였다. 북한도 이들의 입국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소총회는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관철시켰다. 이에 한국민중은 2.7 구국투쟁으로 일어섰으나 200만 명이 참여한 전국적 투쟁은 미군정에 의해 최소 100명이 학살되고 8,500명이 검거되는 희생을 겪어야 했다. 이런 무자비한 진압은 장기항전으로 돌입하였고 급기야 제주4.3항쟁으로 번졌다.
1948년 3월 1일, 유엔임시위원단은 5월 10일 이전에 남한 단독선거를 치르겠다고 발표하였다. 도시에서는 매일같이 시위와 투쟁이 벌어졌고 농촌에서는 야산대라는 무장소조가 조직되어 행정기관과 악질적 반동분자를 공략하였다. 4월 3일 제주에서는 30만 제주도민이 궐기하였다. 김구, 김규식, 조소앙, 김창숙 등 명망있는 애국자들도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하였다. 북쪽도 마찬가지로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집회가 개최되었고 수백만이 동참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노동당,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직업동맹 등 9개 정당 사회단체는 남북연석회의를 제안하는 공동성명서를 발표하였고 이 제안은 한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과 저명한 문화인, 100여개 이상의 정당 사회단체의 지지를 얻었다.
1948년 4월 19일에는 평양에서 남북의 56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695명이 참석한 남북한 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가 개최되었다. 역사적으로 남북이 최초로 함께 통일조국 건설에 관한 합의를 이룬 뜻있는 이 연석회의는 남한 단독선거를 분쇄하기 위한 투쟁을 결의하였다.
단독선거에 대한 민중의 저항을 받자 미국은 경찰과 건달에게 강도 높은 탄압을 지시하였다. 민중지도자들은 감금되었고 우편물은 겸검, 통행금지 시간은 연장되었다. 강압적인 선거등록은 4월 13일에 완료되었고 민중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상계엄령 하에서 선거가 실시되었다. 5.10 선거에는 애국인사들이 불참하였고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가운데 치러졌다. 전체 남한 인구의 1/3도 채 안 되는 인원만이 투표에 참여하였고 선거 며칠 전부터 학살된 인원이 350명, 투옥자는 5,425명에 이르렀다.
선거결과 무소속 85명의 일부를 제외한 120여명은 각각의 간판을 걸었으나 이승만 일파였으며 제헌국회는 이승만을 임시의장으로 선출하였으며 8월 15일에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민주주의는 짓밟혔고 민중은 피를 흘리는 와중에 대한민국은 미국의 사생아로 태어난 것이다.
미 군정의 지지를 받고 탄생한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무력에 의해 창조되었고 미국의 힘으로 보호되며 미국의 보조금에 의해 지탱되는 미국의 하청정권일 수밖에 없었다. 한미합동위원회는 미국의 지시 없이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물론 이승만과 미군정에 반대하는 민중을 압살하고 탄압하는 기구들이 조직되었고 국가보안법이 제정되었다. 그와 같은 물리력이 이승만의 정치도구였다. 미국은 소련군의 철수에 따라 하는 수없이 군사고문단 500명만 남긴 채 1949년 6월 마지못해 한반도에서 철수하였다.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 움직임에 따라 북한도 독자적인 정부를 세우기 위해 움직였다.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를 구성하고 인민군 창설을 선포하였다. 북한은 제2차 연석회의를 통해 북한의 정부수립이 공통된 합의에 따라 진행된 것임을 선전하였다. 8월 25일에는 211명의 대의원을 선출하는 선거가 실시되어 남북한을 합하여 57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확정되었다. 이어 9월 8일 헌법을 채택하고 조선인민민주주의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최고인민회의는 점령군 철퇴에 관하여 미.소 양 정부에 대한 조선최고인민회의의 요청문을 발표하고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1948년 12월 25일까지 철수를 완료하였다.
이후 북한은 안정된 체제로 각종 사회주의적 정책들을 실현하면서 자리를 잡아가지만 남한은 2.7 구국투쟁, 4.3 제주민중항쟁, 여순봉기 등 무장항쟁이 발발하였고 지리산, 태백산 등으로 들어간 유격대(빨치산)가 조직되어 항쟁하였다. 이에 대한 이승만 일파와 미군의 잔인한 살육과 진압으로 혼란이 반복되었다.
이런 와중에 한국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미국은 중공의 탄생에 대응하여 동맹국과 대중국 봉쇄정책을 펴나간다. 패전국 일본을 후방병참기지화 시켜 군수산업을 육성하며 한반도, 대만, 베트남을 군사적인 교두보로 삼는 전략방침을 수립하였다. 특히 일본은 거대한 미군기지가 되었다. 군수품을 생산할 수 있는 법적, 경제적 여건들을 조성하고 본래 일본의 군수품 생산능력을 8-90%로 끌어올렸다.
미국은 한국에 2억 달러에 달하는 군사원조를 해주고 일본을 재무장시키자 이승만은 고무되어 북진통일을 주장하였다. 1950년 1월 미 국방장관 애치슨은 한국과 대만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는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였다. 일본의 재무장에 대해 소련과 중공은 우호동맹을 및 상호원조조약을 맺고 미국의 야망에 대응하였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전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한국전쟁이 북한의 남침에 의한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이 없다. 그러나 국제적 관점에서는 이에 대해 불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이전부터 남과 북이 경계로 하고 있는 38선에서는 크고 작은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물론 쌍방은 큰 피해를 입고 인명손실을 당했다. 남한은 대부분의 군병력을 38선 부근에 배치하였고 북한이 실제전투에서는 많이 패배하였다고 기록은 전한다. 6월 25일 새벽 4시 경 옹진, 개성, 동부해안 지구에서 남북군 사이에 전투가 개시되었다. 쌍방은 서로 상대방의 침공으로 전투가 시작되었다고 주장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북한의 인민군이 도처에서 국군을 격파하였다. 28일 새벽 북한군이 서울로 들이치자 국군은 미처 무기를 후송하기도 전에 한강철교를 폭파하였다. 전쟁은 이처럼 어이없이 시작되었다. 애치슨라인을 발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즉각적으로 한국전쟁에 개입한다. 이때 미국은 남한의 국군통수권과 사법권 등 핵심적인 주권의 대부분을 넘겨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승만은 허가하였다.
물밀 듯 몰아치는 북한은 점령지역에서 지주의 토지를 몰수하고 토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인민위원 선거를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군의 개입으로 그 기세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미군은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함락시켰고 26일에는 원산에 상륙했다. 미군의 기세는 개마고원까지 몰아쳤다. 미군은 광범위한 북한주민 살상을 병행하였다. 예를 들어 45일 동안 신천군에서는 전체 인구 14만 여명의 1/4을 학살하였다. 물론 북한군도 인민재판 등을 통해 반동적 인물들을 잔인하게 숙청하였다. 정쟁은 이렇게 쌍방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지울 수 없는 분노를 자아냈다. 미군의 인천 상륙으로 고립된 북한군들은 태백산맥, 지리산, 가야산 등으로 입산하여 게릴라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들이 후에 남한에서 말하는 빨치산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아직 내전의 상처를 미처 치유하지 못한 중국은 곤혹스러웠다. 그러나 한반도가 미국의 손에 넘어가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중국군도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 중국의 완전통일과 경제재건이라는 기회를 상실한 것이다. 중국군은 중국의용군이라는 비정규 민간부대로 위장하고 한반도에 들어왔다. 산악전에 능한 중국군과 북한군은 총반격하여 남하하였다. 한반도에서의 패배를 시인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원자폭탄 사용을 고려하였고 그 권한을 맥아더에게 위임하였다. 그러나 전세계의 양심은 미국의 모험행위를 용납하지 않고 반대하였다. 오직 이승만 정부만이 찬성하였다.
전쟁은 한반도 허리 부근에서 정체되었다. 민간인으로 위장한 중공군, 북한군이 있다는 첩보를 받은 미국은 무차별적으로 민간인을 살육했다. 미군은 북한지역에 엄청난 폭탄을 쏟아 부으며 융단폭격을 했고 북한의 기반시설 및 민간시설은 전파되었다. 또 미군은 북한지역에 세균병기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미군은 부인하였지만 사실일 개연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남한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던 빨치산들은 대규모 토벌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빨치산을 도왔거나 도울 수 있다는 이유로 양민들이 학살되었고 살던 곳에서 쫓겨났다.
포로로 잡힌 북한군과 중국군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갇혀있었으나 포로의 교환에서 송환을 원치 않는다고 하여 소수만이 북한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송환을 원치 않는다던 포로들은 수시로 폭동을 일으켰다. 휴전회담을 벌이던 중 미군측 대표가 일방적으로 퇴장하여 1차 회담도 결렬되었다.
전쟁 중에도 엄청난 비리와 부조리, 민중에 대한 폭거가 남한에서 자행되었다. 100만 명의 국민방위군을 조직하여 남쪽의 교육대로 도보행군하던 중에 장정들은 허기와 추위로 5만 명 이상 죽어나갔다. 국민방위군을 위해 책정된 국가예산은 군 수뇌부의 호주머니로 횡령되었다.
이후 전쟁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고 휴전회담이 진행되었다. 휴전회담이 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불법적 조치를 취하였는데 실제로는 부산, 마산, 논산 등에 수용되었던 포로 2만 5천 명을 경찰의 손에 넘겨준 것이다. 이 포로들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가 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에 휴전협정이 정식으로 조인되었다. 그러나 이미 민간인을 포함한 남북의 사상자는 240만 명에 달한다. 중국군인도 100만 명이 한국군에 참전하여 희생당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한 기반시설도 거의 다 파괴되었다.
이때부터 국제사회는 냉전체제로 돌입하게 되었고 한반도에는 유엔의 깃발을 든 미군이 계속적으로 주둔하게 되었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유지라는 명분으로 계속적으로 남한을 자신들의 군사기지로 삼을 기회를 얻었다. 미군은 6만 5천 명 수준으로 남한에 주둔하게 되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미군이 주둔하는 나라가 되었다. 미국은 전후 복구를 위한 원조를 미끼로 남한의 경제를 자신의 영향력 안에 종속시킬 수 있었다. 여전히 북진통일을 국시로 하는 이승만 일파는 남한에서 반공이데올로기를 강요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미국은 남한을 공산주의의 도발로부터 남한을 지켜준 민주주의와 정의의 수호자가 되었고 이상향이 되었다.
[다시쓰는 한국현대사1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박세길 저, 1988년, 돌베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