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만남교회

2019.05.04 17:39

2019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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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3주일 및 어린이주일입니다. 다음주일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 어린이들이 하나님의 사랑은 물론 교우들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밝게 자라날 수 있도록 항상 관심 갖고 기도해 주세요.

2. 오늘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로 모이겠습니다. 많이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주일 오후에는 강화도로 농촌생태활동을 가겠습니다.

3.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야외수업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예수 성경 동성애]의 6장으로 독서 토론할 예정이니 책을 읽고 미리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4. 5월 마지막 주일에는 흩어지는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선교사회위원회는 거리, 시간 등을 고려하여 방문 대상 교회를 선정, 미리 공지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십시오.

 

5월 생일 축하] 민지애 사모님, 임수현 전도사님(4일), 방정혁 학생(14일), 

박차오름 어린이(22일), 손창호 청년(24일), 고남곤 권사님(27일.음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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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마음을 떠올리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귀한 만남을 태초부터 예정하시어 오늘날 이렇게 목회자와 성도로 만나도록 하셨다고 믿습니다. 모쪼록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 가운데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도록(롬 8:28) 서로가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첫 목회라 여러 가지로 두렵고 떨리지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이들과 함께 하셔서 넉넉하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신다는 말씀을 의지하여(롬 8:37) 담대하게 마음을 먹습니다. 부디 성도님들이 많은 사랑으로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2000년 4월 9일)

우연히 들쳐본 주보묶음철에서 제가 처음으로 만들었던 우리 교회의 주보에, 처음으로 썼던 목회서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바로 위의 글입니다. 이 글에는 

'교회에 꼭 필요한 사람으로 서기 위해, 성도님들의 가정과 생업의 번성과 평안을 위해, 제 자신의 인격적인 성숙을 위해' 40일 작정 새벽기도회를 시작하니 기도를 부탁한다는 내용도 있었습니다.

지난 야외예배의 '추억의 사진 나누기'를 위해 제가 가져갔던 사진은 2000년 4월 23일, 부활주일에 교우들과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이 글을 보는 순간 그 사진도 떠올랐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습니다. 19년이 지난 지금 교우들에게 부탁하였고 내가 마음 먹고 기도했던 제목들은 과연 응답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께서 한 개의 기도에는 분명하게 응답하신 것을 알겠는데 다른 두 개는 자신이 없습니다. 제가 정말 이 교회에 필요한 사람인지, 오히려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것은 아닌지 문득 두려운 생각이 들었고, 19년이나 목회를 했는데 정말 인격적인 성숙을 결실했는가 하는 질문에는 그저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여전히 부족하고 더딘 사람을 목사라고 아끼고 기도해주신 교우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처음 마음을 잃지 않고 겸손해지도록 애쓰겠습니다. 부디 하나님과 여러분의 자비와 관용을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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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깊은 산골의 원시림을 체험하고 왔습니다.”

 

4월의 마지막 주일에 떠난 야외예배, 개인 일정이 겹친 분들이 많아 안타까웠고 걱정도 컸습니다만 함께 하신 분들이 서로를 잘 섬겨 주셔서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왔습니다. 20190505-01.jpg

27일(토) 아침에 교회에서 일곱 명이 출발하여 생각보다 교통체증이 심하지 않았던 서울-양양고속도를 신나게 달렸습니다. 요즘 핫!하다는 내린천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사진도 찍었습니다. 양양에 도착, 아무도 찾아올 것 같지 않은 외진 곳에 있는 막국수 맛집에서 점심을 맛나게 먹고 낙산사로 향했습니다. 낙산사 절벽의 홍련암에서 파도가 몸부림치는 동해의 절경을 감상하고 꼭대기에 있는 대형 불상도 구경하였습니다. 다시 차에 올라 구룡령 굽이길을 넘어 홍천 삼봉자연휴양림에 도착하니 저녁무렵이 되었습니다. 식사 준비를 다 마치니 남기평 목사님 가정이 DMZ 평화 손잡기 행사에 참여하시고 오셔서 김형휘 성도님이 준비해주신 훈제 바비큐로 함께 저녁식사를 잘 먹었습니다. 같이 못 오셨음에도 이렇게 애써주신 김형휘 성도님께 감사드립니다. 

식사를 마치고 '추억의 사진 나누기' 프로그램을 진행하였습니다. 프로포즈를 받을 때의 사진, 청소년 시절 친구들과 찍은 사진, 가족과 자녀들 사진 등 각자에게 의미 있는 사진을 소개하고 그에 얽힌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더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홍천 산골의 밤이 깊어가며 우리의 이야기도 깊어갔습니다.

주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아침 식사로 초라해 보이는 누룽지와 사발면을 먹었습니다만 든든하네요. 아침 식사를 하는 중, 새벽 6시에 서울에서 출발한 윤성일 집사님 부부와 이관택 목사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오시는 길의 풍경이 너무 아름답다고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시네요. 9시에 주일 아침예배를 드린 후 체크아웃을 하고 아쉽지만 남기평 목사님 가정은 회의 일정으로 먼저 서울로 올라가시게 되었습니다. 남은 사람들은 가칠봉 등반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우선 약수터에서 탄산약수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뭔가 건강해지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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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을 따라 난 길을 걸어 산을 올랐습니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이었지만 계곡을 열 번 정도 이리 건넜다 저리 건넜다 하는 길입니다. 오르는 내내 인간의 발길이 뜸한 원시림의 풍광에 다들 한 마디씩 하십니다. 달력에서나 볼법한 계곡의 아름다운 풍경, 그냥 떠마셔도 될 깨끗한 물, 삼삼오오 핀 들꽃들과 식물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었습니다. 한 시간을 오르자 가파른 언덕이 나오네요. 자리를 깔고 점심으로 싸간 유부초밥과 과일을 펼쳐놓았습니다. 등산길에 먹는 도시락은 항상 진리입니다. 점심을 먹고 더 올라가지 못하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하산하였습니다.

좀 막히긴 했지만 서울로 잘 올라와 북한산 인근에서 코다리로 저녁을 잘 먹고 헤어졌습니다. 모두가 서로를 잘 섬겨주셔서 즐거운 시간이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대자연의 순수함을 목격하는 유익한 공간이었습니다. 아울러 함께 떠나지 못한 분들께는 죄송한 마음을 전합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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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예수께서 이 일을 아시고서, 거기에서 떠나셨다. 그런데 많은 무리가 예수를 따라왔다. 예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리고 자기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이것은 예언자 이사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이었다. "보아라, 내가 뽑은 나의 종, 내 마음에 드는 사랑하는 자, 내가 내 영을 그에게 줄 것이니, 그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할 것이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외치지도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그의 소리를 들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마태복음 12:15-21(새번역)

 

이사야가 예언했던 하나님의 종, 즉 진정한 구원자의 모습은 무엇일까요? 오늘 성서에서 ‘구원자는 이방 사람들에게 공의를 선포하는 사람’이라고 단언합니다. 율법이 모든 것의 근간이었던 구약시대의 예언치고는 상당히 도발적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사회에서 ‘이방인’의 문제는 상당히 예민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으로부터 신앙과 전통을 지키는 일은 유대사회의 근본 질서였고, 국가공동체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토대였습니다. 역으로 이방인을 배제하고 차별하는 것은 신앙과 전통을 지키는 일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나 당시 이스라엘은 강대국들에게 둘러싸여 국가의 존속 자체가 위태로운 상황이었기 때문에 이방인에 대한 철저한 경계와 배제가 당연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상당히 장려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사야는 이 지점에서 예언자의 눈으로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을 바라봅니다. 그것은 이방인들로 부터 국가 공동체를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벌어지는 (국가의)야만적이고 폭력적인 행태들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신음소리가 사방에서 울려퍼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방인'이라 하여 자행되는 국가의 폭력은 외부로만 향한 것이 아니라, 내부로도 향했습니다. 도처에 '이방인'이라고 지목받는 사람들은 늘어만갔고, 율법과 '하나님의 이름'은 이제 찬미와 거룩의 상징이 아니라 공포와 학대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 오히려 스스로 율법의 근본정신을 훼손하였고, 하나님의 섬긴다고 하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권력의 도구로 이용하였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의 공동체성을 이어간다고 하면서, 백성들을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한낱 노예나 다름 없는 존재로 치부하였습니다. 

 이런 잘못된 상황 속에서 이사야가 외친 예언은 이방사람들을 향한 정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국가 이데올로기 때문에 쓰러져간 모든 민중들을 향한 정의인 것입니다.      

 

오늘의 성서는 예수님을 이사야의 예언과 연결시킵니다. 정의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 불의함 속에서 억울함을 삼키며 근근히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가야 했던 민중들을 찾아다니며, 해방의 복음을 전했던 예수공동체를 통하여 결국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특히나 20절 말씀은 '이방인'이라 손가락질 받으며 차별과 배제를 경험하고 삶의 여기저기가 남루해질대로 남루해진 이들에게 힘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그는 상한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을 것이다"

 

정의가 이길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그 어디에도 쓸데 없다고 여겨지는 상한 갈대나 꺼져가는 심지조차 끄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모든 존재는 사랑스럽습니다. 모든 존재는 정의롭고 평등한 세상에서 살 권리가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가 아니라 증오의 종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사랑이라는 진실은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하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현실에서도, 그 어떠한 조건과 상황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모든 존재의 정의를 지켜가실 것입니다. 

 

'이방인'을 색출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국가와 교회가 만연한 비극적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성서는 말씀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그  이름에 희망을 걸 것이다." 오늘날의 이방 사람들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우리에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당신이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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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을 받으러 온 남자에게 은행원이 물었다. 

“담보할 물건이 있으신가요?” 

남자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없는데요.” 

은행원은 남자를 힐끗 쳐다보며 물었다. 

“그러면 보증인이 있으신가요?” 

남자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없는데요.” 

은행원은 남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담보도 없고 보증인도 없이는 대출이 어렵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대출을 받으러 온 사람이 엉뚱한 질문을 했다. 

“혹시 하나님을 보증인으로 해서 대출 받을 수는 없을까요?” 

은행원은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가능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감 증명서와 재산세납세증명서를 떼어 오시면 됩니다.”

 

신앙이 있는지. 믿음이 있지를 어떻게 증명합니까? 교회는, 그리스도인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기가 믿음 안에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해 보고, 스스로 검증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까? 모른다면, 여러분은 실격자입니다.”(고린도후서 13:5)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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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장 

종말 II (3)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2. 영원한 하나님 나라 (1)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앞에 있는 장들에서 반복하여 말하였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핵심적인 주제이다. 감리회의 [교리와 장정]도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세상에 선포된 복음의 중심이다.” 더 나아가서 [교리와 장정]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기술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가 죄를 이기고 인간을 구원하는 경륜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는 장래에 영광 중에 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모든 신자의 몸의 부활,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가져오는 세상의 종말을 말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로 은혜가 죄를 이이고 인간 구원이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재림과 심판, 신자들의 몸의 부활,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에 이루어질 나라로서 아직 도래하지 않는 나라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나라이다. 16장에서 살펴보았듯이 웨슬리에 따르면,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지는 몸의 부활, 최후의 심판을 거치면서 완성된다.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그려간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열방을 유업으로 주어 그의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게 하실 때(시편 2:8), 모든 나라들이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섬기게 될 때, 여호와의 산에 올라 하나님의 전에 오를 때, 즉 그리스도의 교회가 산 위에 세워질 때, 또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와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게 될 때, 바로 그때가 되면 주님이 왕권을 가지시고, 영광스러운 옷을 입으시고, 모든 영혼에게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죽음 이전에 이미 시작된다고 주장하였다. “바로 이때에 천국이 우리의 영혼 안에서 열리고, 올바른 천국의 상태가 시작되어...” ‘바로 이때’는 어느 때일까? 예수 그리스도를 처음 알아서 성령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부르게 될 수 있는 때이며, 영생이 주어지는 때이다. 웨슬리 신학자 콜린스에 따르면, 웨슬리에게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때는 ‘신생(新生)’의 순간이다. 신생의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에 시작되는 것일까?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웨슬리는 다음과 같이 설교한다.

 

그런데 이 나라[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회개하고 복음을 믿을 때 임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분을 알 때 임하는 것입니다. ‘영생은 참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믿는 사람의 마음속에 임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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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성경이 동성애에 대해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

 

성경은 선한 세상을 창조하신 선한 하나님의 드라마이지만 교회 안의 동성애 논쟁은 예외인 것 같습니다. 성경은 동성애에 대해 거의 논의하지 않음에도 반대자들은 언어학적, 역사적, 문화적 상황과 상관없는 본문들을 뽑아내고 비성경적인 이론들을 뒤섞어 중심 메시지를 왜곡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화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창세기 19장), 레위인 첩의 강간(사사기 19장) 이야기는 여행자들을 환대하라는 종교적 의무가 중심인데 동성애 지탄의 본문으로 애용합니다. 공동체 생존을 위한 레위기의 성결법전도 동성애 금지의 본문으로 인용하었고 고린도서(6장)와 디모데전서(1장)의 악행 목록도 의미가 불불명한 그리스어 단어를 '동성애'로 규정하여 번역하였습니다. 성적인 부도덕성과 부자연스러운 욕정을 다룬 유다서도 현대의 동성애자 정죄로 해석하였고 우상숭배를 지적하며 모두가 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로마서 1장도 남성 우월적인 가부장제를 전제하여 자연스러움을 규정한 뒤 동성애를 정죄하는 본문이라고 해석합니다. 자연법은 상식을 가장하지만 결국 인간의 편견을 자명한 진리로 단언하는 오류를 범하는데 이런 논리가 성경 해석에 반영한 것입니다.

성적인 지향은 선택적인 것이 아니고 동성애가 회복이나 전환,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닌 인간 본성의 한 부분입니다. 우상숭배도 아니고 최악의 범죄도 아니며 인류 타락의 증거도 아닙니다. 성경은 단혼, 분리된 둘의 재결합, 남성-여성 관계 중심의 결혼 관계를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사도행전 10-15장의 긴 이야기를 통해 교회가 어떻게 마음을 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베드로는 하나님 앞에서 정결한 사람과 불결한 사람의 구별이 없다는 환상을 보았고 불결하여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겨졌던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성적 지향은 성령 임재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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