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8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21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애초 오늘로 계획하였던 농촌선교주일은 마지막 주일에 지키겠습니다.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세요.
3.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24일에는 야외수업으로 진행하겠습니다.
4. 다음 주일(21일)에는 감리교신학대학교 메인스타디움에서 작은교회 연합 운동회를 합니다. 교회에서 9시 30분에 출발하겠습니다. 준비와 진행에 함께하실 분들의 도움을 기다립니다.
5. 10월 마지막 주일(28일)에는 주일낮예배를 드린 후 강화 인화리 이필완 목사님댁에서 농촌생태활동을 하겠습니다.
6. 10월 20일(토)에 강경숙 집사님이 일산 대화로 이사를 하십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박용진 의원에 의하여 비리 유치원 명단과 내용이 공개되어 사립 유치원의 교육비 횡령, 개인용도 사용, 자격 미달 급식 제공 등 회계부정을 포함하여 전반적인 부실 불법 운영이 폭로되었습니다. 정직을 가르쳐야 할 유치원이 양심조차 내팽개치고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끔찍합니다. 이번 기회에 확실해 개혁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교회의 미래와 비전 ② 예배
지난 토론회에서 예배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왔습니다. 우리교회의 예배는 기성교회와 비교할 때 많이 다릅니다. 일반적으로 하는 예배 순서와도 좀 다르고 내용도 차이가 납니다. 우선 예배를 감사와 섬김의 절로 시작하는 것과 우리교회만의 특별한 신앙고백문을 암송하는 것이 다릅니다. 또 설교를 마친 후 설교자가 아니라 설교를 들은 교우들이 한 문장의 짤막한 기도를 합니다. 성가대도 없고 중간 중간의 송영도 없으며 성찬식도 매주일 합니다. 목사가 하는 축도가 아니라 참석자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축도, 박수로 마치는 마지막 순서, 부르는 노래까지 좀 다르다보니, 우리들에게는 익숙할지 모르지만 처음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이들이 있으면 설교자나 교우들이 다 긴장을 합니다.
기억하시겠지만 이전의 예배는 작은 교회에는 좀 과하게 느껴질 정도로 체계적인 형식의 예배였습니다. 세계 교회가 함께 고심하여 만든 형식입니다. 그러나 너무 익숙해져 매너리즘에 빠진 듯한 예배에 교우들의 능동적 참여를 유도하고 민족 정서를 반영하기 위해 오랜만에 변형을 주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익숙해져 별다른 감동이 없게 되는 몇 년 후에는 또 다른 방식 혹은 이전의 방식으로 바뀌게 되겠지요.
사실 예배 순서나 형식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예배당, 의자에 앉는 입식이 아닌 바닥에 앉는 좌식, 설교자의 복장과 사용하는 말투, 나무 십자가가 없는 장식 등등 기성교회와는 다른 부분이 많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편하게 여길만한 익숙한 예배 분위기를 만들고자 하면 이런 모든 부분들이 함께 바뀌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바꾸고 싶은지, 그렇게 바뀌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과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인식하고 부정하는, 선입견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시선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우리 안에 우리의 것을 귀하게 여기고 자랑할 수 있는 자부심이 있는가 하는 물음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2018년 우리에게 가장 적당한 예배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더 감동적일 수 있다면 우리의 예배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88년 10월 15일 "'유전무죄, 무전유죄' 탈주범 지강헌 일당 검거"
556만원을 훔치고 도주하다 붙잡힌 지강헌은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0월 8일, 교도소 이감을 위해 지강헌을 포함한 25명이 이동하던 중 교도관을 제압, 12명이 탈출하였고 지강헌 일당 네 명은 10월 15일 북가좌동 고모씨의 집에 잠입하여 그 가족을 인질로 잡았다. 새벽 4시경 탈출한 고씨의 신고로 경찰병력 1천여 명이 집을 포위, 인질범들과 대치하였다. 이때 지강헌이 비지스의 '홀리데이' 카세트 테이프를 요구하여 이 노래를 들으며 유리를 깨 자살을 시도하였고 곧 진입한 경찰에 의해 두 발의 총을 맞고 결국 과다출혈로 사망하였다. 지강헌과 탈주범 일당은 흉악범이 아니라 단순 잡범이었는데 보호감호제 때문에 징역형을 마치고도 다시 보호감호 처분을 받는 것과 500만원을 훔친 자기보다 훨씬 더 큰 액수인 70억 원을 횡령한 전경환의 형기(7년형, 3년 후 가석방, 대통령 특사로 사면복권)가 더 짧은 데에 불만을 가지고 탈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강헌이 외친 '유전무죄 무전유죄(有錢無罪 無錢有罪)'는 권력과 부를 가진 자들에게 너그러운 한국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유행어가 되었고 그 고발은 여전히 유효하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거대한 도심 속에 마치 오아시스처럼 위치한 초록빛 공원, 그 곳의 작은 정자에는 말없이 서로의 존재를 탐색하듯 어색하게 자리한 두 남녀가 있다. 그리고 마치 그들을 감싸듯 영화 내내 쉴 새 없이 흩뿌려지는 빗줄기. 청량하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주인공들의 말 못할 사연만큼이나 다양한 감정을 품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까지 촉촉하게 매만지는 촉매제가 된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고 그 빗방울이 떨어진 자리에 생긴 작은 동심원이 점점 퍼져갈 때마다 영화 속 두 주인공은 그만큼 가까워지고, 동시에 관객의 마음도 싱그러워진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영화, 초록빛 공원의 풍광과 촉촉한 빗소리가 너무나 매력적인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은 우리로 하여금 그동안 현실에 매몰되어 무뎌져버린 ‘생의 감각들’을 찾아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것은 쳇바퀴 돌듯 규정된 삶의 양식과 어쩌면 너무나 진부해져버린 우리들의 언어 속에서 메말라 버린 생기를 찾는 일이며, 규정되고 정형화된 언어 이전의 감정을 마주하는 일이다.
<비>
구두 장인을 목표로 하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 타카오. 그는 비 내리는 날이면 ‘비가 오는 날에 지하철을 타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학교에 가지 않고 대신 오전 내내 공원에 앉아 구두 스케치를 한다. 여느 날처럼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구두를 그리고 있던 타카오는 초콜렛을 안주삼아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유키노라는 여성을 만난다.
"천둥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고 구름이 끼고 비라도 내려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대를 붙잡을 수 있을 텐데. (鳴る神の少し響とよみてさし曇り雨も降らぬかきみを留めむ.)"
유키노는 타카오와의 첫 만남에서 일본 고전문학인 ‘단가’의 한 소절을 읊는다. 그녀는 사실 고등학교에서 고전문학을 가르치는 교사다. 학생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중 하나였지만, 일부 학생들이 그녀에게 앙심을 품고 나쁜 소문을 퍼트리게 되고 이 내용이 학부모의 귀에까지 들어가면서 유키노는 출근을 제대로 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제대로 걷지 못하게 되었어.” 유키노는 걷는 법을, 발걸음을 떼는 용기를 잃어버린 사람이었다. 매일 정장을 차려입고 학교로 출근하려 했지만 도저히 발걸음을 옮길 수 없어 도망치듯 온 공원에서 타카오를 만난 것이다.
그 날 이후 그들은 비가 오는 날이면 같은 장소에서 만남을 거듭한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나는 때는 장마가 시작되는 6월이다. 장마. 빗줄기의 끝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하염없이 비가 쏟아지는 시기. 그러나 장마도 쏟아지는 비도 결국 끝이 있는 법. 비를 매개로 만났던 그들의 만남도 언젠가는 끝이 날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삶의 걸음을 걸을 수 없었던 유키노. 비가 그치고 맑아져 낯설게까지 느껴지는 공원에 여전히 앉아있는 그녀는, 과연 자신의 걸음을 시작할 수 있을까.
<구두>
“장마가 계속되길 바랐다. 하지만 맑은 날이 계속 되었고, 난 그 곳에 갈 구실을 찾지 못했다.” 타카오는 구두를 만드는 사람이다. 아니, 만드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그는 구두 장인이 되겠다는 꿈을 꾸지만 언제나 스케치에서 머물 뿐 실제로 구두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심지어 친구와 가족 그 누구에게도 구두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한 적이 없다. 타카오의 꿈을 처음으로 듣게 된 사람은 공원에 앉아 있던 유키노다. 꿈을 향해 걸어가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 발걸음을 뗄 용기가 없는 것은 타카오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공원에서 만나 나누는 대화는 특별할 것이 없고 어찌 보면 단출하기까지 하다. 공원 정자에 앉아 내리는 빗속에 머물러 있듯, 서로가 있는 공간 속에서 자신을 가만히 응시할 뿐이다. 서로가 곁에 있음으로써 그 공간은 의미를 갖게 되고, 그 공간과 시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두 사람은 다시 걸어갈 힘을 얻는다.
“나는 그녀를 다시 걷게 만들 구두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비가 오지 않아도 구두를 그릴 수 있을까. 장마가 그쳐도 그녀를 만날 수 있을까. 상황이 주어지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었던 타카오는 이제 스스로 발걸음을 뗄 이유를 만들어낸다.
영화를 만든 신카이 마코토는 <너의 이름은>, <초속 5센티미터>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감독이다. 그의 작품은 감수성 짙은 주제와 아름다운 영상미가 특징인데,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 실재하는 배경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자세히 묘사하는 걸로 유명하다. <언어의 정원> 역시 도쿄의 중심에 있는 신주쿠 공원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실사영화보다도 더 디테일하게 표현되었을 만큼 압도적인 영상미를 자랑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주제를 극대화 하는 것은 영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리’라 할 수 있다. 사실 영화는 제목과 달리 수다스럽지가 않다. 주인공들의 대화는 과하지 않고, 감독의 설명은 매우 절제되어 있다. 사람의 대화보다는 오히려 빗소리, 바람소리, 물소리 가 더욱 귀를 사로잡는다. (실제로 감독은 빗소리를 더 잘 구현하기 위해 음향감독을 교체했다고 한다.) 마치 언어가 존재하기 이전의 원초적 공간인 것 마냥, 이 모든 비언어적 소리들이 움직이는 공간에서 사람의 언어는 비로소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속에 머물며 작은 대화를 주고받던 이들의 삶은 시나브로 변화되고 살아난다.
이 영화의 부제는 ‘사랑, 그 이전의 사랑 이야기’다. ‘사랑’이라고 규정되기 그 이전의 사랑(살아있는 감정), 언어로 존재하기 이전의 언어가 모든 것의 시작임을, 우리는 때때로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머무를 필요가 있음을 영화는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침묵 가운데에서도 우리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는 비언어적인 소리에 반응하며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영혼은 이미 걸어 잠궜던 빗장을 서서히 열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우리의 삶도, 우리의 사랑도, 우리의 신앙도 그렇다. ‘신앙’이 언어로써 규정될 될 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이 생략되거나 오독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신앙의 신비를 정확히 표현할 수 있는 언어는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붙들고 있는 신앙의 언어가 마치 전부인 듯 착각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Credo' 이전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의 순간이 존재함을. 그것이 나의 신앙 여정의 시작점이 되었음을 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때때로 ‘신앙 이전의 신앙’, 비록 말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지라도 은혜가 충만했던 그 순간. 성령이 살아 숨 쉬는 그 시작점으로 돌아가 머무를 필요가 있다.
빗소리, 바람소리, 물소리를 통하여 내게 사랑을 고백하는 존재의 목소리를 알아차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부해져버린 우리들의 언어 속에서 메말라 버린 생기를 찾을 수 있는 고요한 정원. 과연 당신이 머무를 싱그럽고 촉촉한 언어의 정원은 어디에 있을까?
* 함께 보면 좋을 영화
<심야식당> (深夜食堂, 2015)
마츠오카 조지 감독, 120분, 일본, 2015.
“하루가 끝나고 사람들이 귀가를 서두를 무렵,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메뉴는 이것뿐. 하지만 마음대로 주문하면 가능한 만들어주는게 나의 영업 방침이야.
영업시간은 밤 12시부터 아침 7시 정도까지. 사람들은 이곳을 심야식당이라고 부르지.
손님이 오냐고? 그게 꽤 많이 온다구.“
일본 만화가 ‘아베 야로’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심야식당>은 원작의 내용과 유사한 플롯을 따른다. 도교 신주쿠(그러고 보니 이 영화의 배경도 신주쿠다.)의 어느 좁은 골목길에 위치한 식당이 배경인데, 이 식당의 이름은 그냥 ‘밥집’(めしや, 일본어 독음은 ‘메시야’)이다. 밤이 되어 손님이 찾아와 음식을 주문하면 식당의 주인인 ‘마스터’는 솜씨 좋게 음식을 만들어 제공한다. 그리고는 이 음식과 관련한 짧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음식 이야기가 주된 내용은 아니고 이곳을 밤늦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삶과 사연이 펼쳐진다.
앞서 소개한 <언어의 정원>과는 다르게, <심야식당>은 말이 많다. 식당에 둘러앉은, 어쩌다 밥 먹을 때 잠깐씩 마주친 게 전부인 사람들이 남의 사연임에도 불구하고 한마디씩 보태곤 한다. 이곳에서 말이 적은 사람은 식당 주인이면서 그 누구보다도 사연 많아 보이는 ‘마스터’뿐이다. 그러나 마스터는 손님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냄으로써 찾아온 이가 어디서도 말하지 못했던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기묘하고도 안전한 공간을 제공한다. 음식을 배불리 먹고 주절주절 늘어놓던 이야기도 끝이 났을 때, 그들은 각자 나름대로의 힘을 얻어 ‘밥집’을 나선다.
사람을 살게 하고 용기를 주는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언어의 정원>이 여백으로 가득 찬 머무름의 공간이었다면, <심야식당>은 그야말로 털어놓고 다시 채우는 공간이다. 반대되는 것 같은 두 공간이 모두 사람을 살리는 공간이 된다니, 아이러니하면서도 일면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정원과 밥집. 당신에게 지금 필요한 곳은 둘 중 어디인가?
제11장
하나님의 은혜 II (4)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2.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2)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도덕적 형상은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인 거룩함, 사랑, 정의 등을 닮은 것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최고의 표현이다. 웨슬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신 것처럼, 도덕적 형상을 인간의 영혼 속에 불어 넣은 하나님의 호흡이라고 보았다. 피조물인 인간은 도덕적 형상을 지속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하고 그것을 중재해야 하는 관계성을 가져야 한다. 감리교도들은 하나님의 형상(자연적 형상, 정치적 형상, 도덕적 형상)을 회복하고 새롭게 함으로써 개인적 구원을 완성시켜 감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한다.
그러나 감리교도는 개인적 구원을 넘어서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 감으로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시는 사회적 구원에 동참해야 한다. 웨슬리는 그리스도교는 본질적으로 사회적 종교라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인간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일을 가르쳐 주는 종교입니다. 그러나 이 종교는 본래적으로 사회적 종교이므로 사회를 떠나서는, 즉 다른 사람과 같이 살고 대화함이 없이는 잘 유지되지 못할 뿐 아니라 전혀 존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웨슬리는 ‘거룩한 고독’이란 ‘거룩한 간음’이라는 말과 같이 복음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리스도교의 복음은 ‘사회적 거룩’이라고 주장하였다.*
웨슬리가 그리스도교 복음을 사회적 거룩으로, 그리스도교를 사회적 종교로 강조하는 것은 감리교와 감리교도는 개인의 영혼을 넘어서 사회적 구원도 추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웨슬리는 실제적으로 사회적 구원을 위한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노예제도를 ‘모든 악랄한 것의 저주스러운 총체’라고 규정하면서 비판하였다. 조지 휫필드는 구약시대의 족장들은 노예를 합법화시켰다고 주장하면서 자신이 세운 고아원에 속한 농장을 위하여 약 75명의 노예를 사 들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철저하게 노예제도를 반대하였다. 웨슬리는 1774년에 “노예제도에 대한 고찰”이라는 소논문을 출판하였으며 이 논문을 다음과 같은 기도로 끝맺는다.
이러한 인간들도 하나님의 손으로 빚은 인간이 아니오며, 성자의 보혈로 사신 인간이 아니옵니까? 그들로 하여금 그 포로된 땅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호소가 하나님 앞에 이르게 하시며, 그것이 하나님의 귀에 들리게 하소서! 그들을 잡아온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을 동정하게 하옵소서.
웨슬리는 당시에 만연한 실직상태에 대해서도 논문을 썼다. 실직상태는 식료품의 값이 오르는 것에 주된 원인이 있다고 보았다. 왜 빵 값이 비싼가? 밀이 비싸기 때문이고, 밀 값이 오르는 이유는 밀의 거의 절반이 증류 양주 산업에 사용되기 때문이었다. 또한 소고기와 양고기가 왜 그렇게 귀한가? 프랑스로 수출될 많은 말들이 필요하였고, 양과 소를 키우는 것보다 말을 키우는 것이 더 많은 이익이 되기 때문에 큰 토지를 소유한 농장주들이 말을 키우기 시작하였다. 웨슬리는 이에 대한 해법으로 정부의 개입을 제시한다. 정부가 독한 술을 금지해야 하고, 말에 대한 수요를 줄여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웨슬리가 출판한 책 중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책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용을 위한 처방전 모음”(1745)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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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거룩한 고독이란 거룩한 간음이라는 말처럼 복음과는 더 이상 일치하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런 종교가 아니라 사회적 종교이며, 그러한 거룩이 아니라 사회적 거룩이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길이요, 넓이요, 깊이요, 높이다.(런연, 김고광 옮김, [새로운 창조], 158)
나다니엘 호돈은 1842년 7월 9일 소피아와 결혼하여 콩코드에 있는 에머슨 소유의 구 목사관에서 가난에 쪼들린 생활을 시작하지만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생활이었다. 소피아는 격려와 비판을 아끼지 않는 내조형의 아내였다.
어느날 호손은 비참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세관에서 근무하다가 해고되었다고 말했다. 그 때 소피아는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놀라는 호돈에게 말했다. 부인은 “마침내 당신은 문학을 할 수 있게 되었단 말예요! 난 당신이 글쓰기에만 몰두하게 되어 기쁘게 생각해요.” 이 말을 들은 호손이 풀이 죽어 말했다. “돈벌이를 할 수 없는데,어떻게 생활을 유지할지 걱정이오.”
그러자 소피아는 남편이 가져온 월급에서 일부를 저금한 돈을 보여주었다.“나는 당신이 천재적인 작가라는 사실을 오래전부터 알았죠. 언젠가 명작을 남길거라고 믿었어요. 당신이 가져다주는 생활비에서 조금씩 떼어놓았죠.” 부인의 세심한 배려에 감동받은 호손은 첫 번째 작품을 발표했는데, 그 작품이 바로 《주홍글씨》이다.
미국문학의 대명사격인 주홍글씨는 이처럼 호돈의 아내 소피아의 신뢰에서 탄생된 것이다.
하나님은 돕는 사람이 필요하여 짝을 지어주었습니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랑으로 한 몸이 된 이룬 아내와 남편을 ‘돕는 배필’(2:18)이라고 했습니다.
‘돕는 배필’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에제르 케네그도’인데, ‘도움’이라는 뜻의 ‘에제르’와 ‘그와 마주보고 서 있는 것 같다’는 뜻의 ‘케네그도’가 합친 합성어입니다. 에제르는 도움을 주는 존재이며 케네그노는 동등한 존재인 것입니다. 어느 한 쪽에서 도움을 구하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부부인 것입니다.
부부 사이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서로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도움을 구할 때 생깁니다. 부부가 서로 도우며 함께 산다면 1+1=2가 아니라 그 결과는 무한대입니다. 서로에게 받고 싶은 것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 서로에게 무언가 주고 싶어서 마음 쓰는 부부라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와 같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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