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13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6주일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심으로 하나님 나라를 성취하는 일에 앞장서는 교우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는 지난 주일의 흩어지는 예배 소감을 나누는 시간으로 가졌습니다.
2. 2주간에 걸친 예배당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습니다. 미진한 부분은 추후 조금씩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애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합니다.
3.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담임목사의 평양 출장 일정으로 인해 휴강하겠습니다.
4. 정백광 성도님이 방광염으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이십니다. 쾌유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지난 12일은 파인텍 노조 황기탁 전 지회장과 박준호 사무장이 75미터 굴뚝에 올라 가 고공농성을 벌인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408일간의 고공농성을 벌이고 회사가 공장 정상화와 단체협약 이행 약속을 지키지 않아 마지막 선택으로 다시 굴뚝에 올라간 이 노동자들을 기억하시고 그들이 평화롭게 일터로 돌아가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교회의 미래와 비전 ⑤ 영성
지난 토론회에서 영성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우리교회에 영성 훈련이 필요하고 이런 훈련을 통해 실제적 삶에 적용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었습니다. 또 우리교회는 영적인 부분이 많이 부족하고 뜨거운 기도가 없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에서 매우 익숙한 영성이라는 단어가 저와 우리교회에서는 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에 다닐 때 영성신학이라는 교양선택 과목이 개설되어 그 강의를 들었습니다. 영성영성 말은 많이 하지만 뭔가 실체가 느껴지지 않아서였습니다. 그런데 교수님이 '솔직히 나도 영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셨습니다. 한국교회에서는 영성이라는 것이 거룩하게 보이는 말투와 몸짓, 소리를 지르면서 통성으로 하는 오래 하는 기도 같은 것을 영적이고 뜨겁다고 말합니다. 또 부흥사가 와서 온갖 우스갯 소리와 감동적인 이야기로 사람들을 들었나 놨다 하는 것을 영성부흥회라고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영성일까 다시 생각해봅니다.
과거에는 부흥사들이 주도하는 오순절 운동, 축복성회 같은 것을 영성적이라고 했지만 요즘에는 다르게 표현합니다. 우선 자신의 삶을 희생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영성이라고 하고 또 말씀을 읽으면서 그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중에 깨달음을 얻는 것을 영성이라고 합니다. 한 마디로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되새기면서 삶을 통해 그것을 이루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영성가로는 토머스 머튼, 헨리 나웬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삶을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깨달음을 통해 책임 있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을 살아냈습니다. 참된 영성은 결코 생활, 삶과 분리돼있지 않습니다.
저도 한 때는 주일예배를 인도하면서 통성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저에게는 맞지 않았습니다. 누가 들으라고 소리를 치면서 기도하는 것인지, 옆의 사람이 신경 쓰여 하나님과의 깊은 대화로 들어가지 못하고 때로는 목사라서 남에게 보이기 위해 더 목소리를 높이는 것 같기도 하고요. 그보다는 차리리 조용하게 묵상하며 실천하는 삶이 더 영성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주에 걸친 예배당 리모델링 공사를 마쳤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을 지내자마자 시작하였던 예배당 리모델링 공사를 2주 만에 일단 마무리 지었습니다. 건물에 비용 지출하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동안 버텼는데 결로와 방수 문제로 석고 벽체가 많이 손상된 데다 예배당을 건축한지 벌써 12년이 되다 보니 분위기도 좀 바꿔볼까 하고 시작한 공사였는데 교우 여러분의 적극적인 협력으로 잘 마쳤습니다.
무엇보다도 김형휘 성도님과 임정희 집사님 부부의 노고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전기 기술이 있는데다 괴력의 소유자라 사실 김형휘 성도님을 믿고 시작한 일이였습니다. 저는 목수일은 좀 하지만 전기 쪽은 전혀 문외한이라 결국 업체에 의뢰를 했어야 하는데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였지만 김형휘 성도님 덕분에 용기를 냈습니다. 오전에 직장일을 하시고 오후에는 거의 매일 교회로 오셔서 조명 설치, 배선 작업에 온갖 힘든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도와주셨습니다. 임정희 집사님은 알러지로 응급실에 가는 상황에서도 전등 구입과 물품 구입, 시트지 작업 등 구석구석에서 꼭 필요한 일을 해주셔서 제가 일하는데 아주 수월했습니다. 특별히 참과 식사를 챙겨주시느라 애써주셔서 허기지지 않고 든든하게 힘을 낼 수 있었습니다. 참, 현수도 하루 와서 아빠를 도와 일하고 갔네요! 얼마나 씩씩하던지~ ^^
리모델링 공사 중 가장 힘든 작업이 기존 벽체 철거였습니다. 수백 장의 석고보드와 마그네슘보드가 쓰였고 수십 단의 각목으로 인테리어를 하였기에 철거된 폐기물 양도 엄청났습니다. 그런데 그걸 하루 만에 철거하고 이튿날 2.5톤 폐기물처리 트럭에 실어 보냈습니다. 철거공사를 위해 직장 휴가까지 내서 와주신 윤성일 집사님과 이관택 목사님, 송윤혁 집사님 두 영화인에, 미국 출장을 앞두신 남기평 목사님까지 합세해주셔서 하루 만에 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토요일에 토마토학교가 요가수업을 하기로 해서 서둘러 일을 마쳐야 했습니다. 이미 한 차례 일정 연기 요청을 한 터라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더욱 속도를 냈습니다. 가까스로 중요한 작업들을 금요일 오전까지 마쳤는데 정리와 청소를 위하여 함옥분 장로님과 오호숙 권사님이 와주셨습니다. 석고 먼지와 톱밥이 휘날리고 석고가루에 찌든 바닥을 힘들다는 말씀 한 마디 없이 깨끗하게 청소해주셨습니다. 일 때문에 조금 일찍 돌아가신 장로님의 바통을 받아 오후에는 한효균 부장님과 윤성일 집사님, 안주영 청년, 미국 출장 후 시차적응도 채 안 되신 남기평 목사님도 오셔서 전기 배선 작업을 도우시고 또 청소까지 도와주셨습니다. 그래서 기한 내에 공사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음료수를 사다 주시며 응원해주신 김용순 성도님과 이샘님, 잠시 들러 기도와 헌금을 해주신 김원만 은평동지방 선교부 총무님, 콤프레셔를 빌려주신 다윗교회 임성호 목사님, 사촌동생 목회를 위해 양평에서까지 와서 페인트 칠 해주신 김재훈님 부부, 비슷한 바닥 데코타일을 찾아주시고 친절하게 알려주신 신사동 다미데코 여사장님... 생각해보니 모든 분들이 다 감사합니다.
비록 일에 직접 참여하지 못하신 분들도 다 사정이 있는 줄로 알고 있고 안전한 공사를 위해 기도해주셨으리라 믿고 전혀 섭섭하지 않습니다. 행여라도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2주 동안 무척 힘들었습니다만 옛날 예배당 건축하던 때도 생각나고 재미도 있었습니다. 물론 아침에 일어나면 온 몸이 천근만근, 손가락이 잘 구부러지지도 않을 정도였지만 마음은 참 편하고 행복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재주로 교회와 교우들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감사했고요. 이 지면을 빌어 새벽 시간까지 바닥 데코타일 작업을 하고 자잘한 일들을 도맡아주신 정지수 집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남편 잘 못 만난 탓에 고생이 많았습니다.
아직 공사가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닙니다. 곳곳에 부족한 부분들이 있는데 여긴 틈나는 대로 보완해서 완료하겠습니다. 재정부장 윤 집사님이 돈 좀 써서 잘 하라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낀 대신... 좀 부족한 부분이 있습니다. 곧 익숙해지리라 믿으며 여러분의 양해를 구합니다. 다시 한 번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정백광 성도님 병문안을 다녀왔습니다”
지난주일 정백광 성도님이 배탈과 고열로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을 찾으셨습니다. 검사 결과 바이러스성 장염이라고 하였는데 정밀검사를 위하여 입원을 하셔서 최종적으로 방광염으로 진단을 받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열이 떨어지지 않아서 한 주간 정도 더 입원을 하셔야 하는 상황인 것 같습니다. 양연화 집사님도 학교에 가시고 정백광 성도님의 직장도 걱정이 되시는 상황이시라 몸만이 아닐 마음도 힘겨우신 듯합니다. 게다가 제대로 드시지를 못해서 원래 마른 몸이 더욱 야위셨습니다. 어서 속히 열도 떨어지고 원기도 회복하셔서 보금자리로 돌아오시기를 바랍니다. 정백광 성도님의 쾌유를 위하여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10) 절 가는 길
1. 꼬시다
“가을이 지나는 구나. 늘 학교와 집에만 머무르는데 갑자기 콧바람 쐬고 싶다. 학교의 예쁜 단풍도 좋은데. 불쑥 어딘가 가고 싶다.”
아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은 다가와 공부도 안 하면서 마음만 싱숭생숭입니다. 게다가 자율탐구대회, 과학 발명 공모전, 독서 토론회 같은 비교과 영역 평가도 정리해야 하고, 본격적으로 교과영역에서는 여러 과목의 수행평가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가을이 많이 바쁩니다.
“그러니까. 오늘은 부모님을 꼬셔 짧은 여행을 다녀오는 거 어떨까? 공부를 위해 머리를 좀 쉬어야 한다고. 학원도 좀 째고. 봄에는 마곡사. 가을이니까 갑사 좋다. 갑사에 가서 풍경도 보고 풍경 소리도 듣고 오렴. 그리고 절에 간 거니까 자신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오늘은 의미 있게 절을 가는 길을 생각해 볼까?”
2. 절 가는 길
불교에 대한 소개라면 불교의 교리를 말해야겠지만 그리 재미가 없습니다. 실제 우리는 불교 교리를 만나기보다는 절에 가게 됩니다. 그런데 절에 간다는 게 관광지 방문입니다. 기억나는 건 예쁜 풍경 - 정말 예쁜 풍경을 원한다면 부처님 계신 곳에서 부처님이 바라보는 시선에 눈을 얹져 보면 그곳에서 가장 예쁜 풍경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가게 될 절의 구조가 말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중 여러 문(門)에 대해서.
일주문(一柱門). 절에 가면 처음 만나는 요상한 기둥의 건물입니다. 보통 건물의 기둥과 달리 뚱뚱한, 중간부분이 더 뚱뚱한 배흘림입니다. 게다가 직선으로 늘어서 있으니 요상이 맞습니다. 그래 기둥이 일(一) 자로 놓인 일주문입니다. 처음 절을 여는 일주문은 상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살며 나 아닌 것들에 관심하며 정작 나에 관해 진지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많은 것에 관심하지만 그 중요한 하나인 나에 대해선 부족합니다. 일주문을 지납니다. 잡다한 생각을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를 생각합니다.
천왕문(天王門). 일주문을 지나 어떤 꼬마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다른 꼬마가 넋 놓고 무엇인가를 올려보고 있다면 그곳이 천왕문입니다. 꼬마들은 지국천왕, 증장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 네 명의 천왕을 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거대함을 무섭게 느끼기도, 그 큰 눈이 궁금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이 지나치는 네 천왕은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나쁜 생각들로부터 부처의 이상세계, 불국토 극락을 지키고 있습니다.
천왕문에서 네 천왕만 보고 지나친다면 반만 본 것입니다. 천왕의 발밑, 또 다른 상이 있습니다. 마구니라 부르기도 또는 생령좌(生靈座)라 하는 상입니다. 마구니는 어떤 형상을 가진 악마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서 솟는 온갖 바르지 않은 것들을 의미합니다. 천왕들은 모두 자신의 발아래 마구니를 밟고 있습니다. 천왕문을 지난다는 건 천왕들이 우리의 바르지 못한 생각들을 없애준다는 것입니다.
천왕문을 지나며 생각합니다. 삶에 어떤 생각들이 없어져야 하는가? 그 생각들을 없애려 할 때 기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고통스러워할까? 천왕이 제하려는 마구니의 모습은 절마다 제각각입니다. 웃는 모습, 성난 모습, 고통스러운 모습. 그리고 그 모습 속에서 나를 봅니다.
자 이제 거의 다 왔습니다. 불이문(不二門)입니다. 불이(不二)는 ‘둘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살며 판단이라는 것을 하고 삽니다. 예를 들어 옳음과 그림,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거룩과 세속과 같은 것입니다. 이러한 판단이 번뇌를 낳는다고 합니다. 어떻게 판단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둘로 나누는 판단은 먼저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럼 이 기준은 어떻게 생겨났을까? 여기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대부분 우리는 판단된 것만을 생각합니다. 정작 판단의 기준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불이문 앞 돌계단에 아이가 앉았습니다. 아이는 흙 바닥에 좀 전에 내려놓고 간 마구니를 그립니다. 그리고 마구니에 대한 아빠의 말을 생각한 듯 손바닥으로 그림을 지웁니다. 다시 마구니를 그리고 다시 스윽 지웁니다. 아이는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나 엄마를 부릅니다. “엄마, 나 버리고 갈게.” 그때 엄마가 말합니다. “더러워 손 씻자.”
더럽다는 것은 무엇일까? 더러운 것은 아이가 그린 마구니일까? 아이의 손일까? 더럽다, 깨끗하다의 기준을 생각해 봅니다. 역시 그 기준은 보편타당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기준이 보편타당하다는 생각이 불편을 가져옵니다. 더러운 것, 깨끗한 것은 없습니다. 그것은 잠깐의 기준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있는 것은 깨달은 아이일 뿐입니다. 둘로 나누는 생각은 아이와 사실을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내 기준을 가지고 섣부른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기. 아이의 눈을 보았어야 했습니다. 마지막 불이문을 지나 부처를 만나기 전 중요한 깨달음입니다.
3. 길 가는 아이, 과정과 목적
“근데 절에는 왜 가요?”
다른 아이가 말합니다. “부처님 보러 가지.”
“부처가 누구야?”
“부처는 너란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난 부처를 만나러 절에 가지는 않는단다. 내가 부처인데 왜 절까지 가냐. 그래도 가는 이유는 나를 돌아보기 위해 간단다. 일주문을 지나며 다시금 내게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천왕문을 거쳐 내가 없애야 할 것은 무엇일까? 불이문에 앉아 편견 없이 있는 그대로의 세계와 나를 보려고 하지. 부처를 보는 것보다 아니 부처라는 상을 보는 것보다 나의 태도를 보는 거야.”
“뛰, 뛰, 뛰” 버저 소리로 수업이 끝났습니다.
“목적론적이지 않다는 말씀이죠.” 아이들의 핀잔을 뚫고 나온 말이다.
“질문하고 있는 네가 답을 알고 있는 너보다 예쁘구나.”
종례를 하러 온 선생님은 얼굴이 복도창에 걸려 있습니다.
중국 당나라 장안(長安)에 송청이라는 소문난 약장수가 있었다. 약을 잘 지어 줄 뿐 아니라 당장에 약값이 없는 어려운 사람일지라도 차용증만 받고 약을 지어주어 더욱 소문이 난 것이다. 먼 곳에서 온 면식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차용증이 천장에 닿도록 쌓여도 찾아가 독촉하는 법이 없었고, 연말이 되도록 갚지 않으면 그 차용증을 불태워버리고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았다.
그래서 장안 사람들은 송청이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비웃기도 하고, 또 대단한 인물이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송청의 반응은 담담했다. “나는 어리석지도 않고 또 인물도 못되는, 겨우 약을 팔아 처자를 기르고 사는 한낱 장사꾼에 불과합니다. 내가 약장수를 시작해서 40년, 차용증을 불태워버린 것이 수천 장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는 후에 고관대작으로 출세, 관찰사나 절도사가 된 사람들이 비일비재하여 약값의 분에 넘치는 큰 보답을 하기도 하고, 반면에 약값을 떼어먹고 죽거나 줄행랑 친 사람도 적지 않으나 식솔이 먹고사는 데 큰 영향을 끼치진 못했습니다. 그 사소한 약값 때문에 친지와 사이가 벌어지고 인심을 잃느니 약값 떼어가면서 인심을 사고 잘된 사람들로부터 후하게 보답 받는다는 그런 긴 눈으로 앞을 보는 장사치에 불과할 뿐입니다.”
송청은 이 후 큰 명성과 부를 얻게 되었다.
하루는 가난한 지방의 의원이 송청을 찾아와 물었다. 이토록 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송청은 웃으며 대답했다. “글쎄요. 굳이 비결이 있다면 ‘구불약(九不藥)’ 덕분이지요.” 의원은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구불약이요?”
송청은 차분하게 대답했다.”아홉 개의 ‘불(不)’을 치유해 주는 신비로운 약이지요. 첫째, 불신(不信)을 치료합니다. 상대방이 나에 대해 갖는 불신을 없애줍니다. 둘째, 불안(不安)을 치료합니다. 나에 대한 타인의 불안을 잠재웁니다. 셋째, 불앙(不怏)을 치료합니다. 원망과 앙심을 없애줍니다. 넷째, 불구(不勾)를 치료합니다. 내 마음이 곧음을 드러냅니다. 다섯째, 불치(不値)를 치료합니다. 물건의 값을 속이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여섯째, 불의(不倚)를 치료합니다. 나에 대한 거리감을 없애줍니다. 일곱째, 불충(不衷)을 치료합니다. 성의가 없다는 생각을 없애줍니다. 여덟째, 불경(不敬)을 치료합니다. 공손하지 않다는 생각을 없애줍니다. 아홉째, 불규(不規)를 치료합니다. 원칙을 어길 수도 있다는 의혹을 없애줍니다.”
설명을 끝내자, 의원이 송청 앞으로 바싹 다가앉았다. “과연 명약이군요. 그토록 신통하고 방통한 약이라면 약재가 엄청나게 비싸겠군요?”
송청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건 약재로 지을 수 있는 약이 아닙니다.”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자 송청이 한바탕 껄껄 웃고 나더니 말했다.
“누구든지 부자로 만들어 주는 구불약, 그것은 바로 웃음이랍니다.”
현대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약은 웃음이라고 합니다. 미국의 노스웨스턴대학의 한 연구에 의하면 사람이 웃을 때 심장을 마사지해서 혈액순환이 잘 된다는 것입니다. 어느 통계 자료에 의하면 어린아이는 하루에 수백 번을 웃는 반면, 어른은 하루에 15번 정도밖에 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호탕하게 웃어 본 기억이 있습니까? 지금 웃고 계십니까? 다른 사람을 웃기기라도 하셨나요? 아이들과 농담 따먹기는요? 아니, 아직도 안 하셨다면 지금이라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웃음은 최고의 명약일 뿐 아니라, 성공으로 향하는 지름길입니다. 잘 웃는 사람들은 일도 잘합니다. 웃는 사람은 긍정적인 마인드와 자주적인 태도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세상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이들보다는 즐겁게 사는 이들을 본능적으로 더 신뢰합니다. 근심에 차서 이마를 잔뜩 찌푸리고 사무실을 우왕좌왕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얼굴에 미소가 떠오르도록 스스로의 마음에 웃음을 유도하십시오. 미소를 짓는다고 해서 바보 취급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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