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10.27 20:29

2018년 10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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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제 33주년 창립기념주일, 농촌선교주일 및 왕국절 제10주일입니다. 인간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촌에 대한 관심을 갖고 점점 더 열악해지는 농촌을 위해 기도하시며 우리교회 창립 및 존재 의미를 되새기는 주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2. 오늘 공동식사 후에 강화도 이필완 목사님 댁에 방문하여 농촌생태활동을 합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수요일 오전 11시에 열립니다. 많이 참석해 주십시오.

4. 다음주일은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한 해동안 맺은 결실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시간이 되도록 준비해 주십시오. 오후에는 겨울맞이 준비로 김장을 하겠습니다.

5. 11월 둘째 주일(11일)은 흩어지는 예배로 드리고자 합니다. 다른 교회 예배에 참여하시고 주보 등을 지참, 방문 소감을 준비하여 셋째 주일(18일)에 오시면 되겠습니다.

6. 11월 중에 예배당 공사를 할 계획입니다(5~17일). 예배당 새단장을 위한 여러분의 의견을 구하며 관리위원회는 이를 위한 논의를 부탁드립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PC방 알바생 살인, 혼수 문제로 아내 살인, 정신병원에 감금하였다고 어머니 살인, 이별 통보에 앙심 품고 살인 등등 자기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우발적으로 사람을 해치는 일이 무더기로 발생하고 있어 민심이 흉흉해지고 있습니다. 인명을 소중히 여기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도덕적 이성적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지혜를 베푸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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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의 미래와 비전  ③ 존재 의미

 

오늘로 우리교회가 서른세 살을 먹었습니다. 33이라는 숫자는 흔히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로 생각합니다. 서른세 살에 예수님은 인류를 구원하셨는데 교회는 벌써 서른셋, 저는 벌써 오십이나 먹었네요. 과연 나잇값을 하고 있는지 부끄럽습니다.

지난 토론회에서 여러분이 전도보다 중요하고 우선되어야 할 것이 우리교회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라고 지적해주셨습니다. 시대가 번잡하고 혼란스러운데 우리교회가 흔들리지 않는 진리를 찾고 그것을 위해 우뚝 서야 하는 것이 먼저라는 말씀입니다. 시대가 매우 빠르게 변화하지만 그럼에도 잃지 않고 지켜야 할 가치들이 있는데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회가 더욱 절실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도 혼란스러운 경험을 하고 힘겨운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모두에게 희망을 제시하고 그 희망을 추구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주문이었습니다.

또 교회가 동호회로 치면 비용이 많이 드는 모임인데 그럼에도 교회에 나오는 이유는 삶에 힘을 얻고 그 힘을 유지하기 위함이라는 말씀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성, 매너리즘에 빠져 우리 자신을 제대로 반성적으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에 대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회는 무엇보다도 관계가 중요합니다. 서로 불편한 경우에는 교회에 오는 것도 쉽지 않습니다. 결국 좋은 관계, 좋은 만남이 우리 교회의 미래와 비전을 세우기 위한 존재 의미일 수 있겠습니다. 물론 그 관계가 사람들만의 관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연결,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우리는 새로운 힘을 얻는 것에 대한 분명한 선언이 필요하겠습니다. 서로가 일정 부분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때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이해해줄 수 있는 공동체로 자리잡는 것이 바로 우리가 목표로 삼고 나아가야 할 방향일 것입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교회는 자신감을 가져도 되는 교회라고 모두들 스스로 독려하였습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의미가 되는 교회, 좋은만남이라는 이름값을 하는 교회가 된다면 그것으로도 넉넉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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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교회 연합 운동회를 즐겁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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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 우리교회와 가재울녹색교회, 동녘교회, 모퉁잇돌교회, 백석교회의 다섯 교회가 감리교신학대학교 운동장에서 연합 가을 소풍예배와 운동회를 하였습니다. 모퉁잇돌교회 김기원 목사님이 설교하신 예배를 드리고 각 교회들이 정성스럽게 싸온 음식을 함께 나누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후부터는 피구를 세 게임 하였고 우리 교회에서 준비한 공동체 게임으로 OX퀴즈, 탑쌓기, 판 뒤집기 등을 하였습니다. 먼지도 심하게 날리고 운동장 사정이 좋지 않았지만 박순용 집사님과 임정희 집사님이 공동체 게임 진행을 아주 잘 해주셔서 더욱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나름대로 게임마다 의미를 담아 '판을 뒤집어 세상을 바꿔'(판 뒤집기), '앞만 보고 달려라'(고깔 릴레이), '공든 탑이 무너지랴'(탑 쌓기)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임정희 집사님이 저의 작명에 미소를 지어주셨습니다. ^^ 

저녁에 뒷풀이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일 년에 한 번 모처럼 여러 교회가 만나는 자리인데 연대의 의미를 살릴 수 있도록 다 함께 뒤섞여 팀을 짜거나 더 많이 교제하여 서로를 더 잘 알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더라면 좋았겠다고들 하셨습니다. 전체적으로 우리 교회가 경기 참여도 적극적으로 하였고 응원이나 게임 운영도 돋보였다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우리 교우들이 가진 이 흥과 에너지를 제대로 보지 못하여 그동안 제대로 이 에너지를 발산하도록 돕지 못하였다는 자책감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멋지고 적극적이며 흥이 넘치는 교우들과 함께 있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우리 교회 멋진 교회! 우리 교우 멋진 교우!

 

■ 사회성화를 위한 역사기억

 

1909년 11월 2일    "이등공송덕비건의소가 세워졌다."

이등공송덕비건의소(伊藤公頌德碑建議所)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된 후 기념 송덕비를 건립하기 위해 조직된 단체이다. 송덕비건의소, 송덕비건립사무소(頌德碑建立事務所)라고도 한다. 1909년 11월 2일에 보부상 지도자 이학재의 주도로 이토의 공을 잊지 않기 위한 불망비를 세우자는 취지서를 내고 조직되었다. 이토 히로부미의 동상 설립을 위해 조직된 동아찬영회와 결합하여 10개월 동안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14만환을 모금하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구체적인 사업으로는 80여칸의 비각을 세울 자리를 한성부 북부 순화방으로 정하고, 동상은 4만환을 들여 일본에 주문해 제작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송덕비건의소 내부에서 동상을 건립하자는 의견과 돌비석을 제작하여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자는 의견을 두고 갈등이 노출되어 주도자 중 한 명이 탈퇴하는 등 문제가 일어나, 송덕비 건립 계획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는 이토 추모 사업의 주도권을 놓고 발생한 동아찬영회와의 알력도 작용했다. 반면 이토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 려순감옥구지묘지(旅順監獄舊址墓地) 어느 곳에 있을 것으로 추측만 할뿐 아직까지도 수습하지 못하고 있다.   

출처 : 위키백과(https://ko.wikipedia.org)

 

 

 9. 직시(直視)

 

1. 공중부양

 

공중부양에 관한 『위키백과』의 정의입니다. “공중부양(空中浮揚, 영어: levitation)은 중력에 대항하여 안정된 위치 내에 물리적인 접촉점이 없이 공중에 떠 있는 과정을 말한다. 초전도체 위에 영구자석이 떠 있는 마이스너 효과가 유명하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것으로 자기부상열차가 있다.”

물리학적 의미의 ‘공중부양’은 진지한데, ‘공중부양’하면 웃음부터 나오는 건 왜인지. 눈을 가벼이 감고 두 손을 모아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한 주먹만큼 하늘로 오른 장면, 좀 사기 같기도 하고 코미디 같기도 하고 이전 대통령 선거의 모 후보도 생각나고. 이쪽으로 믿음이 부족해서 그렇습니다.

또 다른 공중부양이 있습니다. 부모의 마음인지 아이들이 걷는 길이 자신들의 길 같지 않길 바랍니다. 전제는 살아온 삶과 지금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해주고 싶습니다. 더러운 길, 무서운 길, 힘든 길, 그 길 위를 업고 안고 가고 싶습니다. 

그런데 이 이해할 수 있는 마음에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 길이 아이를 향한 부모의 길이라는 믿음이 아이들의 걸음을 연약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자신의 다리를 움직여 땅에 발을 딛고 걸음을 옮겨야 합니다. 이 걸음은 온전히 아이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아이들의 부모들에 의한 공중부양은 아이들이 살아야 할 실제에 비추어 거짓의 삶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공중부양을 진짜로 착각하는 것은 더더욱 두려운 일입니다.

 

2. 안수정등(岸樹井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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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들을 걷고 있었습니다. 평화로운 길이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쿵쿵 소리가 들립니다. 돌아보니 커다란 코끼리 한 마리가 무서운 기세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무슨 이유로 성이 났는지, 왜 자신에게 달려오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남자는 코끼리를 피해야 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있습니다. 나무를 향해 달음질했습니다. 그런데 코끼리를 피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낮습니다. 다행인지 나무 아래는 커다란 우물이 있고 그 우물로 드리운 등나무 줄기가 있습니다. 남자는 등나무 줄기를 타고 우물로 내려갔습니다. 코끼리를 피했습니다. 한숨 돌려 우물을 살펴보았습니다. 큰일입니다. 우물의 바닥에는 뱀이 네 마리나 있습니다. 다시 등나무를 올라야 하나. 더 큰 일입니다. 등나무 줄기를 따라 흰, 검은 두 마리의 쥐가 내려오더니 줄기를 갉아대고 있습니다. 그때 다섯 마리의 벌이 만든 벌통에서 꿀이 사내의 입속으로 떨어졌습니다. 무슨 일인지 꿀은 코끼리, 뱀, 쥐, 등나무 줄기에 달린 자신까지, 모두를 잊을 만큼 달았습니다.

코끼리는 세월의 무상함, 등나무 줄기는 인간의 목숨, 우물은 윤회, 흰 쥐는 낮, 검은 쥐는 밤, 다섯 마리의 벌은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다섯 가지 욕망, 꿀은 욕망에 이끌린 맛본 쾌락, 독사는 죽음을 뜻합니다. 『불설비유경』에 나오는 「안수정등」 이 말하는 삶입니다.

 

3. 시지프의 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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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카뮈(Albert Camus, 1913~1960), 프랑스의 작가, 저널리스트, 철학자입니다. 『시지프의 신화』, 그의 철학적 에세이입니다.

 

“신(神들)은 시지프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까지 바위 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돌덩이는 그 자신의 무게로 인하여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떨어지곤 하였다. 그 무익하고도 가망 없는 일보다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신들이 생각한 것은 일리가 있다...

나는 시지프를 산기슭에 남겨둔다! 우리는 언제나 그의 무거운 짐을 발견한다. 그러나 시지프는 신들을 부정하고 바위를 들어올리는 고귀한 성실을 가르쳐준다.”

- 알베르트 카뮈, 『시지프의 신화』(범우사, 1999), 148~153.

 

시지프의 운명은 부조리합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노동자는 날마다 같은 일에 종사하면서 삶을 영위하고, 그 운명은 부조리”(『시지프의 신화』, 150)합니다. 카뮈는 이 부조리를 맞는 인간의 태도를 비판합니다. 그에게 자살은 삶으로부터의 도피이며, 종교적 희망은 근거 없는 비약일 뿐입니다.

 

4. 아! 달다

 

“등나무 줄기를 잡은 부조리한 삶이라는 건 알겠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건 네 인생이잖아.”

늘 이런 식입니다. 한 답을 주어야겠습니다.

“아! 달다.”

“그 꿀에 취하지 말라 하셨잖아요.”

“불교의 이상세계, 극락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있는 거란다. 욕망의 꿀에 취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누리는 꿀맛을 보는 건 어떨까?”

“그러니까요. 그 꿀맛이 뭐에요?”

“그러게 뭘까?”

아이의 눈동자에는 시지프의 용기와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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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하나님의 은혜 II (5)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2.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3)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웨슬리는 이 책에서 63가지 질병에 대한 자가 처방과 치료 요법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이 웨슬리는 가난한 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사회적 구원을 구체적으로 추구하였다. 그러므로 감리교도는 사회적 약자들을 억압하는 구조적 모순과 악법들에 저항하고 개혁하는 삶을 살아감으로 사회적 성화를 이루어 나가고 하나님께서 이루어 가시는 사회적 구원에 동참해야 한다.

감리교도는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을 넘어서 우주적 구원을 위하여 우주적 성화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웨슬리는 ‘선한 청지기’라는 설교에서 우리 인간을 하나님의 청지기로 규정한다. 청지기는 손 안에 있는 것을 그가 원하는 대로 사용할 자유가 없고 오직 주인(하나님)이 기뻐하는 대로 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의 소유자이시며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라고 웨슬리는 주장한다. 감리교도는 인간을 만물의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로 고백해야 한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을 넘어서 온 피조물을 지향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만의 구원자가 아니라 모든 생명의 구원자임을 고백해야 한다. 웨슬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생명의 근원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지금 어떤 종류나 정도로든지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생명이십니다. 그는 생명의 가장 낮은 종(species), 즉 식물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가 식물의 모든 활동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동물의 생명의 근거, 즉 심장이 뛰고 체액이 순환하도록 하는 힘이 됩니다. 그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공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모든 종류의 삶의 근거입니다.

 

비록 그리스도교의 창조 사건의 주도권은 성부 하나님에게 있지만, 그리스도교의 창조는 삼위일체적 창조이므로 성자도 창조 사건에 참여하신다. 창조주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 생명의 근원이 되실 뿐만 아니라 식물과 동물의 생명의 근원이 되시고, 모든 생명들의 현재적 삶의 근거가 되신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구원은 인간의 해방은 물론 자연의 해방도 포함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주적 그리스도이시다. 감리교도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우주적 구원에 동참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선한 청지기’로 인식하고 인간중심주의적 삶과 신앙을 생명중심주의로 전환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은 우리는 개인구원, 사회구원, 우주적 구원 중에서 무엇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가? 양자 모두 선택의 논리이다. 개인들이 신앙적으로 올바로 살아간다면 사회 구조악은 자연스럽게 극복되는가? 아니면 사회 구조악이 극복되면, 개인이 신앙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 개인구원이 먼저인가, 사회구원이 먼저인가? 다르게 질문하여 본다면, 우주적 질서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져서 우주적 구원이 먼저 이루어진다면 개인구원과 사회구원은 자연스럽게 완성되는가? 이 물음에 대한 해법의 논리는 우선순위의 논리도 아니고, 양자택일의 논리도 아니다. 양자모두선택의 논리가 적용되어야 한다. 개인적 구원과 사회적 구원 그리고 우주적 구원은 모두 동시에 추구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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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런 코헨이 지은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따로 있다’중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정글을 탐험하던 왕이 코코넛을 자르다가 실수로 자신의 발가락을 자르고 말았다. 함께 동행 하던 사제가 소리쳤다. “왕이여, 행운의 징조입니다” 

사제의 말에 화가 난 왕은 그를 구덩이 속에 던지고 여행을 계속했다. 

다음 날 왕은 신전에 바칠 제물을 구하던 식인종 부족에게 포로로 잡혔다. 그 때 식인종 사제가 왕의 발가락이 없는 것을 보았다. 제물은 조금이라도 결함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에 왕은 풀려나게 되었다. 

비로소 왕은 사제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고 구덩이로 돌아가서 깊이 사과했다. 

“사과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왕께서 저를 이 구덩이에 던진 것이 저로써도 커다란 행운이었으니까요” 사제가 담담하게 말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왕이 물었다.”어째서 그렇소?”

사제는 눈을 감으며 말했다. 

“만약 제가 왕과 함께 있었다면 그 식인종들이 저를 제물로 썼을 테니까요“

 

인생사는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습니다. 지금 실패했다고 내일도 실패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고 오늘 승리했다고 내일도 승리한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고 화를 바꿔 복을 만드는 일은 내 삶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사느냐에 달렸습니다. 실패를 인정하고 왜 실패했느냐를 분석하여 다시 도전한다면 실패는 실패가 아니라 경험이 될것입니다. 실패를 통하여 배우는 자만이 진정한 승리를 맛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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