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성령강림 후 제2주일 및 순교자주일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믿음의 조상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는 절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오후에는 함께 영화를 관람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함께 보실 영화는
"예수보다 낯선"(여균동 감독, 조복래 주연, 2019년)입니다.
3. 마정애 권사님 남편이신 양경규 선생님(전 민주노총 부위원장)이 정의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셨습니다. 기억해 주십시오.
4. 교회학교와 각 위원회는 여름행사 계획을 수립해 주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향한 이낙연 총리의 요청
국가조찬 기도회라고 하면 무엇보다 먼저 살인자 독재자를 앞다투어 축복하던 80년대의 목사들이 생각나 입맛이 씁니다. 그런데 아직도 국가조찬 기도회가 열리네요. 하긴 권력을 지향하는 목사들과 종교를 이용해 세를 넓히려는 정치인이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17일, 코엑스에서 열린 제51회 국가조찬 기도회에 대한 기사가 뉴스앤조이에 나와서 읽어보았습니다. 문재인 대통령 대신하여 개신교인인 이낙연 국무총리가 참석하여 대한민국 발전에 그리스도인의 수고와 기도가 있었다고 감사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는 데 서투르다. 동과 서, 빈자와 부자, 여자와 남자 등 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극단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나와 다르면 거친 말로 매도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인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성숙한 민주 사회로 나가는 데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고 축사하며 가난하고 소외받고 차별받는 사람을 위한 기도와 민족 대화해를 위한 기도를 요청하기도 하였답니다.
이 총리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자, 성숙한 민주주의로 나아가자'는 말을 한 것은 개신교, 교인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단 간 벌어지는 치열한 경쟁, 부자가 더 우대받는 풍토, 여전히 허드렛일만 하는 여성, 성소수자들에 대한 가장 격렬한 혐오, 극우세력 옹호, 북한에 대한 저주와 막말, 타종교에 대한 증오가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교회의 현실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최근 자주 거론되는 전광훈 목사가 이 총리와 오버랩 됩니다. 저주와 증오, 거절을 입에 달고 다니는 목사와 이해와 용납, 화해를 요청하는 교인이라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되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만 십자가를 지고 함께할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우리가 더욱 힘을 내고 확신을 가져야 할 이유입니다.
“뜻밖의 속회(?) 모임과 진지한 대화”
지난 목요일 저녁에 뜻밖의 속회(?) 모임을 하였습니다. 한효균 부장님과 이관택 목사님, 송윤혁 집사님이 언제 같은 속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속회 혹은 직장 심방을 빙자하여 저녁식사 모임을 조직하고 감사하게도 저를 초대해 주셨습니다. 종로 3가의 닭볶음탕 집에서 만나 맛난 저녁을 과할 정도로 배불리 먹고 자리를 옮겨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교회를 위한 진지한 이야기들이 오갔습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단체 활동 사임을 선언한 저에게 한 부장님이 앞으로의 목회 플랜을 물으셨습니다. 솔직히 말해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비관주의자인 저로서는 딱히 플랜이랄 것도 없이 그냥 뭔가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만 있었는데 세 분이 역동적이고 더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함께할 수 있는 교회로 자라나기 위하여 좀 더 노력을 해야 한다는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또 네 명의 목회자가 다양한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하는 다양한 설교를 해주면 좋겠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송 집사님은 제가 설교에서 빈민이나 성소수자 등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표현을 할 때 사려 깊지 못하다고 건강한 비판을 해주셔셔, 매우 심각하게 인식하면서 감사하게 받았습니다.
오랜만의 만남과 대접에 감사했습니다. 교우 여러분들이 염려하시고 기대하시는 바를 염두에 두고 많이 고민하고 기도하겠습니다. 성령님이 우리 좋은만남교회와 함께하셔서 좋은 열매를 많이 맺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정노동자들의 과로사가 더이상 계속되어서는 안 됩니다.
지난 19일, 당진우체국 소속 40대 집배원 강길식 님이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강 씨는 병가 중인 직원들 몫까지 일하는 고강도 노동을 지속하다 뇌출혈로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주말부부 생활을 하던 강 씨는 두세 달에 한 번밖에 만나지 못할 정도로 주말에까지 근무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교회에서 집배원의 죽음을 애도하며 중보기도를 한 것이 5월이었고 그 당시까지 일곱 명이 과로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는데, 두 달 사이에 강 씨 외에 30대 집배원 한 명이 세상을 떠나 올해 들어 아홉 명으로 늘었습니다. 인력증원이 절실하지만 우정본부는 돈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할 뿐 대책 마련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전국우정노조는 인력증원과 주 5일제 근무 시행을 요구하며 생존권과 기본권 보장을 위한 정당한 요구에 응답하라며 내달 9일에 총파업을 예고하였습니다. 돈보다 중한 것이 생명입니다. 더 이상의 과로사는 없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 가운데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줄기가 나서 열매를 맺을 때에, 가라지도 보였다. 그래서 주인의 종들이 와서, 그에게 말하였다. '주인 어른, 어른께서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주인이 종들에게 말하기를 '원수가 그렇게 하였구나' 하였다. 종들이 주인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우리가 가서, 그것들을 뽑아 버릴까요?' 하였다. 그러나 주인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니다.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할 때에, 내가 추수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마태복음 13:24-30(새번역)
'천국'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가장 흥미롭고 관심 있는 주제입니다. "결국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명한 진실 아래 모든 생명은 사실상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일'과 '죽어가는 일'이 동시에 벌어지다 보니 사람들은 막연한 불안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유로
'죽음 이후'의 세계인 '천국'에 대한 관심은 모든 이들에게 특별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천국'의 실체를 정확히 규명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관한 온갖 이야기가 난무하지만 무엇이 '진짜 천국'인지에 대해서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설왕설전이 벌어집니다.
역사 이래 모든 종교는 '천국'에 관한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설파해왔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천국 이야기'는 그 본래 의미와는 다르게 지배체제의 통치 도구로 오용되곤 했습니다. 일례로 고대의 토템 신앙에서부터, 제정일치 사회였던 이슬람 국가와 유대 사회,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로마제국의 모습에서 우리는 정치와 결탁한 부패한 종교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한 사회에서 '천국의 복음'은 불의한 사회로 인해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순응적인 삶을 연명하게 하는 '희망고문'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가까운 예로 19세기 미국의 흑인 노예들의 실상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광활한 목화밭에서 짐승과 다름없는 노예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천국의 소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어째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해방의 소식을 전해주는 '천국 이야기'가 차별과 억압을 유지하고 확대하는 일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까요? 이는 명백히 '거짓 천국' 이야기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천국 이야기'를 통하여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천국 비유 시리즈 "하늘나라는 ~ 와 같다"의 최초 버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는 통상적인 종류의 천국 이야기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죽음 이후'의 세상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천국의 소망이 결코 뜬구름 잡는 저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실생활 속에서 만날 수 있는 상황과 사람들의 태도로 인해 발견할 수 있는 구체적인 세상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오늘의 천국 이야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은 자기 밭에다가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과 같다."
이는 천국이 공간일 것이라는 사람들의 편견을 뒤흔드는 말씀입니다. 바로 사람이 천국입니다. 다만 사람이 잠들었을 때, 원수가 와서 이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데, 그것이 문제입니다.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는 것도 모르고 자는 사람이 있다면 그 상황 자체가 천국의 위기입니다. 이는 천국을 단지 체제 유지의 도구로 사용해왔던 역사를 완전히 뒤엎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천국은 순종하고, 가만히 있는 이들의 것이 아니라, 잠들지 않고, 원수를 경계하며, 원수가 뿌려놓은 가라지를 끝까지 추적하는 이들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더 나아가 자기 밭을 잘 가꾸고,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 자체가 천국입니다.
예수님의 천국 이야기와 작금의 세상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천국 이야기 어떤 부분이 다른지 한번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결국 우리 각자가 천국이 되어야겠지요.
▷ 오늘의 기도
천국의 소망을 품고 기도합니다. 이 땅의 고통 받고 소외당하는 모든 이들로 하여금 천국을 경험하게 하소서. 또 다양한 모습으로 희망을 빼앗긴 채 지옥같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허락하소서. 스스로 천국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어부 | 김종삼
바닷가에 매어둔
작은 고깃배
날마다 출렁거린다
풍랑에 뒤집힐 때도 있다
화사한 날을 기다리고 있다
머얼리 노를 저어 나가서
헤밍웨이의 바다와 노인이 되어서
중얼거리려고
살아온 기적이 살아갈 기적이 된다고
사노라면
많은 기쁨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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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삶이 기적 같다, 아니 삶은 늘 기적이다.
기적은 또 다른 기적을 낳는다, 그러니 지금 삶을 소중히 살라.
그렇게 사노라면, 삶은 환희가 된다
매일 매일이 기적이다, 그대는 기적의 주인공
오늘도!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사시라. [지리산]
바람을 피우고 술을 먹고 아내를 때리는 남편을 둔 아내가 있었다. 인간적으로는 남편이 밉고 같이 살고 싶지 않지만 예수를 잘 믿는 아내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편이 돌아오기를 눈물로 기도하며 참았다.
아내는 나무를 하나 구하여 남편이 바람을 피우거나 외도를 할 때, 술를 마시고 때리고 욕하여 남편에 대해 미운 마음이 생길 때마다 그 나무에 못을 박으며 남편 때문에 속상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에 대해 ‘하나님, 남편을 미워하는 마음 가진 것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서 못을 박았다. 못은 점점 하나씩 늘어갔다.
어느 날 아내가 나무에 못을 박는 것을 본 남편이 이게 뭐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내는 이 못들은 당신이 나에게 아픔을 줄 때 당신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하나씩 박았던 못이라고 말했다. 남편이 목 박힌 나무를 보니 그 나무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많은 크고 작은 못이 박혀 있었다. 이것을 본 본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날 밤 남편은 아내 몰래 못 박힌 나무를 껴안고 울었다. 그 후부터 남편은 변하기 시작했다. 아내를 사랑하며 아껴주게 되었다.
이 예화의 결말은 두 개의 버전으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어느 날 아내가 남편을 불렀다. “여보! 이제는 끝났어요! 당신이 고마울 때마다 못을 하나씩 뺏더니 이제는 하나도 없어졌어요.”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여보, 아직 멀었소.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있지 않소.” 아내는 남편을 부둥켜안고 고마운 눈물을 흘렸다.>
다른 하나는, <어느 날 남편이 아내를 불러 나무를 보여주며 말했다. “여보, 이제 끝났어요. 더 이상 이 나무에 못은 없지요?” 그러나 아내가 남편을 쳐다보며 말했다. “못은 없어졌지만 못자국은 남아 있지요.”>
어떤 결말로 이야기를 끝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교훈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보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페이스북 예화공작소&희망충전소]
2
그때에 존경받는 늙은이 수보리가 사람들 가운데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어 오른쪽 어깨에 메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공손히 절하며 부처님께 여쭙기를, 참으로 드문 분이십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모든 보살을 잘 보살피시며 모든 보살을 잘 붙들어 주십니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진대 어디에 마땅히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무릎꿇릴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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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은 산스크리트어 ‘보디사트바’를 한자 보리살타菩提薩埵로 옮기고 그것을 다시 줄인 것이다. ‘보디’는 각覺이요 ‘사트바’는 유정有情이다. 유정은 중생을 일컫는 말, 모든 중생은 불성을 지니고 있지만 지금 살아 있기에 정情이 있다. 살아서 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깨달은 사람이 보살이다. 깨달았지만 아직 정을 여의지 못했다. ‘깨달은 중생’이 보살이다.
“대충 말하면, 정이 있으니 망상이 생긴다. 보살은 정情과 상想을 끊지 못한 사람이다. 오직 닦고 닦아서 부처님 땅(佛地)에 이르러야 정상情想이 끊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에게는 각覺만 있고 유정有情은 없다.”(王日休)
호념護念은 보살핀다는 말로 읽는다. 모든 사람을 잘 가르쳐 망념妄念이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李文會) 어떤 사람이 마음 공부를 착실히 하여 헛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면, 그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그의 진아眞我이신 여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사실을.
부촉付囑은 붙들어 준다는 말로 읽는다. “생각마다 정진精進하여 더럽혀지거나 붙잡혀 있지 않게 한다. 앞 생각에 조금 붙잡혀 있다가도 뒷 생각으로 그것을 깨달아 하여금 이어지지 않게 한다.”(李文會)
도道는 불가수유리不可須臾離라. 한순간이라도 떨어진다면 그것은 도가 아니라 했다. 부처님의 보살피심이 한순간이라도 끊어진다면 그것을 어찌 부처님의 보살피심이라 하겠는가?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 졸지도 않고 잠들지도 아니하신다.”(<시편> 121:4)
이렇게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수보리 여쭙는다. “세존이시여, 선남자 선여인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낼진대 어디에 마땅히 머물러야 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무릎 끓릴 수 있겠습니까?”
선남자 선여인은 단단하게 마음먹고 뒤로 물러서지 않는 사람이다. “선남자는 바른 정심定心이요, 선여인은 바른 혜심慧心이다.”(李文會)
아누다라삼먁삼보리는 산스크리트어인데 ‘아’는無, ‘누다라’는 상上, ‘삼’은 정正, ‘먁’은 등等, ‘보리’는 각覺. 합해서 읽으면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 된다. 그러니까 지금 수보리는 최상의 바르고 평등한 깨닮음을 얻으려는 마음을 낸 사람이 그 마음을 어디에 두며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지를 여쭙고 있는 것이다.
마음! 분명 나한테서 나오는 것인데 내 맘대로 안 된다! 이 마음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에 머물도록 할 것이며 어떻게 하면 마음의 부림을 당하지 않고 마음을 부리며 살 것인가? 이 마음을 어떻게 써야 마침내 부처의 땅에 들어갈 것인가?
<금강경>은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석가 세존의 대답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