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8.09.29 11:50

2018년 9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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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왕국절 제6주일 및 성령강림 후 제19주일입니다. 하나님이 사랑과 정의의 주권으로 통치하시는 나라가 우리 가운데 성취되도록 헌신해 주시기 바랍니다.

2.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개천절 공휴일로 휴강합니다. 10월 10일에 열리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3. 토요일(29일)부터 가을수련회 "가을밤의 꿈"으로 '교회의 미래 비전을 위한 1박2일 끝장토론회'를 합니다. 이 토론회에서 나온 의견을 토대로 실천방안을 연구하여 발표하겠습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바랍니다. 가을수련회를 위해 애써주시고 섬겨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4. 다음 주일 오후에 열릴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는 수련회에서 한 생활 나눔으로 대신하겠습니다.

5. 10월 셋째 주일(21일)에는 작은교회 연합 운동회를 하고자 계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일정 조정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유명 제과점이 수제로 만든 쿠키라며 비싸게 판 과자들이 대부분 대형마트를 통해 유통되던 기성 과자류였다고 합니다. 돈을 위해서 사람을 속이고 양심도 기꺼이 팔아먹을 수 있다는 천박한 탐욕이 이 사회를 무너뜨리고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양심이 짓밟히는 것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심판임을 이 백성들이 깨닫게 하여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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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미래 비전을 위한 끝장토론회"

 

방현섭 목사

 

한국교회의 교세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감리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2016년 교세현황에 비해 2018년은 교인수가 6만 1천여명 감소하였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총수입이 1,300억 원 가량 증가했다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교인수는 줄어드는데 수입이 늘어나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양상은 우리교회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교세를 유지하는 것도 길어야 10년 남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우연한 기회에 이런 마음 속의 고민을 털어놓게 되었고 결국 교우들과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토론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졌습니다. 나름대로 올바른 신앙을 찾기 위한 여정을 걸어온 우리교회가 별로 밝지 않은 미래를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조바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토론회를 통해 무엇을, 어떻게, 누가, 왜 할 것인가를 이야기했으면 좋겠습니다. 

 

1. 한국교회의 현실과 문제

90년대 중반까지 한국교회는 폭발적으로 성장하였지만 2000년대 들어 성장의 기세는 꺾였고 현재는 교세가 감소하고 있습니다. 성장이 멈추자 교회는 보수적 성향을 강하게 드러내며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조직으로 재구성되었고 일반적 사회 상식과는 다른 세계관을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보수성은 고급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의 공감을 얻지 못하였고 '다름'을 '틀림'으로 인식하는 교회의 사고관은 차별과 배제의 논리로 무장하게 되어, 개방적인 교육을 받은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가는 현상을 낳았습니다. 교회와 교회조직은 고령화, 원로원화되어 젊은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교리 해설을 연구하는 대신 노년세대에게 익숙한 기존의 교리를 더욱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더해 목회자들의 도덕성 논란과 교회세습이 사회적 비판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과거와는 달리 교회를 대신해서 인간의 감성을 위로하는 여가와 레저가 발달하여 교회의 필요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율이 상당히 높아지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도 전체의 60~70%에 이르는 교회가 재정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상태인데 신학교들은 재정확충을 위하여 더 많은 신입생을 모집, 목회자 후보를 배출하고 있습니다. 머지 않은 미래에 상당수의 교회가 노령화, 젊은 층의 부재, 젊은 층의 수입 부족으로 심각한 재정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교회는 아직 대안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2, 우리교회의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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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교회는 교회부흥을 추구하는 기성교회와는 궤를 달리하며 올바른 신앙이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그래서 소극적으로나마 사회 문제에 관심 갖고 소외된 이웃과 연대하는 교회를 지향하였습니다. 목회자 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교인들이 교회 운영과 목회의 중요한 사안에 직접 참여하는 민주적인 절차를 만들었으며 현대인의 상식으로 고백할 수 있는 신앙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래서 교회, 신앙이라는 종교와 생활이라는 현실이 괴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삶에서 실천할 수 있는 생활신앙을 모색하였습니다. 

우리교회는 독립된 건물을 소유하고 있어 월세 등의 재정 부담이 거의 없는데다 특별히 강조하지 않아도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봉헌을 잘 하고 있는 것과 각기 다른 활동 무대를 가진 목사가 네 명이나 있는 것도 장점입니다. 교인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성만찬을 매주일 할 수 있다든가 외부활동을 자주 할 수 있고 교인들이 가족이나 가까운 이웃사촌같이 관계 맺을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입니다. 작다, 적다는 것이 단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점으로 살려서 활동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교인 모두가 교회의 일에 헌신적입니다. 

그러나 문제도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갖고 있는 문제, 머지 않은 미래에 마주치게 될 몇몇 문제를 우리교회가 피해갈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우선 교인수가 너무 적습니다. 유입되는 숫자보다 여러 가지 이유로 유출되는 숫자가 더 많습니다. 다른 교회에 비해 장년층의 비율이 높기는 하지만 청년과 젊은 세대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청소년들도 적습니다. 그나마 다행히 교회학교를 다시 시작할 수 있을 정도로 어린이들이 늘기는 하였습니다.아무튼 양적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어 정체된 느낌이 많이 듭니다.

목회적인 문제도 있습니다. 예배와 성경공부 등의 집회 횟수가 적습니다. 그리고 종교 프로그램과 영성교육을 실시하고자 해도 참여도가 매우 낮은 편입니다. 기성 교회들이 교인들을 각종 집회와 전도, 봉사활동에 동원하는 것에 비하면 그런 종류의 열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바쁜 일상에 쫓기는 현대인의 생활주기와 생활신앙을 강조하는 교회 분위기를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아쉬움이 남습니다. 종교의 특성인 신비적 영성을 익히기 위한 목회적 프로그램도 매우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전체적으로 매우 좋은 분위기이지만 뭔가 정체돼 있다는 느낌이 강한 것이 현실입니다.

 

3. 담임목사로서의 목회관

저는 소위 세속화신학(Secular theology)에 경도돼 있습니다. 세속화신학은 신의 초월성이나 특별한 존재로서의 교회보다는 신의 내재성, 세상 가운데 세상의 일부로 존재하는 교회의 역할에 관심을 갖습니다. 종교를 특별히 종교성이 강하고 신심이 깊은 소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평범한 보통 사람들도 참여할 수 있는 것으로 일상에서 신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교회 울타리를 넘어 생활신앙을 강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특이한 종교체험보다는 이성에 의한 성숙하고 자발적인 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며 교인들의 각성된 선택을 돕는 것이 목회의 중요한 축이라고 생각하고 신학교육에 많은 비중을 둡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하는 부흥회, 각종 기도회,  심방 등 프로그램이 매우 빈약합니다. 동시대성이라는 현실적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여 현대인의 일반적인 생활습관이나 행태를 존중하기에 핵가족화되고 파편화된 현대인의 개인적 영역에 개입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기도 하여 인간관계의 심도는 좀 낮은 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라는 조직보다는 개인적 삶과 사회적 참여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교회 건물을 꾸민다거나 교회 조직과 교세를 확장하는 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있는 자잘한 기술들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교회 홈페이지 운영, 교양자료인 주보 제작, 설교영상 편집 및 유튜브 게시, SNS 활용, 평신도 수준을 뛰어 넘는 성서대학의 수준 높은 신학교육, 한국인의 정서와 컴퓨터를 반영한 예배 기획 등등. 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화해통일위원회, 감리교 개혁을 위한 목회자 모임, 기독교 언론의 객원기자, 대북인도지원 단체, 시국대책위원회 등 사회참여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웬만한 규모의 교회들도 하지 못하는 인터넷 활용. 감리교회 내에서 지명도가 좀 있는 사회참여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이런 다양한 시도들이 교회 홍보에 반응을 별로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머리는 크지만 몸이 제대로 따라주지 못하는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신학적 이상과 현실적 목회 사이에서 정확한 줄거리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자책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4. 우리교회의 미래 비전은?

전반적으로 교인들이 교회에 특별한 아쉬움이나 불만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보다 적극적이고 자발적인 참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운영을 넘어서 목회까지도 목사와 교인들이 함께 해나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성숙은 우리가 어느 정도 성취하였다고 생각합니다만 양적인 성장은 부족합니다. 영과 양, 혼과 육, 성과 속이 함께 성숙 성장해야 건강한 것입니다. 인위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신앙 동지들을 모아 함께 나아갈 수 있어야 보다 큰 꿈을 꿀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전도?! 이것이 고민입니다. 우리교회의 가치를 지키면서 이웃과 기독교 난민들을 초대하는 방식,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젊은 세대를 위한 투자가 있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보다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도록 보다 더 과감한 투자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다행히 우리 청소년 세 명은 다들 생각이 건전합니다. 교회가 청장년과 청소년들의 건전한 성장과 정착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기를 바랍니다.

예배당을 건축한지 10년이 넘었고 예배실이 지하이다보니 아무래도 습기에 취약하여 여기저기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배실을 리모델링하여 외양적 분위기 개선을 시도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위기의 진단과 관용의 문턱"

 

박성중 목사

 

교회의 위기를 진단합니다. 그리고 남기평 목사님이 함께 쓴 『힌국교회, 청년이 떠나고 있다』의 제목은 조금 씁쓸합니다. 한국교회의 위기를 인원수로 결정하는 것은 아닌가? 물론 내용은 그것만은 아니지만. 인원, 중요합니다. 하지만 교회가 교회다운 것은 인원수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의 위기를 교회답지 않음으로 진단해보면 어떨까? 제안합니다. 아마 교회다움에 인원도 들어갈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가 교회다운 것의 보다 큰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에 머리로 동의하는 것을 넘어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위기의 반성은 우리가 살아내야 할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관용은 나쁜 것으로 관용은 좋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관용이 없는 관용은 없습니다. 불관용이란 턱의 높이가 관용의 크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관용이라는 말을 쓰는 한에는 불관용을 함께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관용의 문턱’입니다. 동시에 문턱은 양면입니다. 밖으로부터의 공동체를 지키는 턱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좋은만남교회의 턱은 무엇일까? 인원에 대해서는 이렇습니다. 들어오기 어렵고 나가기 어렵다. 들어오기 어렵고 나가기 쉽다. 들어오기 쉽고 나가기 쉽다. 들어오기 쉽고 나가기 어렵다. 동시에 심리적인 부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턱이 사람들에게 높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이란 턱이, 그것 때문에 그리 낮아지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물론 그 턱의 높이는 변화할 것이고 변화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턱에 대한 깊은 숙고와 시행착오가 필요할 것입니다. 용기가 필요합니다.

 

 

 "THE 좋은만남을 위한 밤에"

 

이관택 목사

 

좋은만남교회가 서울의 변방, 그것도 은평구의 끝 자락에 기틀을 닦은 지 올해로 벌써 33년이 된다. 

 공교롭게도 예수께서 공생애를 마치고 또 다른 세상으로 입적(?)한 것으로 알려진 세월 만큼의 시간과 그 숫자를 같이하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사역의 마무리 단계라기보단 또 다른 출발선 위에 서서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앞두고 있는 모습이다. 

 어스륵한 새벽녘, 자욱한 안개에 둘러싸인 희미한 길을 바라보며 불안함과 설레임을 안고 발걸음을 내딛는 순례자의 마음이 이러할까. 이미 수많은 날, 수없이 많은 길을 찾아 거닐었건만 여전히 끝모르게 이어져있는 낯선 길을 만날 때마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거리다 못해 요동치고, 불안과 두려움은 우리의 발걸음을 더욱 무겁게 한다. 어쩔 때는 단 한걸음도 내딛지 못할 만큼.

 

 “하지만 오늘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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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현할 수 없는 존재를 향한 막연한 기대와 신뢰. 함께 걷는 이들과의 좋은 만남. 그리고 오늘 하루 우리에게 허락된 일용할 용기와 지혜. 우리의 순례길은 그렇게 또 다시 이어진다.

 

 <좋은만남교회> 공동체의 현재는 어떠한가? 그리고 다가올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삶의 본질이 그러하고, 특히나 눈에 보이지 않는 신앙의 여정이 그러하듯 아득함과 암담함 사이에서 빛을 간구하는 우리들의 오늘은 그리 달콤하기만 하지 않다. 하늘의 시간을 산다고 자부해 보지만 실은 땅 위에 발딛은 존재로서 여전히 땅의 시간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으로 대변되는 맘몬의 시간 속에서 어떻게 하면 희망을 살아낼 수 있을까. 서로에게 용기와 지혜가 되는 좋은 만남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성서 속의 인물들이 겪었던 고난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시대의 등불이 될 수 있다면 우리 앞에 놓여있는 이 잔을 외면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일터. 마냥 행복한 꽃길을 걷고 싶다면 우리 공동체는 그 첫걸음부터 헛걸음이 될 것 아닌가. 결국 하하호호 웃음이 가득한 공동체보다는 서로의 아픔과 고단함을 만져줄 수 있는 신뢰 가득한 만남. 무너져 버린 자존감이 회복되며, 나아가 이 지경으로 살아도 괜찮다. 오히려 더욱 좋다라는 성서의 가르침이 현실이 되는 공간이 진정한 좋은만남일텐데 말이다. 

 

 ‘더 좋은만남’을 위해 별다른 방도가 있을지 의문이다. 믿음의 공동체. 보이지 않는 삶의 방식을 추구하고, 실천하는 우리에게 좋은만남은 결국 서로를 얼마나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에 달려있다. ‘힐링’과 ‘워라벨’이 교양있는 이들의 악세사리가 된 작금의 세상 속에서, 배제되고 추락한 이들을 진심으로 환대하며 품을 수 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 갖춰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물적 토대와 확고한 믿음을 기반으로한 정신적 토양을 가꿔가는 일. 또한 굳이 인격과 인품이라 이름 붙일 필요도 없을 ‘착한 마음’은 결코 쉽게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의지와 목표로써 가능한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과 삶 속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과연 좋은만남교회를 10년 다니면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나 자신을 보니 약간의 회의감이…) 언제나 그랬듯이 신앙 공동체는 본을 보이는 이들과 따라가는 이들로 구성된다. 어찌보면 먼저된 자와 나중된 자들. 물론 이 도식은 언제라도 뒤바뀔 수 있다. 나중된 자가 먼저될 수 있고 말이지. 결국 보이지 않는 믿음은 그렇게 흘러가고, 그렇게 전달된다. 

 

 더 좋은 만남을 위해 끝장토론을 해야하는 밤이지만, 내게 있어서 좋은만남 공동체는 지금 이대로 충분해 보인다. 가장 중요한 부분. 지금 우리는 하나님과 얼마나 연결되어 있는가. 또한 서로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될 수 있는가. 세상이 완전히 뒤바뀔만큼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충분히 채워지지 않을 이 두 가지 기준으로 봤을 때. 지금 우리는 그래도 괜찮지 않을까. 뭐 좀 더 열심을 내고, 우리 걷는 이 신앙의 여정을 좀 더 설레이는 공간으로 일궈간다면 더욱 좋겠지만 말이다. 중요한 것은 오늘이 아무리 맑고 쾌청한 날이라 하더라도 길은 여전히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내일은 또 다시 안개 자욱한 새벽길을 조심스레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그 암담한 길 위에서 내 손을 잡아줄 신앙의 동행자가 분명이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당신 옆에.

 

 "좋은만남교회를 생각하며"

 

남기평 목사

 

좋은교회, 정의로운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 등, ‘교회’라는 단어 앞에, 여러 수식어를 붙일 수 있겠지만, 정작 ‘교회’라는 단어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보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신앙인들이 모여서 예배 드리는 장소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는 공간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공동체를 이루고, 그 공동체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믿음과 신앙의 공동체가 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꾸준히 유지할 수 있는 실질적인 ‘생명’들이 필요합니다. 또한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증명할 ‘손과 발’이 필요합니다. ‘손과 발’이 많을수록 더 많은 일과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좋은만남교회는 좋은 교회, 정의로운 교회, 생명을 살리는 교회를 넘어서 교회다운 교회로, 이 땅의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신앙공동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현재를 바라보면, 미래의 역량을 판가름하지요. 미래를 준비하고, 지속적인 공동체의 역량을 위해서도, 실질적인 논의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개선 방안들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것이 목회자 몇몇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고, 협력해서 선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도 잘하고 있지만, 앞으로 더 잘하기 위해서는, 가능성과 현재의 역량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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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하나님의 은혜 II (2)

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죄 사함을 받아 거룩해지며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1.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2)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동참하도록 부름 받음을 믿습니다.

 

개인구원에 대하여는 앞장에서 이미 많이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한다. 성경에서 사회구원의 대표적인 사건은 출애굽사건이다. 애굽에서 바로의 억압 아래 종살이하면서 고난당하던 히브리인들을 하나님께서 탈출시킨다. 이 사건은 종교적 사건이면서도 정치적 억압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를 찾게 되는 정치적인 사건의 성격을 띠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결단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고 사회적 구조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으르 억압의 구조인 바로와 애굽의 구조로부터 탈출시켜서 광야 생활을 거친 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한다. 가나안 사회/정치적 구조는 애굽의 구조와는 대조를 이룬다. 애굽은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질서로 억압하는 사람과 억아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가나안에서 시작된 히브리인들이 사회/정치적 구조는 사사시대로서 절대적 지배자인 왕이 없는 평등한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서는 절대적인 권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신앙을 근거로 민족 공동체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에만 지도자인 사사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한다. 하나님은 히브리인들을 억압의 질서로부터 해방시켜서 자유롭고 평등한 질서로 인도하신다. 사회적 구원의 전형적인 모습은 출애굽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원에 있어서 인간중심주의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해와 별들과 나무들과 동물들은 인간의 구원을 위한 배경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드라마에서 인간을 주인공으로 자연을 조연이나 엑스트라로 설정하는 것은 인간중심주의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을 창조의 꽃/절정으로 생각하고 다른 피조물들을 인간을 위한 존재로 간주하는 인간중심주의는 생태학적 위기를 심화시킨다. 창조주 하나님은 인간들만의 하나님이 아니고 세상 만물의 하나님이시다. 창조 이수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은 온 피조물을 대상으로 하는 말씀이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무재개를 통하여 맺어진 하나님의 계약의 파트너는 사람만인 아닌 온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창공은 그의 솜씨를 알려 준다.”(시편 19:1) 하나님은 온 피조물을 통하여 당신을 계시하시며 온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인간만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면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며 하나님의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상함도 없고 물이 바라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하게 된다.(이사야 11:6~9) “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이전의 하늘과 이전의 땅이 사라지고, 바다도 없어졌습니다.”(요한계시록 21:1) 종말론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는 처음 하늘과 땅과 바다는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진다. 이것은 새로운 창조(new creation)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온 피조물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사건이다. 생태학적 위기를 경험하면서 구원에 대한 생각과 신앙은 ‘인간중심주의’에서 ‘생명중심주의’로 전환되었다. ‘일하시는 하나님’의 ‘일’은 구원을 위한 활동이며 하나님의 구원은 인간과 사회와 전 피조물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인 구원이다. 웨슬리가 제시하는 구원의 지평도 전 우주적이고 종말론적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지구의 얼굴을 새롭게 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증을 가질 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모든 것을 이루실 때까지 성경의 역사를 결코 쉬지 않으십니다. 즉 죄와 비참함, 질병과 죽음, 우주적 거룩함과 행복의 재현, 그리고 나아가 이 지구상에 사는 모든 생명들이 “할렐루야, 전능하신 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우리 하나님께 복과 영광, 지혜와 명예와 권능이 영원토록 계신다”라는 노래를 함께 부를 그 때까지 쉬지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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