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청년주일, 왕국절 제5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8주일입니다.
2.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추석 연휴로 휴강합니다.
3. 민족의 큰 명절인 추석연휴를 지내고 있습니다. 고향 방문 등으로 장거리 이동하시는 분들은 안전한 귀향이 되시고 온 가족이 행복한 명절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4. 29~30일에는 "가을밤의 꿈"으로 '교회의 미래 비전을 위한 1박2일 끝장토론회'를 합니다. 토요일 저녁 식사를 준비하겠습니다. 오셔서 함께 애찬 나누신 후 8시부터 예배 드리고 시작하겠습니다. 교우들은 한 분도 빠짐 없이 참석해 주십시오.
5. 이재원 고수정 성도님 가정이 어제(22일) 내유리로 이사하셨습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민족의 큰 명절이지만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하고 외롭게 지내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거리에서 지내는 이웃, 분단으로 고향에 가지 못하는 이산가족, 부당한 해고에 항의하며 굴뚝에 올라간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 수능을 앞둔 고3 수험생들, 알바로 근근히 생활하는 청년들 등등 모두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
얼마 전 지인과 카톡으로 대화를 나누다가 상대방이 '그건 내가 알바 아니고!'라고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두 번.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이 말을 한 사람은 목사였습니다. 물론 상대방이 나의 사정과 마음을 모두 이해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존중받지 못하고 이해 받지 못한다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음을 부인하지는 못하겠습니다. 결국 그 목사와의 대화는 좋지 않게 끝났습니다.
지난주일 한효균 부장님과 교회차를 타고 오면서 이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 때론 농담같이 하는 말이지만 그것이 기독교인의 입에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말입니다. 신양성서의 황금율은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누군가가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거절한다면 매우 섭섭하겠지요? 내가 섭섭하면 다른 사람 역시 섭섭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이 돋보이는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대단하고 거룩한 신분을 가진 존재였지만 세상에서 별 볼 일 없는 작고 약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지만 그럼에도 내가 관심 갖고 문제를 함께 풀어보려는 자세야말로 이 시대 기독교인이 갖추어야 할 품성이라고 생각합니다.
put oneself on one's place라는 영어 숙어가 있습니다. 자신을 다른 사람의 위치에 놓아보라, 즉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보라는 뜻입니다. 내가 처해보지 못한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를 배우고 사회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입고 사는 기독교인이 자신의 입장만 고집하고 타인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내입장만이 아니라 타인의 입장도 고려할 줄 안다면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다툼과 분쟁은 줄어들 것입니다. 저는 언어가 삶을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내가 알 바 아니고'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면 정말 타인의 삶에 무관심한 삶이 될 것입니다.
“멋진 가을밤의 꿈을 함께 꾸고 싶습니다”
드디어 돌아오는 토요일에 '가을밤의 꿈' 모임을 합니다. 보통은 8월말에
'한여름밤의 꿈'을 꿨는데 올해는 조금 늦게 가을의 꿈이 되었습니다. 사실 올해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우연히 교우들과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교회의 미래를 위해 토론하는 자리를 만들어 보자고 하여 이 자리가 급조되었습니다. ^^
저는 한국 교회의 미래가 어두운데 우리교회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해야할지 대안이 없어서 좀 비관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박순용 집사님이 도전을 하셨습니다. 우리교회가 이럴 때일수록 더욱 분발하고 대안적 모델을 만들어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 말씀에 저도 반성을 하고 자극을 받았습니다.
엊그제 소속목사님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 문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이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니 제가 좀 오버하고 있다는 반성도 들었습니다. 목사님들은 지금이 우리교회의 위기가 아니라 오히려 황금기라고 평가하시면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모이는 것이 아니라 이 황금기를 어떻게 관리해서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가 주제가 되어야 한다고 조언해주셨습니다. 그 조언을 기쁘게 받기로 하였고요.
또 예배당에 전기 누전 사고도 있고 방수 문제도 있어 안전과 미관에 좋지 않으니 예배당 내부 리모델링을 할 때가 되었다는 의견도 수요성서대학에서 나왔습니다. 10년이 훨씬 지났으니 좀 개보수하여 분위기를 바꿔보자는 것입니다. 자꾸만 배가 불러지는 벽면을 보니 하긴 해야겠습니다.
아무쪼록 좋은 꿈, 건강한 꿈을 꾸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명절 연휴를 지내시면서 잠깐 시간 내어 교회를 위해 기도하시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마음과 생각을 모아주시기 바랍니다.
토요일 가을밤에 뵙겠습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91년 9월 26일 "인공생태계 조성을 위한 바이오스피어2 실험 시작"
바이오스피어 2(Biosphere 2)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있는 외부와 격리/밀폐된 인공 생태계 실험장이다. '바이오스피어'는 생태계 또는 생태계로서의 지구를 뜻하는데, 또 하나의 인공 지구(또는 인공 생태계)를 만들어 보려는 뜻에서 바이오스피어 2라고 명명했다. 바이오스피어 2의 기본 시설은 1987년부터 공사를 시작, 1989년 완료되었고 실제 실험은 1991년 9월 26일부터 1993년 9월 26일까지 진행되었다. 실험자 8명이 들어가 진행된 실험 결과, 바이오스피어 내부의 산소가 심각하게 결핍되고 이산화탄소가 통제 불가능하게 증가하여 생물들이 죽거나 이상 성장 현상을 보이며 다시 이산화탄소가 증가하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다. 또한 실험자들이 먹을 식량의 생산도 점차 줄기 시작, 영양부족을 겪게 되었다. 열악한 상황에 처하게 되자, 실험자들의 심리에도 악영향을 미쳐 약속했던 2년을 겨우 채우고 나올 때는 실험자들 사이에 파벌이 조성되고 서로 다투게 되는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여 결국 더욱 피폐해져서 바이오스피어를 나오게 되었다. 이 실험을 통해 인간이 생태계를 모방하고 창조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올 여름 전 지구적 이상기후로 인한 피해를 겪으며 인류에게 주어진 생태계 보존이라는 과제를 진지하게 되새겨봐야 하겠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히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마태복음 6:24(새번역)
예수께서는 오늘의 설교에서 ‘하나님’과 ‘재물’이라는 두 단어를 극단적인 선택지로 양분화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앞서 나온 ‘ㆍ두 주인’ 또는 ‘한쪽과 다른 한 쪽’이라는 표현 역시 매우 이분법적이며, 청중으로 하여금 두 가지의 극단사이에서 적극적인 선택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길을 걷다가 갈림길이 나오면 한쪽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 길 가는 사람의 숙명인 것처럼 말입니다. 도대체 오늘 예수께서는 왜 이리도 청중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요구하고 있을까요?
예수께서는 오늘의 말씀에서 구약시대부터 끊임없이 선포되어 왔던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의 선택, 즉 제1계명(나 이외의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의 연장선상에서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본문에서 사용된 ‘제물’의 원단어가 우상숭배를 뜻하는 ‘맘몬(Mammon)’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길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의 끊임없는 선택의 갈림길 앞에 서는 일인데,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나는 이 갈림길 앞에서 번번히 우물쭈물하며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거나, 때로는 하나님을 배신하고 우상을 선택해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예수께서 청중들에게 요구하는 ‘선택’은 단순한 ‘선택’이 아닙니다. 이는 구약시대부터 하나님의 음성과 예언자들을 통하여 신앙인들에게 끊임없이 요구되어왔던 ‘선택’입니다. 실로 오랜 기간 동안의 고민들이 축적되어있는 무게감 있는 요구이자,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입니다. 신앙은 결국 단 한 번의 선택이 아니라 지속적인 선택을 하는 것이고, 단 한번의 요구가 아니라 끊임없는 요구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실상 갈림길 앞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다고 하여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실체와 상황이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선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선택하였다고 착각했던 상황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다행히 예수께서는 오늘의 본문에서 ‘우상’의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십니다. 바로 그 실체는 맘몬 곧 ‘탐욕’입니다. ‘탐욕’이야 말로 영혼을 혼탁하게 하고, 눈을 멀게하여, 갈림길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바램과는 정반대의 것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끊임없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는 신앙인들에게 말씀합니다. "신앙의 여정이 계속되는 것처럼, 갈림길의 선택은 계속될 것이다. 그리고 너의 탐욕도 계속될 것이다. 그 쉽지 않은 상황에서도 너는 하나님을 선택할 수 있겠니?" 이 물음 앞에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요?
과연 가족이란 무었일까?
윤재민 학생
이 영화에서의 가장 큰 물음이라고 할수 있겠다.
사실 어느 가족에서의 주인공들은
사회의 울타리 밖의 소외계층들이라는 점만
뺀다면 공통점이라고는 없고 절대 가족일 수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외부의 눈으로 볼 때는
그들은 그저 경제적 요인 때문에(할머니의 연금)
모인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눈을 통해 본
그들의 생활, 즉 그들의 가족 생활은
그들만의 행복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불꽃놀이가 보이는 전망 좋은 집에 살지는 못하지만
그들은 불꽃놀이가 보이지도 않는, 하늘이 잘 보이지도 않는 마루에서
폭죽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행복해한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행복은 오래가지 못한다.
그들의 생활이 드러나게 되고 사회는
그들을 괴물로 몰아간다.
아이를 가지지 못했던 시바타 부모는
아이들을 납치해 키우는 범죄자로 만들고
할머니를 모시고 산 것은 돈을 뜯어내기 위한
행위였으며 그들에겐 그럴 자격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영화를 보다 보면
사회가 그렇게 정상적이라고 말하던 그 가족들은 왜 아이를 버리고, 학대하고
그런 삶을 사는지 어느 가족보다
그 정상적인 가족들이 괴물로 보이는지
이런 기분을 남긴다.
진짜 가족은 무었일까?
가진 것 없던 그들이 행복했던 이유는 무었일까?
나는 보면서 음악이 떠올랐다.
음악에서는 서로 다른 여러가지 악기들이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음악을 만든다.
어느 가족도 가족 구성원들이 하나하나 특별하게 느껴지면서도
그 속에서 조화를 이루어 보는 내내 아름답게 느껴졌다.
선율이 흐르다 절정에 도달했을 때처럼
그들의 가족 생활은 아름다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가족생활은 언제나
쉽게 헤어짐을 전제로 하고있었기에
흩어져버림에서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흩어졌음에도
앞으로 살아갈 미래에는
그들의 아름다웠던 순간을 기억하며
살아가지 않을까.
제11장
하나님의 은혜 II (1)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1)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하여 거룩하여진 감리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사도바울이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빌립보서 3:12)라고 고백하듯이, 감리교인은 거룩해지는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상태를 지향하면서 달려가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완전은 개인적인 완성에서 머무르지 않고 사회와 우주로 지평이 확장되어야 한다. 감리회 신앙고백 2조를 해설하면서 언급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노른자위는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것이며, 이 하나님의 나라는 개개인에게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넘어서 사회구조적으로 우주적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시편 121편 4절에 따르면,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한다.”(요한복음 5:17) 삼위일체 하나님은 끊임없이 활동하시고 일하신다. 하나님의 일은 무엇을 위한 활동인가? 창조적인 활동이며, 구원을 위한 활동이다. 여기에서 구원은 인간 안에 내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만이 아니고 외적으로, 즉 사회적으로 우주적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감리교의 성화는 개인적 성화/내재적 성화가 그리스도인의 마침표가 아니라 외적 성화인 사회적 성화와 우주적 성화로 지평이 확장되고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내 안에, 사회 안에, 우주 안에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구원은 크게 개인적 구원, 사회적 구원, 우주적 구원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구원자로 믿음으로 영혼이 천국에 가는 것을 구원으로 이해하고 정의한다. 이렇게 정의한다면 그리스도교의 구원은 사회적 정의/평화와 아무런 관련성을 갖지 않는다. 이제는 고전이 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는 인간이 개인적으로는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있지만 사회와 공동체에 소속하게 되면 윤리적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와 공동체 안에는 구조적인 모순과 악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인간은 생존을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구조적인 모순과 타협하면서 비도덕적으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사회의 구조 안에 존재하고 있는 악과 모순이 극복되지 않는다면 이간이 신앙적으로 양심적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요원하다. 이러한 측면에서 개인구원은 사회구원과 분리될 수 없다.
개인구원은 개인적으로 구원을 완성하는 것이라면, 사회구원은 사회적으로 구원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죄는 개인적인 죄가 있으며 또한 사회/구조적인 죄가 있다. 정치적으로 조선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한 일본의 제국주의,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독재자들의 독재정치, 사회적 약자를 억압하는 수많은 악법들 등 이러한 모든 것들은 사회/구조적인 죄이다. 예수님이 가르치고 추구하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개인적인 죄의 극복을 넘어서 사회/‘구조적인 죄가 극복될 때 완성된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구원을 위한 활동이며 개인적인 죄와 사회적인 죄의 극복을 지향하면서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아우르는 구원이다.
인간이 개인적, 사회적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고난당하고 신음하고 있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리와 행복을 위하여 자연을 이용/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으므로 생태계는 파괴되었고, 자연도 고난으로부터의 해방, 구원을 기다리고 있다. 생태계의 파괴와 자연의 죽음을 경험하면서 사람들은 자연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과 인류의 멸망으로 이어진다는 점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이제 그리스도교는 성경과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생태학적 전통을 발굴하고 해석하면서 구원의 지평은 우주로 확대된다. 구원의 범위는 인간을 넘어 사회로 자연과 우주로 확장되었다. 그러므로 구원은 개인적 구원, 사회적 구원, 우주적 구원을 모두 포함해야만 한다.(계속)
하나님이 어느 날 천당에 들어가 살펴보시고 깜짝 놀라셨다. 너도나도 천당에 와 있고, 지옥에 보내진 영혼은 단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기분이 언짢으셨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임을 스스로 맹세하시지 않았던가. 또, 쓰이지도 않을 양이면 뭣하러 지옥은 만드셨던가!
그래서 가브리엘 천사를 불러 분부하셨다. “한 사람 빠짐 없이 내 옥좌 앞에 불러들여 십계명을 읽어 주렷다!” 전원이 소환되고, 가브리엘이 첫 계명을 낭독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이 계명을 어겨 득죄한 자는 모두 당장 지옥으로 갈지어다!” 여러 사람이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슬퍼하며 지옥으로 갔다. 둘째 계명이 낭독된 뒤에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셋 째 계명… 그리고 넷 째 계명.… 그리고 다섯 째 계명…. 이쯤 되니 천당 인구는 쑥 줄어들었다. 그리고 여섯 째 계명이 낭독되자 모조리 지옥으로 가 버렸다. 살찌고 늙은 대머리 수도자 한 사람만 빼고!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다가 가브리엘에게 말씀하셨다. “이 한 사람만 남았단 말이냐?” “예, 그러하옵니다!” “글쎄, 그러고 보니 이 천당이라는 데가 도리어 쓸쓸하지 않으냐? 모두들 되돌아오라고 일러라!” 그 때 살찌고 늙은 대머리 은수자는 누구나 다 용서받게 된다는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하나님 앞에서 냅다 고함을 질렀다.
“이런 부당한 처사가 어디 있나이까! 이렇게 될 양이면, 어찌하여 진작 저에게 일러 주시지 않았나이까! 억울하옵니다! ”
앤소니 드 멜로가 지은 종교박람회(분도출판사)에 나오는 글입니다.
신앙 생활을 오래할 수록 하나님을 째째하고 옹고집적인 늙은이로 만드는 것은 왜 일까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지옥에 보내는 서바이블이 아니라 모든 영혼이 구원 받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구원 받을 X맨을 찾는 게임이 아니라 노든 사람에게 복음의 영향혁이 미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편가름하는 사람은 자꾸 편을 나누지만 하나님은 그 어떤 편에도 들어있지 않은 초월하신 분이십니다. 어떤 사람은 관심을 끌기 위해 갖가지 이벤트를 만들지만 하나님은 이벤트보다는 당신에게 관심을 두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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