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역사'의 달]
역사란 인류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궤적입니다. 듣기만 해도 어깨가 으쓱할 자랑스러운 역사도 있지만 우리 잘못도 아닌데 낯 뜨거워지는 부끄러운 역사도 있습니다. 역사를 되돌아 보며 우리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향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1월이 되기를 바랍니다.
■ 알립니다!
1. 오늘은 주현 후 제2주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신 하나님의 거룩함을 기리는 주현절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 마음이 깊어지기를 빕니다.
2. 2020년 목회계획서가 발행되었습니다. 꼭 챙겨가셔서 일정 및 행사를 참고하시시기 바랍니다.
3. 내일(20일) 오전 11시에 갈현중앙교회에서 작은교회 연합구역회를 합니다. 우리교회 지방회원으로 민지애 사모님(교육부), 박순용 집사님(문화부)을 추천하였습니다.
4. 임정희 집사님이 갑상선암 수술을 받고 요양병원에 입원하셨고 방현섭 목사님도 정형외과 수술을 받고 회복중이십니다. 그밖에 건강에 어려움 겪는 교우들을 위하여 기도해 주십시오.
5. 기부금 영수증이 필요하신 분은 말씀해 주십시오.
6. 주말부터 시작되는 설명절을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보내시기 바라며 왕래하시는 길도 안전하게 다녀오십시오.
목회서신
'이상한 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지난 월요일, 은평동지방 등급대사경회가 열렸고 저는 2년급 강사로 요엘, 아모스, 오바댜, 요나의 소예언서 네 권을 강의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매일 한 시간씩 사흘을 강연을 해야 하는데 병원 입원 일정 때문에 다른 목사님들과 협의해 월요일 하루에 세 시간 연속 강의를 하고 제 강의를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중간에 6년을 빠지기는 했지만 목회하면서 계속 해왔던 사경회라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올해는 뭔가 느낌이 많이 다릅니다.
우리교회에서 성서대학 강의하는 방식과 내용으로, 수준은 조금 평이하게 잡고 했습니다. 우선 고령사회 진입으로 인하여 교회의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과 젊은 세대가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로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역사적 비평방법에 따라 성서가 기록되고 엮여진 역사를 설명하고 성서에 나오는 기적과 같은 독특한 이야기를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중요한 것은 기적이 아니라 기적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이라고 강의하였습니다.
예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강의였는데 예년보다 많은 교인들이 혼란을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천국이 어떤 곳이냐, 왜 우리 목사님이 가르치는 것과 다르냐, 성경은 하나님 말씀이라고 배웠는데 사람이 쓴 거면 하나님 말씀이 아니지 않느냐… 결국 '같은 것을 봐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이해할 수 있는 것처럼 조금 다르게 성경을 보는 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생각하고 교회에서 열심히 하라'는 변명 아닌 변명으로 마무리를 하였습니다. 가끔 사경회에서 방언을 가르친다거나 과하게 영적 해석을 하는 목사님들이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었는데 이제는 제가 그런 '이상한' 목사가 된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웠습니다.
사실은 당황스러움보다는 안타까움이 더 컸습니다. 어떤 그룹이든지 수세에 몰린다고 스스로 느끼면 더욱 움츠러들고 배타적이 되어 강력한 내부 결속만 남게 됩니다. 자신들의 가치와 다른 것들을 받아들이려는 열린 태도는 없어지고, 옳고 그름을 떠나 기존의 것을 수구적으로 집착하는 경향도 보이지요. 지금 교회가 성장세도 꺾이고 사회의 비판 대상이 되면서 더 움츠러들고 다른 생각과 가치들에 대한 반대와 두려움이 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고 포용할 여유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또 교회의 고령화로 인하여 임박한 내세나 죽음 이후의 문제에 분명한 해답을 원하는 노년층이 교회의 중심을 이루게 된 결과인 것 같습니다.
소위 종교적인 세대들인 지금의 '열심교인'들이 기력을 다하게 될 때쯤에 교회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아니, 어떤 일이라도 생긴다면 차라리 다행일지 모릅니다. 아무도 남아있지 않고 그래서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수천 년 전의 하나님 신앙 고백, 2천 년 전의 예수님을 오늘의 언어와 방식으로 되살려내는 일이 두려움의 대상이 된다면 우리는 텅 빈 교회, 소수의 열성적 신자들만이 남아 지키는 고립된 교회의 미래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번 사경회는 저에게도 색다른 공포심을 맛보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토요일에는 장로가 되기 위하여 진급과정을 밟고 있는 분들에게 강의를 하였습니다. 나름 교회에서 신앙심을 인정받고 교회 성장에 공로가 있다고 인정돼 장로로 추천된 분들입니다. 강의가 시작되자 어떤 분이 '성서를 읽다 보면 같은 이야기인데 서로 다르게 쓰여진 부분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전도하면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묻습니다. 그래서 성서는 역사기록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증진을 위한 교육적인 설교집이기에 각 공동체의 상황에 가장 잘 맞는 방식으로 썼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거리며 '장로씩이나 돼서 어디 물어볼 데가 없었다'며 고맙다고 합니다. 다행히 교회의 중직을 맡으신 분들이 이런 의문도 갖고 알고자하는 열정도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런 분들의 건강한 궁금증과 정직한 고백을 위한 노력이 경직된 교회의 문화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습니다.
'이상한 목사'라고 눈총 받는 일이 교회의 미래를 위해 필요하다면 달게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좋은만남 공동체가 존재하고 성숙해야 할 이유가 더욱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미국과 해리스 대사의 주제넘는 내정간섭을 규탄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기자회견에서 "남북협력을 더욱 증진시켜 나갈 현실적인 방안을 모색할 필요성이 더욱 절실해졌다"며 남북협력을 강조하였습니다. 문 대통령은 북한 개별관광을 언급하며 국제 제재에 저촉되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모색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해리스 주한미국대사는 "제재를 유발할 수 있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선 한국은 북한과의 어떠한 계획도 한미 워킹그룹을 통해야 한다"고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해리스 대사의 발언에 대해 강력 반발하며 "대사가 주재국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공개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대단히 부적절하다, 대북정책은 대한민국 주권에 해당하는 문제"라는 입장을 밝혔고 당·정도 일제히 비판하였습니다. 해리스 대사의 발언은 남북 협력 사업에 '제재 잣대'를 들이대며 내정간섭을 하는 위협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은 한국을 자국의 꼭두각시나 하수인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미국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하여 지나친 내정간섭을 중단하고 국제질서를 존중하여 한국의 자주적 결정에 동의해야 합니다.
■ 사회 성화를 위한 기도
강대국의 폭력적인 내정간섭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공존과 상생을 위해 평화를 구축하려는 한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한 희생제물이 될 것을 강요하는 미국의 오만과 방자를 꾸짖어 주시고 평화로운 세상을 위한 국가들의 노력에 하나님의 정의로 응답하여 주십시오.
(28) 뉘하운의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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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학교종교교육탐방 연수를 다녀왔습니다. 핀란드와 덴마크의 네 학교를 방문해 그 나라 교육 제도를 연구하고 종교교육의 현장을 탐방했습니다. 이유를 묻는다면 우리나라 학교종교교육이 가진 답답함이고 그 갑갑함에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다는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다른 문제를 말합니다. 어떤 이들은 왜 그리스도교적 선교를 목적한 종교교육이 불가능한가 답을 찾고자 합니다. 그리스도교 학교의 설립목적의 큰 하나가 선교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이는 그리스도교적 종교교육을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에 근거를 둔 가치 교육이 가진 장점이 있고 이를 바탕한 교육이 필요하다 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리스도교적이기 때문에 현실 학교교육에서 거부당한다는 현실 인식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다종교 사회에서 특정 종교 중심이 아닌 다가치 존중의 객관적 종교교육에 대한 필요가 어떻게 발견되고 실현될 수 있는가 물음에 대한 갈급입니다.
2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놓고 있었습니다. 교육 자체가 위치한 사회에 대한 물음입니다. 학교종교교육에 대한 물음과 해답 찾기가 결국 한 사회에 위치한 교육의 본질적 자리에 대해 조금 간과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교육을 왜 해야 하는가 이유의 한 축이었습니다.
교육이 위치한 사회 그리고 그 사회의 가치, 학교종교교교육을 반드시 실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놓친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러고 보니 학교종교교육 역시도 한국 사회에 깊이 바탕하고 있습니다.
핀란드와 덴마크 학교종교교육은 바로 핀란드와 덴마크라는 사회가 가진 특성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 사회가 그렇기 때문에 그래 왔다는 것입니다. 현실에 바탕한 종교교육이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우리나라와 그 나라들이 다르기 때문에 종교교육 역시도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핀란드의 ‘평등교육’은 핀란드 사회가 지향하는 가치가 평등이기 때문에 교육 역시도 평등을 지향하고 종교교육 역시도 그렇게 실시되고 있습니다. 덴마크의 ‘행복교육’은 덴마크가 지향하는 가치가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이 행복은 우리가 지향하는 행복과 다른 행복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을 빌어 말하면 그 행복은 ‘소유to have’가 아니라 ‘존재to be’입니다. 그러니 종교교육 역시도 이 존재에 바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음은 오늘 우리나라의 종교교육은 아니 우리나라는 무엇을 지향하고 있는가입니다. 이 지향점의 부재 또는 혼돈이 오늘 우리 학교종교교육이 가진 다른 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종교교육이 가진 다른 과제는 그 지향점 제시입니다. 이 부분은 더욱더 고민하려 합니다.
3
뉘하운Nyhavn. ‘새로운 항구’라는 뜻으로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에 있습니다. 17세기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5세 때 건설되었습니다. 부두로 사용되는 수로에는 수많은 요트와 관광선이 오가고 북쪽에는 나무, 벽돌, 석회로 만든 예쁜 색들을 가진 건축물들이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뉘하운의 비둘기입니다. 건물들이 다른 것은 다른 것이고 비둘기가 생각나는 건 우리나라의 비둘기가 있었고 그 때문에 그 비둘기가 뉘하운에서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뉘하운의 비둘기를 무어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뉘하운의 비둘기를 함께 두고 보면 둘을 구분할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의 비둘기는 우리나라에 있었기 때문이고 뉘하운의 비둘기는 뉘하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뉘하운의 비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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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수보리여, 중생을 좇아 이 경을 설하되 다만 사구게를 설해도, 마땅히 알아라, 그곳에 모든 세간의 천신들, 인간들, 아수라들이 함께 공양하기를 부처님 탑묘에 하듯이 할 터인데 하물며 어떤 사람이 능히 경을 다 받아 모시고 독송한다면 어떠하겠느냐? 수보리여, 마땅히 알아라, 그 사람은 가장 높고 으뜸가는 법을 성취했으니 만약 이 경전이 있는 곳이면 곧 부처님이 계신 곳이오 존중할 제자들이 있는 곳이다.
復次須菩提여, 隨說是經하되 乃至四句偈等하여도 當知로다, 此處에 一切世間天人阿修羅가 皆應供養如佛塔廟거늘 河況有人이 盡能受持讀誦이리오. 須菩提여 當知로다, 是人은 成就最上第一希有之法이니 若是經典所在之處면 卽爲有佛이요 若尊重弟子니라.
불佛·법法·승僧은 셋이면서 하나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곧 부처님이요 승가僧伽다. 누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경을 설하면 그 자리에 부처님이 계신 것이니 어찌 천신과 인간과 아수라阿修羅(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가 모두 받들어 공양하지 않겠는가?
능히 경을 받아 모신다 함은 그대로 좇아서 산다는 뜻이다. 경은 책이지만 책이 아니다. 길이다. 아무리 읽어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경을 모신 사람이 아니다.
그러기에 경이 있는 곳, 그러니까 경을 좇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 곳에는 부처님과 그의 존경받을 만한 제자들이 함께 있는 것이다.
“있는 자리에서 사람을 만나 이 경을 설하되 언제나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이 없이 하면 곧 그 사람 몸 속에 여래의 전신사리全身舍利가 있으니 그래서 부처님 탑묘와 같다고 말했다.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경을 설하여 듣는 자들로 하여금 헛되이 헤매는 마음을 버리고 깨달아 본디 불성佛性을 얻어서 언제나 진실되게 하면, 천신과 사람과 아수라가 모두 감복하여 그를 공양할 것이다. 자기 마음(自心)으로 이 경을 송득誦得하고 자기 마음으로 경의 뜻을 해득하고 자기 마음으로 집착하지 않고 모양을 지니지 않는 이치(無着無相之理)를 체득한다. 있는 자리에서 언제나 부처님의 행行을 닦으니 곧 ‘자기 마음이 부처다(自心是佛)’. 그래서 그 있는 자리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말한 것이다.”(六祖)
“경이란 곧 법보法寶다. 경 있는 곳에 부처님이 계시니 곧 불보佛寶다. 부처님 계신 곳에 존경할 만한 제자들이 있으니 곧 승보僧寶다. 경전 있는 곳에 이렇게 삼보三寶가 함께 있다. 제자란, 스승 뒷자리에 거하여 배운다 해서 제(弟, 아우)요 스승을 좇아 깨달음이 난다 해서 자(子, 자식)다. 또는 부 형을 모시는 예로써 스승을 섬긴다 해서 제자라고 한다.”(僧 若訥)
“성취했다는 말은 견성見性하여 가장 높고 으뜸가는 법에 통달했다는 말이다. 부처와 중생이 본디 다를 바 없어서 누구든지 그 마음이 맑고 깨끗하여 나지 않고 죽지 않으며 헛된 생각이 일지 않으면 곧 선 자리에서 성불한다.”(李文會)
“마음이 곧 부처라, 달리 부처가 없다. 부처 곧 마음이다, 달리 마음이 없다. 주먹으로 손바닥을 만들고 물이 물결을 이룸과 같으니, 물결이 곧 물이요 손바닥이 곧 주먹이다.”(杲禪師)
무업선사無業禪師가 마조馬祖 스님께 여쭈었다. 어째서 마음이 곧 부처(卽心是佛)라고 하십니까? 스님이 대답하시기를, 그대가 그 마음을 미처 깨닫지 못한 것일 뿐, 다른 물건이 있는 게 아니다. 어두워서 중생이요(迷卽衆生) 깨달으면 곧 부처(悟卽是佛)니, 주먹으로 손바닥을 만들고 손바닥으로 주먹을 만드는 것과 같다. 선사가 한마디 듣고 문득 깨달았다.
한 스님이 마조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대답하기를, 마음이 곧 부처다.
백장百丈이 장경長慶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대답하기를, 소를 타고 소를 찾는구나(騎牛討牛).
한 스님이 수산화상首山和尙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산山이 대답하기를, 신부가 나귀를 탔는데 시어미가 고삐를 끌고 있다.
한 스님이 대양大陽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대답하기를, 어째서 부처가 아니냐?(如何不是佛)
한 스님이 귀종歸宗에게 물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대답하기를, 내가 그대에게 말을 한다면 그대는 내 말을 믿겠는가? 스님이 말했다. 화상께서 성실히 말씀하시는데 제가 어찌 감히 믿지 않겠습니까? 이르기를, 지금 그대가 곧 부처다(只汝便是).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나의 마음은
실로 하느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하느님께 바쳐진 나의 생애는
실로 하느님께 드리는 나의 선물입니다.(Sri Chinmoy)
먼 옛날에 네 사람이 살았다. 그들의 이름은 각각 <모두가>, <누군가>,
<누구나>, <아무도>였다.
중요한 일이 생겨 <모두가> 그 일을 하도록 요청 받았다. <누군가> 하리라고 <모두가> 확신했다. 그러나 아무도 하지 않았다. <누구나> 할 수 있다고 <모두가> 생각했지만, <모두가> 하지 않으리라고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 <모두가> <누군가>를 꾸짖었고 <누구나> 앞장서서 할 수 있는 일을 <아무도> 하지 않은 채 끝났다.
최근에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아직도 그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두고 이 네 사람이 다투고 있다고 한다.(하워드 파리의 만화집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은 이 네 사람의 이름 중 하나를 들고 살아갈 것입니다. 어디서 얻어 들었는지도 모를 얄팍한 지식과 금방 사라질 그 무엇을 놓고 저울질하며 대단한 듯 우쭐대지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은 같고, 그 때가 되면 모든 것이 부질없는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들 <모두는> <누군가>이며 그 <누구나>에 <아무도>가 바로 나일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신앙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진리는 <그>가 바로
<나>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있는데 왜 내가 해, <누군가>가 할 텐데 왜 하필 나야라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나>가 나이고 그 <아무도>가 바로 나일 수 있습니다.
<모두가><누군가><누구나><아무도>가 바로 <나>인 것을 깨닫는 사람을 하나님은 교회에서 찾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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