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04.20 18:00

2019년 4월 21일

조회 수 19 추천 수 0 댓글 0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첨부

20190421-.jpg

 

■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주일 및 장애인선교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을 열고 죽음을 이기어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 삶에도 매순간 부활과 회복의 기족이 있기를 빕니다.

2. 오늘 오후에는 각 위원회 회의를 하고 다음 분기 사업 계획을 논의해 주십시오.

3. 토요일(27일)부터 1박2일로 홍천 삼봉자연휴양림에서 야외예배를 진행합니다. 세부 일정은 친교문화위원회에서 정하여 알려드리겠습니다. 많은 호응와 참여를 바랍니다.

4.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서울연회 관계로 휴강합니다. 다음 성서대학은 5월 8일에 6장으로 공부하며 야외수업으로 진행하겠습니다.

5. 임수현 전도사님의 셋째 출산이 임박하였습니다. 산모와 아기 모두 건강하게 출산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6. 서울연회가 23(화)~24일(수)에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립니다. 우리교회 연회대표는 목사 세 분과 평신도 대표 임정희 집사님입니다.

 

gmletter.jpg

 

오늘, 스스로에게 부활의 의미를 자문합니다.

  

요즘 들어 NGO 활동과 더불어 교회 담임목회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피로도 많이 느낍니다. 간이 안 좋아졌나? 왜 갑자기 이럴까 생각해보았습니다. 2016년에 단체 활동도 유지하면서 다시 담임목회를 하게 되었지만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그때와 지금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습니다. 세 분 소속목사님들이 계속 도와주시고 설교도 함께 해주시는 데다가 무슨 행사가 더 많아진 것도 아닙니다. 단지 변한 것이 있다면 제가 몇 살 더 먹어 오십 줄에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신진대사도 그렇고 사건에 반응하는 제 속도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좀 느릿해진 것을 느낍니다. 앞으로 점점 더 느려지고 약해지고 둔감해지겠지요.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문득 지금 제 자신에게 '부활'의 의미를 자문해봅니다. 몇십 년 후 죽어 한 줌 재가 되었다가 언제가 될지 모를 종말의 날에 다시 벌떡 일어서는 것은 별로 기대도 안 하고 의미도 없습니다. 그보다는 살아생전에 부활의 기쁨을 누리면 좋겠습니다. 그렇다고 이제 슬슬 늙어가는 제 몸뚱아리가 갑자기 회춘하여 쌩쌩하고 빠릿해 질 리도 없으니 그런 류의 부활도 별로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럼 지금 저에게 의미 있는 부활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고 자라 오십 년을 넘기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라는 핑계를 대면서 많이 찌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대적 정의감도 있고 예민한 의식도 있었는데 이제는 사는 게 바쁘다는 이유로 그렇지 못한 것 같기도 하고, 인간관계의 폭도 점점 좁아지고 있습니다. 비록 '내 나름의' 기준이지만 도덕성 갖춘 사람이라고 자부하였지만 무엇인가를 비판하기 전에 부끄러움이 먼저 찾아옵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저의 올바른 정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순수한 신앙의 부활이기를 기도해 봅니다.

 

news.jpg 

 

“즐거운 야외예배가 되도록 준비해주세요”

 

드디어 야외예배가 토요일로 다가왔습니다. 4월에 진행하는 야외예배 행사가 좀 어색하기도 합니다만 날씨는 이미 봄기운이 충만합니다. 

주일 오후에 각 위원회 회의를 하니, 친교문화위원회가 이번 야외예배를 어떻게 채울 것인가 구체적인 일정이 나오겠지만 일단은 삼봉자연휴양림이라는 위치가 매우 애매합니다. 말 그대로 산속 깊은 곳이어서 식당 두어 개와 휴양림, 팬션과 캠핑촌만 있고 아~무 것도(!) 없는 지역인 것 같습니다. 게다가 동해안을 오가는 거리도 멀어서 바다 구경을 위해 넘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곳입니다. 그래서 전체 일정은 자연휴양림 일대에서 진행하는 것으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녁 식사 후 제가 친교 프로그램을 진행하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의미 있고 추억 깊은 사진을 한 장씩 가져오셔서(혹은 저에게 미리 보내주시면 A4 사이즈로 출력해 가겠습니다) 그 사진에 얽힌 이야기를 함께 나누며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입니다.

 

삼봉자연휴양림은 교회 기준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고 숙박시설 입실 시간은 오후 3시(~10시)부터, 퇴실 시간은 다음날 오후 12시입니다. 세면도구와 휴지 등 개인 위생용품을 준비하시고 최저기온이 5~7도로 예상되니 따뜻한 옷과 편안한 신발(운동화)을 챙기십시오. 또 산불조심 기간이라 야외 바비큐 시설 이용이 전면 금지되니 식사 준비에도 참고해 주십시오. 부디 즐거운 시간이 되도록 협력해 주시기를 부탁합니다. 

 

social.jpg

 

진주 아파트 방화사건 희생자들, 편히 잠드소서.

 

지난 17일 진주시 가좌동 한 아파트에서 조현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안인득(42세) 씨가 4층의 본인 집에 불을 지른 후 계단으로 대피하는 주민들을 상대로 흉기를 휘둘러 열한 살 여자아이와 여고생, 노인 등 다섯 명이 숨지고 열세 명이 중경상을 입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파트 주민들은 안 씨의 조현병 증세로 어려움을 겪으며 수차례 경찰에 신고도 하고 정신병원 입원을 요구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이런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유가족들은 초동대처와 주민 신고를 무시해온 경찰을 성토하며 이 사건을 국가가 책임지고 사과하라고 요구하였으며 민갑룡 경찰청장이 빈소를 찾아 조문하기도 하였습니다. 조현병 환자에 의한 강력 범죄가 끊이지 않는 상황에 대해 국가적 근본적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물론 모든 조현병 환자가 잠재적 범죄자로 인식되어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없기를 바랍니다. 희생자와 유가족들에게 위로가 있기를 빕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조현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일이 또 일어났습니다. 무엇보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품에 안아주시고 가족들의 슬픔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가해자나 희생자나 모두 안타까운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국가와 국민, 가족이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 해결하기 원합니다.

 

 

(15) Homo Religiosus 경건을 추구하는 인간

 

1
 
“인간에 대해 어떤 정의가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요.”
중요한 정의입니다.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생각하는 인간. 라틴어 ‘sapio(사피오)’는 ‘맛이 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맛이 나야 생각을 하나?’ 그래 맛보게, 생각하게 하고 싶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정의, 특이한 게 없을까? 가만히 올린 눈동자는 교실 오른편 선풍기에, 회전 조절 끈이 있던 구멍에 멈추었습니다. 
“나도 해 볼게.”
대강의 눈은 칠판을 넷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번째에 ‘호모 시그난스(Homo Signans)’라고 썼습니다.
 
‘기호(記號, sign)적 인간’. ‘기호를 만드는 인간’이란 뜻입니다. 기호는 인간의 경험에 대한 약속입니다. 이름 짓기의 ‘이름’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상호간의 약속인 기호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쌓아 가고, 함께 나누고, 감행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해 보이는 기호도 한계가 있습니다. 기호를 만들기는 했지만, 만들어가고는 있지만 기호가 삶의 사건을 따르는지라 그 사건을 기호에 담아 기호로 나타내기에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게다가 애초 기호로 담을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 같은 사건입니다. ‘사랑’이라는 기호는 있지만 ‘사랑’의 사건을 모두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담기에 너무 큰 것이 있습니다. 
“뭐가 있을까?”
눈치 빠른 아이가 있습니다. 지금은 ‘종교학’ 시간입니다. ‘종교(religion)’이라는 기호. 이 기호로 조금 더 나가면 이 기호를 만들어 내는 인간, ‘종교적 인간’, ‘호모 렐리기오수스(Homo Religiosus)’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정의는 종교학의 출발입니다. 
 
2
 
‘Homo Religiosus’에 대한 이야기 전에 먼저 해야 할 작업이 있습니다. ‘religion’과 ‘종교(宗敎)’와의 관계입니다. ‘religion’이 ‘종교(宗敎)’로 번역된 것은 19세기 일본에서입니다. 그런데 ‘마루 종(宗 )’, ‘가르칠 교(敎)’, ‘큰 가르침’이라는 의미라면 ‘religion’과는 많이 멉니다. 라틴어 어원을 보면, ‘religion’는 ‘relegere(렐레케레)’, ‘다시 읽다’, 또는 ‘religare(렐리가레)’, ‘다시 묶다’의 의미입니다. 인간의 어떤 변화되는 사건에 대한 단어, 형용사 또는 동사가 고정된 의미의 단어, 명사가 된 느낌입니다. 그러니 ‘종교(宗敎)’라는 번역어로는 ‘Homo Religiosus’이 가진 사건 속에서 태도와 행위하는 인간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니 ‘종교’라는 단어를 피해 그대로 ‘religion’을 사용해서 ‘Home Religiosus’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religion’하면 떠오르는 것은?”
아이들은 그리스도교, 불교, 이슬람교를 말합니다. 뭐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금 부족합니다. 390년 경, 그리스도교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는 ‘『참된 종교』[De Vera Religione], 성염 역주 (분도출판사, 2017)’을 씁니다. 번역의 제목부터 오해될까 걱정입니다. 책은 여타의 ‘종교’에 대한 설명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라는 단어조차 발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세속의 야망이다. 육의 욕망으로 말미암아 부패시키고 부패하는 짓을 좋아하지 말자. - 아우구스티누스, 『참된 종교』, 229.
 
아우구스티누스에게 ‘religion’은 각각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것은 ‘파이어티(piety)’, 경건, 그리고 경건한 삶에 가깝습니다. 그러니 ‘Homo Religiosus’의 번역은 ‘종교적 인간’이 가져오는 오해, “전 교회에, 절에 다니지 않습니다. 무교(無敎)입니다” 대신에 ‘경건을 추구하는 인간’을 제안합니다. ‘그는 종교를 가졌다’보다 ‘그는 종교적이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권하는 삶입니다.
 
3
 
이제 ‘추구’입니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추구’는 ‘정적(靜的)’인 것으로 또는 ‘정적인 상태’이기를 요구받습니다. 사람들은 세계의 불합리 앞에 종교에게 말합니다. “가만히 있으라. 너희는 기도만 할 수 있다.”
‘가만히 있으라’에 자주 사용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정교분리(政敎分離).’ 이는 처음 정치가 개인의 종교에 관여 하지 못한다는 개인이 가진 종교의 자유와 관계된 선언이었습니다. 국가의 종교, ‘국교(國敎)는 없다’는 거부의 선언입니다. 그러나 오늘 자주 ‘종교는 정치에 개입하지 말라’가 됩니다.
 
불교의 한 깨달음이 있습니다. 심우도(尋牛圖). ‘소를 찾는다’는 의미는 곧 ‘잃어버린 자기를 찾는다’는 뜻입니다. 이를 위한 열 개의 그림이라 하여 ‘십우도(十牛圖)’라고도 합니다. 열 개의 그림으로 중 마지막이 인상적입니다. ‘입전수수(入廛垂手)’, ‘시장으로 돌아간다.’ 결국 깨달음이 이뤄진 후 그는 바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 다시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본질적으로 종교와 관련한 경건의 추구는 ‘동적(動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가며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살아가지 않는다면 일어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Religion’의 살아있는 의미는 그들의 사건 속에서의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교적인 해결책이 과연 존재하는가?” 
- 디트리히 본회퍼, 『윤리학』, 손규태 외 역 (대한기독교서회, 2016), 425.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 루터교회 목사, 신학자이며 2차 대전 당시 반 나치 운동가였습니다. 그는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암살 계획에 가담하였고 체포되었고 1945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자신의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입니다.
 
4
 
“우리는 어떻게 경건을 살아낼 수 있을까?”
아우구스티누스와 본회퍼는 어렵습니다. 위인전을 너무 많이 읽어 ‘난 안 되겠다’ 덮은 ‘1인’입니다. 하지만 부담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아우구스티누스도 본회퍼도 아닙니다. 모두는 다른 ‘나’들입니다. 이 ‘나’들에게는 모두 자신만의 경건이 있습니다. 그리고 경건을 얹을 자신만의 삶이 있습니다.
 
“아들들. 수고했다. 오늘도 좋은 하루!”
수업을 마치고 교실 밖을 향하는데, 태현이의 손걸레는 벌써 슥 스윽 칠판 밑 분필 가루를 닦아내고 있습니다. 
 

kmcthe0.jpg

 

제17장 

종말 II (2)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1. 의의 최후승리 (2)

우리는... 의의 최후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웨슬리는 ‘의’(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의’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인간 영혼 속에 깃들이는 하나님의 생명’이며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마음’이며,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새로워지고 마음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인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그 근원을 하나님께 둔 사랑의 나라로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사랑하는 세계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살아가면서 정의(正義)보다는 불의(不義)와 악(惡)을 자주 경험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의로우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의문을 가지게 된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이유 없는 고난을 경험하거나 선한 사람들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침묵을 읽어가고 하나님의 정의에 대하여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게 된다. 최후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나타날 것이고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은 인내를 요구한다. 만약에 악이 존재하는 곳에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임재하셔서 악을 징벌하신다면 그 하나님은 진정한 하나님일까라는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한다. 인간의 기도와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의 섭리는 실종된다. 그런 하나님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 아닌가? 하나님은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시지만 당신의 섭리 안에서 응답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의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인내는 하나님의 미쁘심(성실하심)에 근거한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다.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 대한 약속에서 하나님의 미쁘심은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 주는 땅으로 가거라”고 명령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이 명령에 순종하면 다음과 같은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으므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공동체를 형성하시면서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는 미쁘신 하나님이시다. 

시편 기자는 노래한다. “주님은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 영원하다. 그의 성실하심 대대에 미친다.”(시편 100:5) 그러나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고 긴 시간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미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감리교도는 인내심을 갖고 최후에는 하나님의 정의가 이루어지고 의(義)가 승리할 것이라는 신앙으로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인내심으로 의의 승리를 기다린다는 것은 무조건적인 복종이나 순응을 의미하지 않는다. 인내심과 신앙은 불의에 대해서는 저항하고 하나님의 의를 세워가는 일에 적극적이면서 온전한 하나님의 정의의 완성을 기다리는 것이다.(계속) 

 

study.jpg

 

제4장   논쟁의 시대에 성경 해석하기

 

신정통주의가 다양한 학문적 방식들을 받아들임으로 지평이 확대되기는 하였지만 '오직 그리스도만, 오직 성경만이 유일한 증거'라는 교리는 사회의 다양화, 다원화로 인해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자는 성경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다양한 해석을 제한하지 않기 위해 다음과 같은 지침을 제안합니다.

1. 예수 그리스도가 성경의 중심임을 인지하라 : 흑백논리에 바탕을 둔 율법에 따라 사는 것이 훨씬 단순하겠지만 성경을 예수님의 삶과 사역이라는 렌즈로 접근해야 한다.

2. 문법과 역사적 상황에 맞는 본문에 초점을 맞추라 : 편견을 본문 속에 집어넣는 주관주의를 피하고 본문의 문학적 단위, 언어의 문화적 조건, 사회적 및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여 주의 깊게 현대의 상황에 적응해야 한다.

3. 성령님의 인도를 의지하라 : 성령님은 우리를 새로운 신앙과 행동으로 이끄시며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주심으로 도우신다. 

4. 신앙의 규범인 교리적 합의를 따르라 : 성경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구분하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라는 공동체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

5. 사랑이라는 규범과 일치하게 해석하라 :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초래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성경해석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시금석이다.

6. 진지한 연구가 필요하다 : 우리의 생각과 행동이 틀릴 수 있다는 것과 구원과 관련이 있는 믿음만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단지 문화적인 부분을 구분해야 한다.

7. 성경의 특정 구절은 성경의 핵심 주제에 비추어 해석하라 : 모든 특정 구절들을 창조, 타락,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구원이라는 성경의 통합 중심 주제에 비추어 해석하고 근본적 원칙에서 벗어난 예외를 만드는 일을 중지하라. 

?

  1. 2019년 3월 31일

  2. 2019년 4월 7일 주보

  3. 2019년 4월 14일

  4. 2019년 4월 21일

  5. 2019년 4월 28일

  6. 2019년 5월 5일

  7. 2019년 5월 12일

  8. 2019년 5월 19일

  9. 2019년 6월 2일

  10. 2019년 6월 9일

  11. 2019년 6월 16일

  12. 2019년 6월 23일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