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사순절 제4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기리고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고난에 동참하는 의미로 육체적 즐거움을 멀리하고 경건하게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공동설교를 해주신 방정빈 청년께 감사합니다.
2. 다음주일 오후 5시, 안산화랑유원지 내 생명안전공원 부지에서 세월호 참사 5주기 기억예배를 드립니다. 이 예배 참석여부를 논의하겠습니다.
3.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나눔을 할 예정입니다.
4. 이번주 수요성서대학은 [예수 성경 동성애]의 2~3장으로 독서 토론할 예정이니 책을 읽고 미리 준비해 오시기 바랍니다.
베트남 선교사로 떠나는 후배 부부를 응원하며
지난 월요일, 특별한 모임이 있어 참석하였습니다. 신학대학교 다닐 때 '사람됨의 신학 연구회'라는 학회에서 같이 활동했던 여자 후배가 남편(이 목사도 아주 가까운 후배입니다)과 함께 선교사 교육을 받고 4월 초에 베트남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지인들이 모여 환송 모임을 한 것입니다. 사실 이 모임에는 처음 보는 아주 젊은 후배들도 많이 와서 많이 뻘쭘하고 어색하였습니다만...
이 후배는 순수하고 꾸밈없으며 정의로운데 성격은 와일드한, 한 마디로 단무지(?) 같은 사람인데 의외로 수학도 잘하고 사업 수완도 있어서 수학학원 원장을 했었고 지인들에 대한 애정도 깊은 데다가 요가 자격증까지 가진, 아주 독특한 캐릭터로, 제가 아주 각별하게 생각하는 후배입니다. 해마다 때가 되면 전화라도 걸어서 점점 늙어가고 혈기 꺾여가는 '오빠'를 걱정해주며 응원해주는! 그런 후배가 멀리 떠나간다니 아쉬워야 할 텐데 왠지 옆 동네로 이사 간다는 것처럼 크게 아쉽지도 않고 걱정도 안 되고... 해서 이건 무슨 감정일까 스스로 의아해하고 있습니다.
해외 선교사가 남편의 오랜 꿈이라니 이제 그 꿈에 함께 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딛는데 그것을 보는 저는 생각이 복잡합니다. 외국인의 선교가 금지된 곳, 기독교가 별로 매력 없는 곳, 요즘 한창 핫하게 뜨고 있는 개발도상국, 공식적 사회주의 국가, 북한만큼이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들의 땅, 여자들이 한국으로 많이 시집오는 나라, 감리교 선교사들이 나름의 규율과 서열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그곳 베트남에서 젊은 부부가 전할 복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하는 생각 때문입니다. 기독교인 한 명, 감리교회 세례 입교자 한 명을 더하는 것보다는 그들의 삶에 녹아들어 그들과 함께 살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누리며 살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복음 전도가 되기를 마음 담아 기도해봅니다.
“주일 오전의 낯선 풍경”
우리 교회 드러머인 방정혁 학생과 '언제나 모범생' 함옥분 장로님의 특별한 만남이 매주일 아침마다 펼쳐집니다. 지난주일 장로님이 유난히 일찍 오셨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방정혁 학생에게 드럼을 배우신다고 합니다. 언제나 뜨거운 학구열을 불태우시는 장로님을 응원하며 잘 배우셔서 세컨드 드러머가 돼주시기 바래요.
“청소년 독서방 : 디디의 우산”
윤재민 학생, 방정혁 학생이 이관택 목사님과 꾸준하게 독서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는 연신내에서 모임을 갖고 우아한 카페에서 책 이야기를 나누고 점심에는 연신내 시장에서 소박하지만 맛있는 식사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이야기 나눈 책은 황정은 작가의 '디디의 우산'이랍니다. 책 읽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건 우리 어른들도 좀 배우면 좋겠습니다. ^^ 우리 학생들에게 존경과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세요.
세월호 영상녹화장치 조작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3월 28일 오전, 서울 포스트타워 대회의실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과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조위)가 주최한 '세월호 CCTV 조사 중간발표'에서 박병우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국장이, 세월호 참사의 주요 증거물인 폐쇄 회로(CC) TV DVR(Digital Video Recorder·영상 저장 녹화장치)의 조작 가능성을 제기하였습니다.
특조위는 이 장치의 인양 시점에 의문을 제기하였으며 해군이 수거한 것과 검찰에 증거로 제시된 기기가 서로 다른 것으로 의심된다며 그 증거로 DVR의 손잡이 고무패킹 유무, 전면 잠금 부위 훼손 여부 등을 제시하였고 해군과 해경이 은폐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침몰 직전의 3분이 삭제된 것이 가장 큰 의문입니다. 이 보고 후에 중요한 사안을 포함한 관련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에 의하면 사실 이 부분에 대한 문제 제기는 이미 했었지만 별로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이번에 부각된 것이라고 합니다. 가족회는 '세월호참사 특별수사단' 설치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주기를 맞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속 시원하게 밝혀진 것은 아직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할 이유입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이 인생에서 겪는 가장 큰 스트레스라고 합니다. 아직 사고 원인도 알지 못하여 가슴에조차 묻지 못한 세월호 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을 위로하여 주십시오. 우리도 사랑하는 가족을 억울하게 잃은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기억하여 그 아픔과 슬픔에 함께 하겠습니다.
14. 알록달록 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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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이 시끄럽습니다. 한참이나 보고 있는 것은 자기 노트입니다. 그리고 빼앗아 보고 있는 것은 친구의 노트입니다. 그리고 품평입니다.
“눈이 이상해.”
“너 귀여운데.”
“이게 저에요?”
정지된 표현으로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사진이 부쩍부쩍 자라는 아이를 다 담을 수는 없었나 봅니다. 물을 건 아닌데.
“어. 너야. 생활기록부랑 학생증에 있는 네 사진.”
수업 시간에 사용할 노트를 만듭니다. 노트에는 일 년 동안 함께 나눌 수업 주제와 필기할 여러 쪽이 있습니다. 노트가 아이들을 시끄럽게 한 이유는 표지 뒷면에 붙인 아이들의 사진 때문입니다. 수업 후 노트를 통해 대화를 하는데 이름만 가지고 부족해 붙인 사진입니다. 노트의 사진이 일으킨 십여 분의 짧은, 재미있는 소란입니다.
“어, 근데 왜 나는 보라색이지?”
“난 분홍색.”
두 번째 소란입니다. 아이들에게 나누어준 노트의 표지는 살짝 두꺼운 그래 올록볼록할 수 있는 180g/㎡ 무게의, 머메이드지입니다. 그리고 이 표지의 색은 다양합니다. 정말 다양합니다. 여러 색의 표지를 잘 섞어서 그냥 섞은 채 순서대로 앞면에는 학번과 이름을, 뒷면에는 사진을 붙였습니다. 그러니 아이들은 노트의 색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단단히 붙인 이름과 사진 덕에 바꿀 수도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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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는 왜 초록. 아니 노랑. 야. 이게 무슨 색이야. 선생님 제 껀 왜, 그러니까. 이 색이에요?”
살며 세상 알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나’를 포함한 ‘있는 것’이 지금 여기에 있는 문제입니다. 있기는 있는데 왜 지금인지, 왜 여기인지 도통 알 수가 없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신(神)은 알고 있겠지 하는 것인데 그럼 또 신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니 여간 번잡스러운 게 아닙니다. 속 시원하게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는 ‘있는 것(존재)’의 한 성격으로 ‘던져진 존재’라는 설명을 제안합니다. 세계 안에 있는 ‘있는 것’들은 그 시작에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 있음에 대해 ‘어디서’, ‘왜’ 등의 질문이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한마디로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 그는 ‘던져졌다’라는 표현과 함께 그 ‘있는 것’들이 가진 기본적인 성격을 ‘던져진 성격(Geworfenheit, thrownness, 被投性)’이라 합니다.
“그래. 너희가 왜 빨강을 가지게 되었는지 모르겠구나.”
“선생님이 정한 거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의도는 아니란다. 우리 모두 세상에 있는 이유도 모르겠고 게다가 이 세상에 있기를 선택하지도 않았구나. 이건 어쩔 수 없는 거 아닐까?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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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빨강은 좀….”
“조금 맘에 들지 않아도 참아줄 수 있겠니? 만든 사람 성의를 봐서. 부탁.”
아이들의 손은 노트의 다른 면으로 향합니다. 1년의 수업 계획이 앉은 표에 멈추어 글자를 따라 입술을 오물거립니다. 그리곤 텅 빈 면들을 만나면 조심스런 엄지와 검지가 한 장 한 장 넘겨 봅니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또 다른 하나를 제안합니다. ‘있는 것’들에 대해 ‘던져진 성격’과 함께 ‘던지는 성격(Antwortenhein, projection, 企投性)’입니다. 인간은 분명 ‘던져진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던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에 던져진 것 같지만 이제 인간은 던져진 것에 멈추지 않고 자신을 던질 수 있습니다. 스스로 언제, 어떻게, 어디로, 왜 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던지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실현할 수 있습니다.
“너희 노트에 비어 있는, 하얀 공간들이 있구나. 그 빈 공간들은 너희 것이고 너희 곳이란다. 노트가 자신만의 의미 있는 노트가 되고 안 되고는 노트의 표지가 아니라 노트에 담긴 것들이란다. 그걸 만드는 이가 바로 너희들 각자이고. 노트는 만들어진 것이고 동시에 만드는 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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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상의 눈으로 출현하신 고따마께 묻습니다. 출생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행위에 따라 바라문이 됩니까? 어떻게 바라문을 알아보는 지, 모르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26. 인간 가운데서 소를 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면, 바쎗타여, 그는 농부이지 바라문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쎗타의 경」, 『숫타니파타』, 전재성 역주 (한국빠알리성전협회, 2011), 329~339쪽.
바쎗타(V?se??ha)의 질문에 대한 고따마(Siddhattha Gotama,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명쾌합니다. ‘농부의 삶을 살면 농부이고 바라문(제사장)의 삶을 살면 바라문이다.’ ‘세계 안에 있음(in der welt sein, being in the world)’이 가진 두 가지 성격, ‘어쩔 수 없음’과 ‘어쩔 수 있음’에서 고따마는 ‘어쩔 수 있음’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교육은 ‘어쩔 수 없음’이 아니라 ‘어쩔 수 있음’에 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어쩔 수 있음’을 발견하고 용기 있게 자신을 던져 스스로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격려하는 것입니다.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영화, 『친구』, 곽경택 감독)가 아니라 “씨앗들이 자라나게”(칼릴 지브란, Kahlil Gibran)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노트를 받았습니다. 아이들은 알록달록 표지 노트에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 알록달록한 노트를 만들어 갑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유일하고 소중한 삶을.
제16장
종말 I (4)
8.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그리고 의의 최후승리와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 (3)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 믿습니다.
대심판에서 성부 하나님은 심판의 권세를 인자(人子)에게 일임하신다. 인자이신 주님은 이 세상에 강림하셔서 생존자나 이미 죽은 자를 다 심판하신다. 심판받을 숫자는 바다의 모래처럼 무수하게 많아 셀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이 땅 위에 살다가 죽은 자들이 다 그 앞에 나타날 것이며, 각 사람은 주님의 심판대 앞에서 생전에 행한 모든 일을 선하거나 악한 것에 관계 없이 모두 진실하게 말하게 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행동만이 폭로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온 모든 말도 폭로된다. 이 심판에서 의인은 그의 지난 날의 죄과 때문에 고민하고 부끄러워하기보다 오히려 즐거워한다. 왜냐하면 그의 죄과는 어린양의 피로 깨끗이 용서받아 없어졌기 때문이다. 의인을 판단하신 이후에 주님은 왼편에 있는 무리를 심판하신다.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면죄와 축복의 선언을,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는 정죄와 심판의 선고를 할 것이고, 이 선언은 다시 변하지 않는다. 대심판에서 이루어진 형벌이나 상급은 영원히 계속된다. 의인들은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고, 아버지의 오른편에 있는 즐거움의 강물을 마신다. 반대로 악인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는다. 그들은 자만심, 악의, 분노, 공포심, 절망 등으로 끊임없이 고통당하게 된다.?
3. 몸의 부활과 영생 (1)
우리는... 우리 몸의 부활과 영생... 믿습니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지 않고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왜 이렇게 고백하고 있을까? 부활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부활이 영혼의 부활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은 영, 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 영혼의 부활만을 믿는다면 몸의 부활은 부정된다. 그러므로 감리회 신앙고백은 몸의 부활을 믿는다고 고백함으로 영혼만의 부활을 거부하고 있다. 두 번째로 신앙/정신적 부활만을 믿는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일부 학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예수의 몸이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 안에 예수에 대한 신앙이 소생되었음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부활은 몸의 부활을 거부하면서 신앙적 부활 또는 정신적 부활을 의미한다. 감리회 신앙고백은 몸의 부활을 명료하게 고백함으로 부활이 영혼만의 부활이나 신앙적 부활이 아니라 몸의 부활임을 고백한다. 또한 부활은 영혼불멸과 동일시될 수 없다. 영혼불멸은 플라톤의 철학에서도 나타나며 칸트의 철학도 영혼불멸을 요청한다. 한국의 샤머니즘도 영혼불멸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 한(恨)이 맺혀 죽은 영혼은 저 세상으로 가지 못하고 귀신으로 이 세상을 떠돌아다닌다. 유교의 제사에서 영혼불멸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제사 때에 조상의 혼들이 찾아오는 것으로 믿는다. 이와 같이 영혼불멸 사상은 철학과 다른 종교의 신앙에서도 나타난다. 감리교가 고백하는 부활은 몸이 다시 사는 것을 의미하므로 영혼불멸과 차이성이 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영혼이 불멸하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을 믿는 것이다. 미음의 중심은 영혼불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로서의 영생에 있다.”(계속)
제2장 억압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오용의 패턴
미국 교회가 대응한 중요한 사회적 문제는 노예제도(인종분리), 여성의 역할, 이혼자와 재혼자의 문제였는데 이것들은 한때 만장일치였지만 후에 정반대의 입장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미국인들에게 흑인과 여성은 원래 죄인이었고, 도덕적으로 열등하여 온전한 수준에 도달할 수 없고, 고집스러우며 성적으로 난잡하고 위협적이어서 벌받아 마땅하였습니다.
노예제도의 경우 노아의 세 아들 중 함이 저주를 받았다는 창세기 9장
20-26절의 성경 구절을 인용하여 정당하다고 주장하였고 유력한 신학자들이 가세하여 노예폐지론자들은 무신론자,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였고 당시의 일반적인 상식을 진리라고 확신하여 아프리카인들을 백인보다 열등하다며 유전적 논증을 펼치며 교회, 국가, 문명의 존립 여부가 달렸다고 선동하였습니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의 전제를 적용하며 금단의 열매를 따먹은 것이 하와라는 창세기 3장의 구절을 인용하였습니다. 19세기 사회구조의 변화로 교회 안의 여성에 대한 인식이 조금 달라지긴 하였지만 여성을 '장식물들'로 표현하며 남성의 지배 구조 아래 묶어두는 것은 여전하였습니다.
이런 주장의 철학적, 신학적 근거와 원천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입니다. 자연철학의 일종인 이 철학은 '모든 인류에게 상식인 것이 진리'라고 전제합니다. 여기서 상식은 19세기 남부 백인 미국인의 문화를 말합니다. 신앙보다 사실을 강조하고 자연법을 사용하여 그것을 체계화하여 사회적 편견이 성경의 승인을 얻도록 한 것입니다. 반면 복음주의 대각성 운동의 영향을 받은 일단의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성경 전체를 꿰뚫는 중심주제, 즉 하나님의 사랑과 해방에 주목하고 성경이 억압을 용인하지 않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동성애자들을 향해 과거 교회의 잘못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