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4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7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청년주일입니다.
2. 수요성서대학 가을학기를 개강하여 수요일 오전 11시, 사랑방에서 열립니다. 강의 내용은 지난 학기에 하던 '성서의 어려운 구절 이해'로 계속 이어서 하겠습니다.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합니다.
3. 다음주일부터 추석연휴가 시작됩니다. 고향 방문 등으로 장거리 이동하시는 분들은 안전한 귀향이 되시고 온 가족이 행복한 명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4. 폭우로 수해를 입고 이사를 준비하는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가정을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5. 토마토학교가 어제 새로운 학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관심과 기도 부탁합니다.
6. 29~30일에는 '교회의 미래 비전을 위한 1박2일 끝장토론회'로 "가을밤의 꿈"을 진행하겠습니다. 모든 교우들은 꼭 참석하실 수 있도록 일정을 조정해 주시기 바랍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쌍용자동차가 해고 사태 9년만에 아직 복직되지 못한 해고노동자 119명을 내년 상반기까지 전원 복직시키겠다고 합의하였습니다. 이미 30명이나 세상을 떠난 것이 억울하고 안타깝지만 이제라도 합의가 된 것이 다행입니다. 부디 이 약속이 꼭 지켜져 노동자들이 일터로 돌아가고 가족이 행복을 되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젊은 목회자들의 위기
여름 휴가를 맞아 뜻밖의 제주도 여행길에 나서 감신대 동문이자 아내의 친구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두 번의 밤을 보냈습니다. 합천 초계에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잘 하던 이 부부가 갑자기 모든 것을 내려놓고 제주도로 내려가 게스트 하우스를 하면서 '돈 잘 못 버는' 제주도 사람으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게스트 하우스에서 최근에 한 이벤트를 했습니다. 목회에 지친 사연 있는 목사를 매월 한 가정씩 선정해 무료로 묶게 해준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해당이 안 되었지만 아내가 '절친 찬스'를 사용하였습니다. 참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는데 막상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매월 한 가정에게만 혜택을 주려고 하였는데 문의 전화가 열 통이 넘게 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중 몇 가정을 초대하기로 했나고 물으니 결국 전부 다 초대하기로 했답니다. 들어보니 다들 나름대로의 힘겨운 사정이 있고 거절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제가 묶는 이틀 동안에도 세 목회자 가정을 만났습니다. 목회와 교단에 대한 회의를 가진 전도사 부부, 부목사로 있다가 교회에 분란이 일어나 결국 사임을 한 목사 부부. 그 중 한 목사님은 저도 좀 아는 신학대 후배였는데 사모님이 산후 우울증으로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사모님이 제 처제의 동기여서 더 마음이 짠했습니다.
그 게스트 하우스 안에 있는 목사들의 조합이 참 특이했다고나 할까요! 목회를 그만 둔 마음 좋은 전직 목사인 게스트 하우스 사장, 나 같은 날라리 목사에 분란 때문에 교회를 사직하고 아내 건강을 추스리는 목사, 교단의 정책과 신학에 동의하지 못하는 전도사, 그리고 왜 이 이벤트에 신청했는지 알 수 없는 보수교단의 부목사까지...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금 젊은 목회자들의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않고 그들의 목회사역에 불 붙는 듯한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교회와 교단이 그들을 품어주고 그들의 미래를 위해 함께 고민하기는커녕 그들을 소모품처럼 대우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있다는 반증입니다. 단지 개인의 불성실로 치부하기에는 교회와 하나님의 자녀들, 사역자들의 미래가 암담하여, 그저 답답한 한숨만 쉴 뿐입니다.
“작은교회 운동회를 위한 모임을 가졌습니다”
작은 교회 넷이 일영 감리교연수원에 모여서 운동회를 하고 친목을 다졌던 기억이 나십니까? 아주 까마득한 엣날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작년 5월 마지막 주일이었네요. 올해에도 양재성 목사님이 모임을 소집하셨습니다. 이번 가을에도 함께 운동회를 하고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시간을 갖자고요. 작년에 함께하지 못했던 백석교회도 같이, 다섯 교회가 10월 21일에 다시 일영연수원에 모이기로 하였습니다. 가재울녹색교회, 동녘교회, 모퉁잇돌교회, 백석교회, 좋은만남교회가 다시 뭉칩니다.
이번에는 각 교회 소개와 예배, 공동식사와 운동회, 공동체놀이 외에 작은 공연의 순서도 진행하고 시상식 하고 마치기로 논의하였습니다. 지난 두 번의 운동회를 통해 아쉽고 부족했던 것들을 보완하여 진행하기로 하였습니다. 공동식사는 각 교회에서 먹을 것을 두 가지 이상 준비해 함께 풀어놓고 뷔페식으로 먹자고 하였고 교회별 경쟁이 아니라 다섯 교회가 뒤섞여 팀을 짜 경기를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다섯 교회가 다 개성이 강하여 의견을 모으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같은 지향점을 갖는 교회들이 자주 모여 얼굴도 익히고 신앙과 삶을 공유하는 것도 큰 의미가 있는 일이기에 이번에도 함께 하기로 하였습니다. 알차고 즐거운 시간으로 준비할 테니 믿고 기대해 주세요.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17년 9월 17일 "독일에서 활동한 작곡가 윤이상 탄생"
서독과 통일 독일에서 활동한 대한민국 출신의 현대 음악 작곡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기타리스트, 첼리스트인 윤이상은 1917년 9월 17일 경상남도 산청에서 선비 출신의 윤기현과 농가 출신의 김순달 사이에서 2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고 경상남도 통영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소질을 보였고 동네 영화관에서 자신이 만든 선율이 연주되는 것을 듣고 작곡가가 되기로 작정,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서양 고전 음악을 독학, 일본 오사카 음악대학에 진학하였다. 이때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을 보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 정치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44년에는 조선 가곡 악보를 소지하다가 두 달 동안 옥살이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통영여고, 서울대 예술학부, 덕성여대 등에서 작곡과 음악이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1956년부터 유럽에 진출, 서베를린에 정착한 윤이상은 1967년 동백림사건에 연루,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세계의 유명 음악인들이 탄원하여 1969년 대통령 특사로 석방된 후 1971년 국적을 서독으로 바꾸었고 이후 죽을 때까지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그의 음악은 서양음악에 동양적 요소를 독자적으로 접목한 것으로 호평 받았다. 1995년 11월 3일 폐럼으로 세상을 떠났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7)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힌두교
1 “힌두교 하면 생각나는 것은?”
아이들의 대답입니다. 인구가 많은 나라, 소 숭배, 요가, 알라(?). 인도의 인구는 2018년 약 13억 명입니다. 중국 다음으로 많은데 젊은 사람이 많아 좀 있으면 중국을 넘어선다고 합니다. 9억 명이라는 힌두교인의 숫자는 인도의 인구와 함께 갑니다. 힌두교는 소를 먹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물소는 먹는답니다. 보호되는 건 재래종입니다. 소가 주는 유익을 생각한다면 신성시하는 걸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인도연방헌법은 소의 도축을 금지하고 있습니다. 요가는 일반적으로 건강을 위한 자세 취하기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요가(yoga)는 ‘결합하다’라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유즈(yoj)에서 나옵니다. 요가는 신과의 결합이 목적인 수행의 하나입니다. 알라? 알라(Allāh)는 힌두교가 아니라 이슬람의 용어입니다. 이상하게 몇은 힌두교와 알라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힌두교에 대한 물음에 사람들은 자주 잘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힌두교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힌두교는 불교로 이어지고 그 불교가 오랜 시간 우리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2016년 개봉된 김성수 감독, 정우성, 황정민 등이 출연한 영화 『아수라』[asura]가 있습니다. 제목 아수라가 바로 인도의 고대 언어인 산스크리트어이고 힌두교의 ‘악한 신’입니다. 그리고 나라 같지 않은 나라에 대해 악한 신들이 가득하니 ‘아수라장(asura場)’이라 표현도 합니다. 여기에, “수리 수리 마하 수리 수수리 사바하.” 매일의 아침 절, 스님들의 입에서 흐르는 아름다운 노래로 들립니다. 불교의 경전 중 하나인 『천수경』 처음 구절입니다. 이 마법의 주문 같은 구절도 산스크리트어라면 어떤가요? 뜻은 ‘좋은 조짐을 주실 존자여(수리), 큰 존자여(마하수리), 지극함(수수리)을 원만하게 이루소서(사바하)’입니다. 조금 궁금하신가?
2 “옴 타트 사비투르바렌얌 바르고 데바스야 디마히 디요 요 나흐 프라초다야트.” ‘가야트리 만트라’입니다. 『베다』[Veda]에 나오는 태양과 같은 신에 대한 찬미로 아이들에게 가장 먼저 가르치는 힌두교인에게 중요한 주문(기도문?)입니다. 『베다』는 ‘보다’라는 뜻에서 온 ‘참된 지식’의 뜻으로, BCE 15세기 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고대 인도의 종교, 신화, 철학의 기초입니다.
「리그 베다」는 그 중 하나로 자연을 찬미하는 서정시들이 가득합니다.
「리그 베다」는 불의 신 ‘아그니(agni)’에 대한 찬미로 시작하는데 아그니는 점화를 뜻하는 영어 이그니션(Ignition)의 어원이기도 합니다. 「베다」의 시대, 인도 사람들은 표현하기 어려운 놀라운 자연 현상들을 인간으로, 신으로 표현하여 그 의미를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우리는 이 노래들을 읽으며 만나는 사람, 자연 현상, 모든 것의 의미를 묻습니다. 그 모두를 파악하기 위해 자를 들이대고 무게를 재야고 비교해야 할까? 아니면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는 그래서 거대한 것에 대해 노래해야 할까?
『우파니샤드』[Upaniṣad]는 BCE 8세기에 쓰인 힌두교 사상의 이론적 바탕이 되는 철학 문헌 모음입니다. ‘우파’는 ‘가까이’, ‘니’는 ‘아래’, ‘샤드’는 ‘앉다’라는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가까이 아래에 앉아’ 스승과 제자 사이에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한다고 알려졌지만, 제게는 ‘가까이 아래에 앉다’는 ‘가까이 앉아 사물의 본질에 대해 묻는 것’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파니샤드』의 핵심 사상이 ‘범아일여(梵我一如)’이기 때문입니다.
12.1 “거기에 무화과 열매를 따오너라!” “여기에 있습니다. 존경하는 이여!” “그것을 쪼개보아라!”……
12.2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하였다. “참으로 사랑스러운 아들아! 그것을 너는 알지 못하는구나. 이 미세한 것, 이 미세한 것에서 이렇게 큰 무화과가 나온단다. 믿어라.” - 「찬도가야 우파니샤드」(6.12.1~12.2),
「스베타케투 우화」로 아버지는 아들 스베타케투에게 ‘범아아일여’의 진리에 대해 설명합니다. 잘게 쪼개진 무화과와 큰 무화과의 관계처럼, 우주의 질서·원리·영혼, 브라만(Brahman)은 개인적인 질서·원리·영혼인 아트만(atman)은 같다는 뜻입니다. 소금이 소금물이 되어 위쪽의 물을 마시든 아래의 물을 마시든 다 같이 짠 맛이 나는 이치입니다. 이제 사람들이 브라만이 아니라 자신 안에 녹아든 브라만 곧 ‘참된 자아’ 아트만을 찾는다면 참된 행복(해탈, mokṣa)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무지개는 어디 있나요?” 무지개를 찾아 먼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비추인 무지개를 깨달아야 합니다.
『언터처블: 1%의 우정』. 2011년 개봉한 프랑스 코미디 영화입니다. 몸이 불편한 부유한 한 남성과 건강하지만 가난한 한 남성이 만나 그리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언터처블(untouchable)’는 만져질 수 없다는 뜻인데, 인도의 신분제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카스트(caste)제도인데, 인도에서는 색을 뜻하는 ‘바르나(varna)’라고 합니다.
바르나에는 사제계급인 ‘브라흐마나(Brahmana)’, 통치계급인 ‘크샤트리아(Kshatriya)’, 평민계급인 ‘바이샤(Vaiśya)’, 천민계급인 ‘수드라(Shudra)’ 4계급 그리고 만져질 수 없는 이들, 억압된 자라는 뜻의 ‘달리트(Dalit)’가 있습니다. 2017년 7월 25일 인도 대통령에 취임한 코빈드는 두 번째 달리트 출신 대통령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 브라흐마나 이재민들은 신분 낮은 구조대의 도움을 거부합니다. 인도 바르나의 현재입니다.
바르나는 우리가 이해하는 계급제도 이전에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 수행해야 할 의무입니다. 더러운 옷을 세탁하는 이나 농사를 짓는 이, 나라를 지키는 이나 가르치는 이 모두는 평등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눈이 그렇지 못한 것은 슬픈 현실입니다.
마지막으로 힌두교의 신 ‘시바(Śiva)’입니다. 시바는 창조의 신 ‘브라흐마(Brahma)’, 유지의 신 ‘비슈누(Vishnu)’와 함께 ‘트리무르티(Trimūrti, 삼주신)’ 중 하나입니다. 트리무르티는 ‘세 개의 형상’이란 뜻으로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
(재창조)를 인간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시바는 힌두교인이 믿는 대표적인 신입니다. 처음 시바는 다산을 상징했던 신이었는데 나중에 파괴(재창조)의 신이 되었습니다. 힌두교의 많은 신을 구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시바를 쉽게 구별하는 방법은 한 손에 들고 있는 삼지창과 텁수룩한 머리, 파란 목을 찾는 것입니다. 시바 상을 모시는 인도의 사원에는 윗부분이 원기둥 모양인 남근상 ‘링가’와 둥근 쟁반 모양에 홈이 파인 여성을 상징하는 ‘요니’가 있습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의 만남을 통한 다산과 풍요의 상징입니다.
시바는 다른 많은 이름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마하데바(mahadeva)’입니다. 마하는 ‘크다’는 뜻이고 데바는 ‘신’이란 뜻입니다. 이후 시바가 불교로 들어와 ‘대자재천(大自在天)’이 되는데 마하데바의 의미를 가져온 것입니다.
시바 신앙에서 우리는 ‘왜 사람들이 신을 믿는가?’하는 물음에 대한 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시바는 『베다』에 나오지 않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민중의 강력한 신앙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브라흐마의 상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데우스 오티오수스(Deus otiosus)’는 잊혀진 창조의 신입니다. 인도의 많은 사람들은 창조의 신 브라흐마보다 풍요의 시바를 숭배합니다. 민중의 시바에 대한 신앙 그리고 민중에게 잊힌 창조의 신 브라흐마를 보면, 신앙은 지금 여기의 삶의 고단함, 그리고 극복을 위한 풍요의 기원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3 “왜 힌두교를 배워야 하나요?”
수업을 듣는 아이의 당연한 질문입니다. 오늘 힌두교에 대한 짧은 설명으로도 존재하는 것들이 결코 가벼이 다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멀리서 행복을 찾는 이들에게 자신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말해 줍니다. 비록 보잘 것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지금 여기서 하고 있는 자신의 일들을 소중히 여길 것을 제안합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를 신앙을 통해 삶의 고단함을 돌파하여 꿋꿋이 살아가게 합니다.
힌두교의 목표는 ‘모크샤(mokṣa, 해탈)’입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가 알지 못하고 헛된 것을 찾아 헤매는 이들의 어두움, ‘아비야(Avidyā, 무명(無明)’에서 자유함, 해방입니다. ‘가까이 아래에 앉아(Upaniṣad)’서 묻고 답하고 걷기입니다.
제10장
하나님의 은혜 I (4)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2.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2)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믿습니다.
그러나 웨슬리와 감리교가 제시하는 완전은 ‘하나님의 완전’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며 하나님의 완전은 인간의 완전의 목표는 될 수 있지만 도달점이 아닌 것과 같이 우리가 죄의 용서함을 받고 추구하는 거룩함도 ‘하나님의 거룩함’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거룩함’이며 ‘하나님의 거룩함’은 목표가 될 수 있지만 도달점이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의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에서 거룩함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동일한 거룩함이 아니고 인간으로서의 거룩함이다.
인간이 죄의 굴레를 벗어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는 죄의 근성을 뿌리 뽑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살아가면서 다가오는 죄의 유혹을 뿌리치는 일도 어려운 일이다. 웨슬리에 따르면, 죄를 용서받는 칭의의 단계에서는 죄의 뿌리가 남아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에 도달하면 죄의 뿌리가 제거된다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우리의 마음과 뜻과 목숨과 힘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사랑에 위배되는 그릇된 기질이 조금도 그 영혼에 남아있지 않고 그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이 순수(결)한 사랑으로 지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는 순수한 사랑으로 지배되면서 그릇된 기질이 영혼에 조금이라도 남아있지 않다. 사랑으로 충만하여서 죄의 근성이 극복된다. 결국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죄가 없는 상태이므로 거룩한 상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웨슬리는 사람에게 죄 없는 절대적 완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인간은 한계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이므로 무지와 잘못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무죄한 완전’이라는 말은 내가 자가당착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서 결코 쓰지 않는 어귀이다. 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충만한 사람이라도 이런 본의 아닌 범과는 저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에 도달한 사람이라도 의식적인 죄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있지만 무의식적인 죄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이 고백하고 있는 거룩함의 상태는 죄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이지만 무지와 잘못으로 인하여 파생되는 무의식적인 죄로부터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 거룩한 상태인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상태에 이르렀다고 하여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와 인간의 응답하는 믿음의 만남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이듯이, 거룩하여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믿음이 만나져야 한다. 런연에 따르면, 웨슬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두 가지로 구별한다. 첫 번째 은혜는 칭의를 가능하게 하는 은혜이며, 두 번째 은혜는 중생과 성화를 가능하게 하는 은혜이다. 결국 죄를 용서함 받는 칭의의 단계에서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중생과 성화의 단계에서도 하나님의 은혜가 반드시 필요하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죄 사람을 받아 거룩해지며’라고 고백하고 있다. 여기에서 ‘통하여’라는 단어를 주의 깊게 읽어가야 한다. 감리교인은 우리들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적으로 역사하심을 믿어야 하고, 우리들의 죄 사람은 대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들의 응답인 믿음으로 이루어지고, 다시 태어나는 신생과 거룩해지는 과정인 성화의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가능함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 그러므로 감리교인은 칭의, 신생, 성화의 단계와 과정에서 늘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응답하여야 한다. 믿음을 모두 우회할 수 없고 먼저 하나님의 은혜와 그 다음으로 우리들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실천으로 구원이 완성됨을 믿고 고백해야 한다.
미국 남북전쟁 때 ‘프레드릭스버그 대전투’라는 유명한 싸움이 있었다.
육탄전까지 치르고 수많은 부상자들을 중간에 남겨 놓은 채 쌍방은 후퇴하여 대치하고 있었다.
중간지대의 부상자들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때 남군 병사 하나가 물통을 들고 달려 나갔다.
북군에서 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병사가 목숨을 걸고 남군, 북군 가리지 않고 부상자들에게 물을 나누어주었다.
이 광경을 본 남군 병사들은 사격을 중단했다.
이를 계기로 쌍방은 한 시간 동안 휴전을 하기로 하고 서로 부상자 처리를 하게 되었다.
이 때 한 북군 장교가 이 남군 병사에게 물었다.
“What is your name?”(당신의 이름이 무엇인가?)
그러자 그가 대답했다.
“My name is Christian.”(내 이름은 기독교인이오.)
나중에 그 병사의 이름을 알고 보니 남군의 제2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원보병연대 G중대의 리처드 로란드 카클랜드였다.
크리스천은 비지니스를 위한 값싸고 편리한 이름이 아닙니다.
목숨을 건 이름이며 전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입니다.
십자가가 장식품이 아니듯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예수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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