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알립니다!
1. 오늘은 부활절 제7주일 및 평신도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음주일은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겠습니다.
2. 다음주일 오후에는 묵상과 생활 나눔 기도회를 하겠습니다. 지난 주일에 흩어지는 예배를 드리신 분들은 이 시간에 함께 나눌 이야기를 준비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3. 수요성서대학이 지난주에 종강하였습니다. 한 학기 동안 함께 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다음 학기부터는 주일 오후에 전교인이 함께하는 성서대학으로 새롭게 시작하겠습니다.
흩어지는 예배를 함께여는교회에서 드렸습니다
지난 주일은 흩어지는 예배로 드렸습니다. 다른 교회를 방문하여 예배에 참석하면서 우리 교회와 비교도 해보고 또 배울 점들이 있으면 배워 와 적용해보자는 취지입니다. 이번에 두 번째로 진행하게 되었는데, 생각보다는 많이 호응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아마도 올해에는 이번이 마지막이 될 것 같습니다.
저는 퇴계로에 있는 함께여는교회에 다녀왔습니다. 보수적 교단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매우 앞서 나가는 교회로, 방인성 목사님이라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진취적인 분이 계시는 교회입니다. 방 목사님은 일제 강점기 신사참배에 반대하였고 공산당의 연맹 가입 요구를 거절하여 순교한 방계성 목사님의 손자로 영국에서 목회하시다가 보수적인 장로교 재건노회 성터교회에 담임목사로 초빙되어 목회하시던 중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장로를 당회장으로 임명한 것이 문제가 되어 교회는 물론 교단까지 나오게 되셨습니다만 전혀 굴하지 않고 함께여는교회를 개척하여 신앙동지들과 함께 하고 계시며 사회문제, 특히 통일문제에 매우 예민하게 대응하고 참여하시는 목사님이십니다.
방 목사님은 얼마 전 담임목사에서 물러나시고 젊은 김동훈 목사님이 담임으로 취임하셨다고 합니다. 김 목사님은 이날 장년층 이상 30명가량 함께한 단순하고 간략한 순서의 예배에서 교회 개혁을 주제로 한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배는 연관 단체들과 언론기관 뉴스앤조이 등이 입주한 희년평화빌딩의 지하 카페 바인에서 열리는데, 주방 쪽에 보이는 생맥주 디스펜서가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함께여는교회의 예배에 참석하면서 다시 한 번 무릎 꿇지 않은 7천 명에 대한 예언을 떠올렸 습니다. 정의롭고 사랑 가득한 신앙으로 목소리 높이기를 멈추지 않는 교회와 동지들이 있음에 오늘도 희망을 꿈꿀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함께 기르는 차보라가 되길 바랍니다.”
지난 5월 19일 주일에는 세상에 태어난 박차보라 아기와 출산하신 임수현 전도사님을 축하하기 위해 교우들과 심방하였습니다. 잘 보채지도 않는다는 착한 아기 차보라와의 첫 만남에 교우들은 축복을 아끼지 않았고 임 전도사님도 건강하게 산후조리를 잘 하고 계셨습니다. 아빠 박근조 전도사님도 노고가 많으십니다. 그날 말씀 전한대로 출산을 기피하는 한국에서 차보라의 탄생은 사회에나 교회에나 큰 기쁨입니다. 부디 하나님이 주신 이 생명을 교회의 아기로 생각하고 기도와 관심으로 함께 양육할 것을 부탁드립니다.
“뒤늦은 어린이주일 잔치, 서울랜드에서 했습니다.”
지난달 25일(토), 어린이 여섯 명과 어른 다섯 명이 과천 서울랜드에 다녀왔습니다. 아침 일찍 서둘러 가는 바람에 잠이 덜 깨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서울랜드에 도착해서 놀이기구를 하나 타니까 다들 얼굴이 활짝! 신이 나서 여기저기 뛰어다닙니다. 난생처음 롤러코스터를 타본 아이들은 놀라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답니다. 가장 어린 차올라도 채보란 선생님을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이것 타자, 저것 타자~ 즐겁게 그리고 사고 없이 잘 놀고 왔습니다. 함께 해주신 학부모님과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사랑하는 이들과 함께 소중한 추억을 만들기 위해 떠난 유럽 여행길에서 35명 탑승자 중 일곱 명만 겨우 구조되고 일곱 명이 사망, 스무 명이 실종되는 뜻밖의 유람선 사고로 황망하게 세상을 떠난 우리의 이웃을 기억합니다. 가족들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희생자들을 그 품에 안아 주시길 빕니다.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더불어 사는 사람 모두가 먹는 것. 입는 것. 이런 걱정 좀 안 하고 더럽고 아니꼬운 꼬라지 좀 안 보고 그래서 하루하루가 좀 신명나게 이어지는 그런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이런 세상이 좀 지나친 욕심이라면 적어도 살기가 힘이 들어서 아니면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88년 7월 8일 국회 본회의 / 부산 동구 국회의원 노무현의 발언 중
오월의 완연한 봄, 그토록 시리고 추웠던 겨울을 온전히 견뎌내고 움튼 생명들이 저마다 살아있음을 싱그러히 보여주는 생명의 계절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수십 년간, 우리가 발 딛은 이 땅의 봄은 생명의 계절이 아니었다. ‘사월과 오월’. 사삼으로 시작되는 피의 기억은 사일육과 사일구, 그리고 오일팔로 이어지며 우리의 봄을 빼앗아갔다. 과연 이 숫자들이 담고 있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얼마나 많은 억울한 피눈물과 묵묵한 발걸음, 멈추지 않았던 함성소리와 쓰러지지 않기 위해 버텨냈던 깃발의 나부낌이 있었을까? 여러 번의 쓰러짐과 일어섬. 막막함 가운데 다가왔던 한 줄기의 빛과 그 이후에 또 다시 찾아온 어두움. 진보와 퇴보를 수없이 반복하며 걸어온 이 지난한 걸음들은 그야말로 진정한 봄을 향한 역사의 투쟁이자, 그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염원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봄을 염원하며 자신의 걸음을 묵묵하게 이어왔던 이들에게 오월은 정녕 잔인한 계절일까? 故노무현. 이제 우리는 잔인한 오월에 또 하나의 죽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바보’라 불렸던 전직 대통령의 서거 1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10주기라서 그런지 故노무현 대통령을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최근 두 편이나 제작되었다. 그 중 <노무현과 바보들>은 이미 개봉을 하였고, <시민 노무현>은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전에도 <무현, 두 도시이야기>와 <노무현입니다>가 개봉하여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바 있는데, 길지 않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많은 영화로 제작되는 것만 보아도 ‘노무현의 삶’이 주는 울림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또 우리 시대가 그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노무현입니다>는 이러한 그리움들을 가득 담아 ‘인간 노무현’을 최대한 담백하게 그려낸 수작이다. 사실 스포일러를 약간 발설하자면, 이 영화의 진가는 영화의 주인공을 정작 노무현이 아닌 ‘노무현을 그리워 하는 사람들’로 설정함으로써 진짜 노무현의 울림을 제대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노무현입니다.”라는 말이 주는 울림이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대사는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등장하는데, 노 전 대통령이 지나가는 시민들의 손을 마주 잡으며 건네는 인사인 동시에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로 대변되는 많은 시민들이 선거운동에 동참하면서 목이 터져라 외치던 구호이다.
이 말 앞에 '바보'라는 단어가, '비운의 대통령'이라는 수식이,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구호가 숨어있기 때문인지 한 줄 문장만 보아도 왠지 아련해지고, 눈에 힘이 들어가며, 심지어 미안하다는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경험을 토로하는 이들도 있다. 특히나 故노무현 대통령이 환하게 바보웃음을 짓고 있는 영화의 포스터 사진을 보았을 때 그 울림의 진폭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영화 <노무현입니다>가 2017년 개봉하여 다큐멘터리임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흥행스코어를 기록한 이유에는 아마도 '정권교체'라는 외적인 변수도 주요했겠지만, 결국 노무현이 전해주는 이 '울림'의 실체가 근저에 있었을 것이다.
영화는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민주당(당시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당내 경선 과정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당시 민주당은 이례적으로 후보 선출과정에서 '국민경선제도'를 도입하는데, 영화는 겨우 2% 남짓이었던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경선이 계속 진행됨에 따라 폭발적으로 상승하는 과정을 희열감 넘치게 보여준다. "노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당시 노풍은 태풍이었어요." 라는 대사가 말해주듯, 대한민국 정치사에 있어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례적이고 기적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꼭 간과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그 정치적 기적의 한 가운데에 다름 아닌 일반 시민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발적으로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내용을 공유하고, 서로의 의지를 다지고, 전략을 짜고, 대오를 이루어 선거운동에 나서는 모습들. '동서화합을 꼭 이루어내야 합니다!'라는 구호와 함께 새로운 세상에 대한 염원을 가지고 쏟아져 나온 사람들. 그리고 마치 축제를 즐기듯 모든 열과 성을 다하는 모습들. 끼니도 잠도 걸러 가면서 선거 현장으로 달려와 허리를 굽히며 "안녕하세요, 노무현입니다!"를 외치고, "어르신, 이번에 꼭 노무현이 찍으이소." 라고 말하는 이들의 모습. 영화를 통해 확인한 그들의 얼굴표정에는 진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망, 그리고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절박함이 섞여 있었다.
드라마틱한 경선 과정이 진행됨과 동시에, 영화의 또 다른 축은 다양한 이들의 인터뷰가 담당하고 있다. 노무현이 변호사로 활동하던 당시 그를 검거하기 위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국정원 직원에서 부터, 몇 십 년을 함께한 운전기사, 대통령직을 수행할 당시 참모진 등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노무현과 인생의 한 장 한 장을 함께 써 내려갔던 이들이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때론 웃고, 때론 눈물지으며, 각자의 기억에 기대어 노무현을 추억하고 구성하고 평가한다. 한 개인에 대한 감상적 소회로 시작한 인터뷰는 어느새 그가 가진 이상과 비전이 무엇이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한 개인의 이상을 넘어 많은 이들의 기대와 맞닿게 되었는지를 생각하도록 이끌어 간다.
한편 영화의 후반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고 뒤이어 대선에서 승리하는 모습은 허무하리만큼 짧게 편집되어 보여진다. 그리고 마침내 대통령 취임식 날, 그가 리무진에 올라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던 모습은 곧 그의 장례행렬 장면으로 바뀌며 오버랩 된다. 내 눈에 인상 깊었던 것은 취임식 날 손을 흔들며 열렬히 환호하던 사람들의 행렬이 곧이어 고개를 떨구며 눈물을 흘리는 애도의 무리로 바뀌는 장면이었다. 도대체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을까. 얼마나 깊은 절망의 겨울을 건너야 했을까.
분단과 군부독재로 얼룩진 한국 정치사 속에서 인권과 민주주의, 동서화합과 탈권위를 외치며 기존의 질서와 맞서면서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섰던 정치인 노무현. 그는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해 이야기 하였지만, 결국 현실과 이상 사이의 멀고 먼 거리를 확인하며 처절하게 실패했다. 그리고 그 끝은 외로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분하고 서러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그런 일은 좀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그 스스로가 온몸으로 실패를 선언하는 순간이었다.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와 가장 서글픈 실패의 역사를 동시에 껴안고 있는 '노무현의 삶'은 비단 한 개인만의 스토리가 아니다. 당시 새로운 세상과 새로운 정치를 염원했던 수많은 이들의 공동의 경험이자 기억이며, 공동의 성공이자 실패였다.
"노무현입니다"라는 말이 주는 울림은 그 때문이다. 하나의 ‘인간 노무현’이 아닌, 그가 말한 세상을 함께 꿈꾸며 스스로 '노무현입니다'를 자처했던 수많은 이들의 염원, 기대, 삶, 절박함, 그리고 절망과 슬픔이 그 말 속에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글을 마무리하며 그리스도인으로써의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기독교 신앙 역시 공동의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어떤 개인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어렴풋이 꿈꾸던 하나님 나라를 실현해 나가기 위해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며 그 삶의 순간 순간을 조금씩 변혁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 동안 수많은 이들의 염원, 기대, 삶, 절박함, 그리고 공동으로 경험한 절망과 슬픔이 신앙의 토대를 형성하며, 부활신앙의 고백으로 이어져 왔다. 고난과 부활로 이어지는 이 절망과 희망의 절기를 지나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의 기억을 확인하고, 우리의 여정을 다시금 환기하며, 또 한번의 희망을 품은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비록 암담하고 불안한 미래로 가득한 길 위에 서 있을지라도 믿음, 소망, 사랑이 가득 담긴 발걸음을 내딛는 바로 이 순간, 우리 가운데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 나라에 감사하면서 말이다.
혼자 꾸는 꿈은 그저 꿈으로 남지만,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던가. 사람과 사람의 기억이 맞닿는 곳에서부터 울림은 시작된다. 당신과 나의 기억이 마주하는 곳에 생겨난 그 울림이 조금 더 멀리 퍼져 나가기를. 그리고 여전히 겨울 같은 이 땅에도 진정한 봄의 소리가 울려 퍼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푸릇하지만 서글픔이 밀려오는 오월의 거리, 사람 냄새 풀풀 흩날리며 살포시 걷던 그의 발걸음이 그리워진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는데 큰 스님 일천 이백 오십 인으로 더불어 함께하셨더니,
(一時에 佛이 在査衛國祇樹給孤獨園하셨는데 興大比丘衆千二百五十人으로 俱시더니)
불佛은 부처님. 산스크리트어 붓다Buddha를 한문으로 불타佛陀라고 음역했는데 줄여서 불佛이라고도 한다. 뜻은 깨달음(覺) 또는 깨달은 사람(覺者). 여기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이다.(불교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 이전에 여러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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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안으로 깨달아 허망한 생각이 일지 않고 밖으로 깨달아 여섯 티끌(六塵. 色, 聲, 香, 味, 觸, 法 – 마음을 어지럽히는 여섯 識의 대상물)에 물들지 않는다. 또 말하기를, 부처란 가르침의 주인이시며, 상相 아니면서 상相인 분을 응신불應身佛이라 하고, 상이면서 상 아닌 분을 보신불普身佛이라 하고, 상 아니면서 상 아님도 아닌 분을 법신불法身佛이라 한다.”(李文會)
사위국査衛國은 파사波斯 익匿 왕이 다스리던 나라이고, 기수祇樹는 익匿 왕의 태자太子인 기타祇陀가 심은 나무라는 뜻인데, 제법 숲이 우거진 곳이었나 보다. 급고독원給孤獨園은 급고독의 정원이란 뜻이고, 숲의 주인인 수달장자須達長者가 혼자 사는 어려운 사람들을 먹였으므로 급고독給孤獨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수달장자가 많은 황금을 주고 태자로부터 정원을 사서 거기에 부처님을 모시려고 정사精舍를 지었다고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시時 공空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 자체는 시.공을 초월한다.
비구比丘는 산스크리트어 비쿠bhikkhu를 한자로 옮긴 것인데 불교에 귀의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남승이다. 여승은 비구니bhikkuni, 뜻은 빌어먹는 사람(乞士)이다.
“위로는 부처님들한테 법法을 빌어 자기의 진성眞性을 밝히고, 아래로는 세상 사람들한테 음식을 빌어 그들을 위해 복의 씨를 뿌려 주니, 이런 사람을 걸사(乞士)라 하겠다.”(王日休)
큰 스님(大比丘)이 있으면 작은 스님(小比丘)도 있다는 말일터인데, 이에 대하여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 사람을 작은 스님이라고 하고, 악과 선을 함께 버린 스님을 큰 스님이라 한다”(李文會)고 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한자리에 있으려면 작은 스님은 안 되고 큰 스님이라야 된다? 그건 아니겠지. 큰 스님이 있는데 작은 스님이 어찌 없었으랴? 큰 스님 작은 스님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 둘을 분간하여 말하는 것은 작은 스님의 몫이렷다.
왜 하필 대비구 大比丘 일천 이백 오십인가? 모르겠다. 모이다 보니까 그만한 수가 되었겠지. 많게 보면 많은 수요, 적게 보면 적은 수다.
꿀 있으면 광고하지 않아도 벌 나비가 모여든다. 부처님 계신 곳에 어찌 비구들이 모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한편 벌 나비 없이 꿀인들 있으랴? 부처님 때문에 중생 있고 중생 때문에 부처님 있는 것. 그래서 '함께 구俱'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있고, 나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있는 것이다.
제8장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모두가 하나
예수님은 특히 버려진 자들, 이방인들, 주변인들, 잊혀진 자들, 외국인들을 환영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자신처럼 사랑하라!' 이것이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거부하였지만 예수님은 미움받고 소외되었으나 자신의 목숨을 걸고 강도 만난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하셨습니다.
결혼과 이혼에 대한 토론에서 예수님은 오늘날 동성애자와 같은 의미인 '고자'를 언급하셨습니다. 여자-고자-어린이로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가부장적 위계질서를 전복시키고 평등주의적 환대를 소수의 특권층만이 아닌 모두에게로 확장시키셨습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보통의 남자들처럼 가정을 꾸리지 않은 예수님도 고자들과 똑같은 경멸과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에티오피아의 궁정관리인 내시와 빌립의 만남을 증언합니다. 이 내시는 이사야서의 '격리된'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을 읽고 있으며 자신이 당하는 굴욕과 따돌림을 이 이야기에 투영하였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고자같이 '흠 있는' 자들은 예배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다는 신명기의 규정을 뒤집어 '비록 고자라도… 영원히 기억되게 하겠다'는 예언을 합니다(56장). 새로운 세대에게 새로운 해석으로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이 내시와 동일시되는 사람들, 즉 식민주의나 인종주의로 차별받는 아프리카인이든, 이성애주의와 동성애 공포증으로 성적으로 따돌림당한 사람이든, 하나님이 인류를 다루는 역사에서 그들 자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이웃이 되는 사람들의 범주를 넓히시며 그들이 현재의 모습 그대로 환영하고 예우하십니다. 성경에서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이성애적 가정들을 제거하면, 새로운 깊이와 이해의 온전한 세계가 나타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성경의 중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